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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제2의 해방: 북한 자주화와 1956- 57년의 중국-북한관계 = The 2nd Liberation: Struggle for Equal and Sino-North Korea Relations in 19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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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core of the P.R.C foreign policy since the armistice of the Korean War was to establish friendly international environment for the economic development, geared in January 1953. China’s policy towards D.P.R.K was an extension of this policy as well, ‘preventing the re-occurrence of the war’ and ‘maintaining stable status quo.’ Mao Zedong intervened in North Korea’s internal affairs to realize these goals. Sino-Soviet intervention to ‘August incident in 1956’ clearly symbolized Sino-North Korean asymmetric relations.
    Soviet military intervention for Hungary, who experienced similar political oppression, and subsequent debacle of Imre Nagy regime in November 1956 touched off Kim Il-sung’ concern extremely. As a backdrop, Kim Il-sung suggested to invite U.N to negotiation round-table on Korean matters and requested withdrawal of the Chinese Volunteer army from North Korea, forcing to deteriorate Sino-North Korean relations sharply. Finally, Mao Zedong chose the policy of ‘polish method,’ solving the disputes through bilateral dialogues, and consented to withdraw Chinese Volunteer army and acquired Khrushchev’ agreement in January 1957. On the other hand, since January 1957 China began to offer large-scale economic assistance and stop to any political interference for North Korea as well, aiming at appeasing Kim Il-sung. In November 1957, Mao promised to prevent recurrences of intervention for North Korea’s internal matters and informed Kim Il-sung of withdrawing Chinese volunteer army, paving the road for Sino-North Korea honeymoon era.
    In conclusion, ‘August incident in 1956’ and ‘Sino-Soviet intervention,’ targeted to weaken Kim’s power and to establish collective leadership, ended up with reinforcement of Kim’s monolithic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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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ore of the P.R.C foreign policy since the armistice of the Korean War was to establish friendly international environment for the economic development, geared in January 1953. China’s policy towards D.P.R.K was an extension of this policy as we...

    The core of the P.R.C foreign policy since the armistice of the Korean War was to establish friendly international environment for the economic development, geared in January 1953. China’s policy towards D.P.R.K was an extension of this policy as well, ‘preventing the re-occurrence of the war’ and ‘maintaining stable status quo.’ Mao Zedong intervened in North Korea’s internal affairs to realize these goals. Sino-Soviet intervention to ‘August incident in 1956’ clearly symbolized Sino-North Korean asymmetric relations.
    Soviet military intervention for Hungary, who experienced similar political oppression, and subsequent debacle of Imre Nagy regime in November 1956 touched off Kim Il-sung’ concern extremely. As a backdrop, Kim Il-sung suggested to invite U.N to negotiation round-table on Korean matters and requested withdrawal of the Chinese Volunteer army from North Korea, forcing to deteriorate Sino-North Korean relations sharply. Finally, Mao Zedong chose the policy of ‘polish method,’ solving the disputes through bilateral dialogues, and consented to withdraw Chinese Volunteer army and acquired Khrushchev’ agreement in January 1957. On the other hand, since January 1957 China began to offer large-scale economic assistance and stop to any political interference for North Korea as well, aiming at appeasing Kim Il-sung. In November 1957, Mao promised to prevent recurrences of intervention for North Korea’s internal matters and informed Kim Il-sung of withdrawing Chinese volunteer army, paving the road for Sino-North Korea honeymoon era.
    In conclusion, ‘August incident in 1956’ and ‘Sino-Soviet intervention,’ targeted to weaken Kim’s power and to establish collective leadership, ended up with reinforcement of Kim’s monolithic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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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 이후 중국의 외교정책은, 경제건설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 또한 이러한 중국외교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전쟁의 재발방지’와 ‘조선반도의 안정적인 현상유지’는 중국의 대북정책의 목표였으며, 이의 실현을 위하여 중국은 북한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1956년 9월,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중소의 공동개입은, 중•조 간의 비대칭 관계의 상징이었다.
    1956년 11월 초 김일성과 비슷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던 헝가리에 대한 소련군의 무력개입과 뒤이은 헝가리 임레나지(Imre Nagy) 정권의 붕괴는, 김일성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유엔을 초청”할 것을 중국과 소련에 제안하고, 동시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요구로 맞섰으며, 양국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김일성의 철군요구에 마오쩌뚱은 대화를 통해 양국간의 긴장을 완하시키는 소위 ‘폴란드식 해결’ 방법을 선택하였다. 1956년말 중국은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를 결정하고, 1957년 1월 소련의 동의를 얻었다. 1957년부터 중국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 제공을 재개하고 일체의 정치적 간섭을 중지하면서, ‘김일성 달래기’에 나섰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뚱은 북한에 대한 내정 간섭의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통보함으로서 중조관계는 밀월기에 접어 들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집중된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던 ‘8월 종파사건’과 ‘중소의 공동간섭’은 최초 의도와 반대로 김일성 체제 강화로 그 막을 내렸다. 1963년 최용건이 마오쩌뚱에게 말한 것처럼, 북한은 소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1956년을 기점으로 중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중조간의 비대칭성 해소의 길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발생한 중소분쟁으로 김일성은 소위 ‘꽃놀이 패’를 쥐게 되었으며, 동시에 김일성 유일 독재 체제의 구축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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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 이후 중국의 외교정책은, 경제건설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 또한 이러한 중국외교의 연장선 위에 있...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 이후 중국의 외교정책은, 경제건설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 또한 이러한 중국외교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전쟁의 재발방지’와 ‘조선반도의 안정적인 현상유지’는 중국의 대북정책의 목표였으며, 이의 실현을 위하여 중국은 북한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1956년 9월,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중소의 공동개입은, 중•조 간의 비대칭 관계의 상징이었다.
    1956년 11월 초 김일성과 비슷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던 헝가리에 대한 소련군의 무력개입과 뒤이은 헝가리 임레나지(Imre Nagy) 정권의 붕괴는, 김일성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유엔을 초청”할 것을 중국과 소련에 제안하고, 동시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요구로 맞섰으며, 양국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김일성의 철군요구에 마오쩌뚱은 대화를 통해 양국간의 긴장을 완하시키는 소위 ‘폴란드식 해결’ 방법을 선택하였다. 1956년말 중국은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를 결정하고, 1957년 1월 소련의 동의를 얻었다. 1957년부터 중국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 제공을 재개하고 일체의 정치적 간섭을 중지하면서, ‘김일성 달래기’에 나섰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뚱은 북한에 대한 내정 간섭의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통보함으로서 중조관계는 밀월기에 접어 들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집중된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던 ‘8월 종파사건’과 ‘중소의 공동간섭’은 최초 의도와 반대로 김일성 체제 강화로 그 막을 내렸다. 1963년 최용건이 마오쩌뚱에게 말한 것처럼, 북한은 소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1956년을 기점으로 중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중조간의 비대칭성 해소의 길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발생한 중소분쟁으로 김일성은 소위 ‘꽃놀이 패’를 쥐게 되었으며, 동시에 김일성 유일 독재 체제의 구축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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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한설야, "현대문학비평자료집 1" 태학사 1993

    2 "푸자노프 소련대사와 외무상 남일간의 대화기록(1957년 6월4일)"

    3 "푸자노프 대사와 김일성간의 회담록(1957년 11월 12일)"

    4 "큐얼듀코프(Kurdyukov)가 쉐르바코프(N. Shcherbakov)에게 보낸 보고”(1955년 12월 4일)"

    5 (8)"큐얼듀코프(Kurdyukov)가 쉐르바코프(N. Shcherbakov)에게 보낸 보고, "큐얼듀코프(Kurdyukov)가 쉐르바코프(N. Shcherbakov)에게 보낸 보고(1955년 12월 5일)"

    6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행위에 대하여(전원회의 결정 1956년 8월 30-31일)"

    7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에 대한 규률문제를 개정할 데 관하여 (전원회의 결정 1956년 9월 23일)"

    8 "중화인민공화국 소련대사관 1956년 업무 보고(1957년 4월 18일)"

    9 "중화 인민 공화국 창건 8주년 평양시 기념 대회 진행"

    10 "중화 인민 공화국 창건 8주년 기념 연회에서 한 김일성 수상의 연설"

    1 한설야, "현대문학비평자료집 1" 태학사 1993

    2 "푸자노프 소련대사와 외무상 남일간의 대화기록(1957년 6월4일)"

    3 "푸자노프 대사와 김일성간의 회담록(1957년 11월 12일)"

    4 "큐얼듀코프(Kurdyukov)가 쉐르바코프(N. Shcherbakov)에게 보낸 보고”(1955년 12월 4일)"

    5 (8)"큐얼듀코프(Kurdyukov)가 쉐르바코프(N. Shcherbakov)에게 보낸 보고, "큐얼듀코프(Kurdyukov)가 쉐르바코프(N. Shcherbakov)에게 보낸 보고(1955년 12월 5일)"

    6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행위에 대하여(전원회의 결정 1956년 8월 30-31일)"

    7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에 대한 규률문제를 개정할 데 관하여 (전원회의 결정 1956년 9월 23일)"

    8 "중화인민공화국 소련대사관 1956년 업무 보고(1957년 4월 18일)"

    9 "중화 인민 공화국 창건 8주년 평양시 기념 대회 진행"

    10 "중화 인민 공화국 창건 8주년 기념 연회에서 한 김일성 수상의 연설"

    11 박영실, "중국인민지원군과 북·중 관계" 선인 2012

    12 한상준, "중국인민지원군 철군의 원인과 중·북 관계" 국제지역연구원 19 (19): 5-39, 2012

    13 "중국대사대리 차오커치앙과 이바노프 대사 와의 회담록(1956년 10월 26일)"

    14 "중국대리대사 차오커치앙(曹克强)과 이바노프 대사와의 회담록(1956년10월26일)"

    15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 불편한 동거의 역사" 오름 2009

    16 이종석, "중·소의 북한 내정간섭 사례연구 – 8월 종파사건" 6 (6): 2010

    17 김일영, "주한미군 역사 쟁점 전망" 한울아카데미 2009

    18 "조우언라이와 담판 예정 내용에 관한 쉐필로프(D. shepilov)가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1957년 1월 4일)"

    19 "조선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와 조선주재 중국대사 챠오샤오광간의 대화록(1957년 5월29일)"

    20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조선로동당력사" 조선로동당출판사 1991

    21 이종석, "조선로동당 연구" 역사비평사 2003

    22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23 "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세에 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보고 (1957년 1월 9일)"

    24 "조선노동당 상황에 대한”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비방록(1956년 9월 6일)"

    25 "조선노동당 상황에 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비망록(1956년 10월17일)"

    26 "인도네시아 문제에 관한 중국주재 소련대사 유딘과 마오쩌뚱간의 비망록(1958년 2월 28일)"

    27 "이바노프의 일기”(1956년 9월 28일)"

    28 "이바노프의 일기”(1956년 10월8일)"

    29 "이바노프의 일기(1956년 9월27일)"

    30 "이바노프대사와 평양주재 헝가리대사와의 회담에 관한 이바노프 대사의 일기 (1956년10월3일)"

    31 "이바노프 대사와 조선주재 중국대사 챠오샤오광과의 대담기록(1956년 9월 4일)"

    32 "이바노프 대사와 조선주재 중국대사 챠오샤오광과의 대담기록(1956년 9월 4일)"

    33 "이동근 외무부 부상과 푸자노프대사와의 대화록(1958년 2월 16일)"

    34 "이그나예프(A. Ignatiev)가 마오쩌뚱과 이주연(李周淵) 회담 상황을 비신스키(A. Vyshinsky)에게 보낸 전보"

    35 "유딘 중국주재 소련대사와 이영호 중국주재 북한대사간의 회담기록(1957년 10월 19일)"

    36 "위대한 중국 인민의 국경절을 열렬히 축하한다"

    37 김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영도밑에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건설시기 주체성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 (3) : 2001

    38 "월남민주공화국 국내의 정국 갈등 악화에 관한 보고 (조사연구 보고)"

    39 김일성, "우리혁명에서의 주체에 대하여" 1955

    40 김일성, "우리혁명에서의 주체에 대하여" 1960

    41 김일성, "우리혁명에서의 주체에 대하여" 조선노동당출판사 1970

    42 김일성, "우리혁명에서의 주체에 대하여" 조선노동당출판사 1970

    43 김일성, "우리혁명에서의 주체에 대하여" 1962

    44 "쏘련과 기타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친선 협조의 발전 및 그 가일층의 강화의 기본에 관한 쏘련 정부의 선언"

    45 "신조선 편집장 손진파의 해임에 관하여 페트로브(A. Petrov) 참사와 손진파와의 대담"

    46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내는 전보의 초안"

    47 "스탈린과 조우언라이의 회담 기록"

    48 "소련주재 조선대사 이상조와 대담에 관한 페더렌코(N.Fedorenko)의 보고(1956년 9월 5일)"

    49 "소련대사 푸자노프와 박정애와의 대담기록 (1957년 7월 29일)"

    50 "소련대사 푸자노프와 박의완과의 대담기록(1957년 7월12일)"

    51 "소련대사 푸자노프와 남일외상과의 대담기록(1957년 7월 5일)"

    52 "소련대사 푸자노프와 남일외상과의 대담기록(1957년 6월 4일)"

    53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바노프대사에게 보내는 지시(날짜는 명기되어 있지 않음)"

    54 "브레즈네프와 중국당정대표단간의 회담기록(1964년 11월 8일)"

    55 "북한최고인민회의 자료집(제1집, 1기 1차회의-1기 13차회의)" 국토통일원 1953

    56 박종철, "북한의 종파사건과 중국" 5.18연구소 9 (9): 207-242, 2009

    57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1945-2000" 중심 2000

    58 백학순, "북한 권력의 역사 사상·정체성·구조" 한울아카데미 2010

    59 "베리야의 반당적 반국가적 범죄행위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에 관하여(정치위원회 제159차 결정서, 1953년 7월 18일)"

    60 "박헌영의 비호하에서 리승엽 도당들이 감행한 반당적 반국가적 범죄적 행위와 허가이의 자살사건에 관하여(전원회의 제6차회의 결정서 1953년 8월 5일-9일)"

    61 "박정애와 이바노프 대사와의 대담기록 (1956년 11월 19일)"

    62 "박일우의 반당적 종파행위에 대하여(12월 전원회의 결정서, 1955년 12월 2-3일)"

    63 "문화예술분야에서 반동적 부르죠아 사상과의 투쟁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상무위원회 결정서, 1956년 1월 18)"

    64 "모스크바회의에 관한 마오쩌뚱과 유딘대사간의 대담 비망록(1957년 11월 9일)"

    65 김창만, "모든 것은 조국건설에" 조선로동당출판사 1947

    66 "마오쩌뚱과 스탈린과의 회담 기록 (1949년 12월 16일)"

    67 이북명, "로동일가" 문화전선사 1950

    68 "남일외상과 이바노프대사와의 대담(1956년 11월 9일)"

    69 "남일외상과 이바노프 대사와의 대화록(1956년 11월 28일)"

    70 "남일과 푸자노프대사와의 대화록(1957년 11월 26일)"

    71 "남일 외상과 이바노프 대사와의 대담(1956년 11월 3일)"

    72 "남일 외상과 이바노프 대사와의 대담(1956년 10월 24일)"

    73 "김일의 북경회담에 관한 김일성의 설명에 관하여 슈티코프(T. Stykov) 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74 "김일성의 중국방문 계획에 관하여 슈티코프 대사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보"

    75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보고에 관한 푸자노프 대사와 박의완간의 대담록 (1957 년 11월 26일)"

    76 "김일성과 푸자노프대사와의 대담(1957년 12월 17일)"

    77 "김일성과 이바노프대사와의 대화 (1956년 11월 2 8일)"

    78 "김일과의 회담에 관한 마오쩌뚱의 설명에 관하여 코발레프(I. Kovalev)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79 "국제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운동을 전개할 것에 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문"

    80 "迎接一九五三年的伟大任务"

    81 "苏联政府关于发展和进一步加强苏联同其他社会主义国家的友谊和合作的基础的宣言"

    82 "毛泽东第二次接见苏共中央代表团谈话记录(1956년 9월 23일)"

    83 "毛泽东接见苏共中央代表团谈话记录(1956년 9월 18일)"

    84 "毛泽东接见朝鲜代表团谈话纪要(1956년 9월 18일)"

    85 "毛泽东接见尤金谈话记录(1956년 11월 30일)"

    86 逄先知, "毛泽东传(1949-1976)(上)" 中央文献出版社 2003

    87 "毛泽东会见朝鲜最高人民会议常任委员会委员长崔庸健谈话 记录(1963년 6월 16일)"

    88 沈志華., "朝鲜战争再探——中苏朝之间的合作与分歧" 广州人民出版社 2013

    89 "志愿军与朝鲜人民关系中存在的一些问题" 新华社 1957

    90 "外交部档案中有关周恩来与尤金关于撤军问题的会谈 记录(1958년 1월 8일)"

    91 师哲, "在历史巨人身边" 中央文献出版社 1991

    92 中共中央文献研究室, "周恩来年谱(1949-1976)(中)" 央文献出版社 1997

    93 中共中央文献研究室, "周恩来年谱(1949-1976)(上)" 中共中央文献出版社 1997

    94 中共中央文献研究室, "周恩来外交文选" 中央文献出版社 1990

    95 "周恩来和赖嘉文谈话记录(1954년 4월 19일)"

    96 金冲及主编, "周恩来传(1898-1976)(下)" 中央文献出版社 2008

    97 中共中央文献研究室, "周恩来传" 中共中央文献出版社 2011

    98 中共中央文献研究室, "刘少奇 年谱(下)" 中央文献出版社 1996

    99 沈志华, "冷暖无常:中朝关系历史真相(1945-1965)"

    100 "关于答复日侨问题复电的报告(1952년 12월 18일)"

    101 "关于在中国的日本侨民的各项问题中央人民政府有关方面答新华社记者问"

    102 "停战以来志愿军与朝鲜党政军民关系中的若干问题" 新华社 1956

    103 "中越两国总理发表联合公报"

    104 "中缅两国总理联合声明"

    105 "中国红十字会协助日侨分批回国工作结束"

    106 "中华人民共和国政府和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政府代表团谈判公报"

    107 "中华人民共和国政府关于苏联政府一九五六年十月三十日宣言的声明"

    108 中国人民共和国外交部档案馆, "中华人民共和国外交档案选编(第一集)1954年日内瓦会议" 世界知识出版社 2006

    109 "РГАНИ. ф.5.оп.28.д.314"

    110 Mark Kramer, "The ‘Malin Notes’ on the Crises in Hungary and Poland, 1956" 1996

    111 Zhihua Shen, "The whirlwind of China: Zhou Enlai’s shuttle diplomacy in 1957 and its effects" 10 (10): 2010

    112 Mark Kramer., "The Soviet Union and the 1956 Crises in Hungary and Poland: Reassessments and New Findings" 33 (33): 1988

    113 Krzysztof Persak., "The Polish: Soviet Confrontation in 1956 and the Attempted Soviet Military Intervention in Poland" 58 (58): 2006

    114 Csaba Be´ke´s., "The 1956 Hungarian Revolution and the Declaration of Neutrality" 6 (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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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 0.5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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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5 0.46 0.711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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