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ngaesomun’s surname was spelled originally ‘錢(qián)’ or ‘泉(quán)’. This times ‘泉(quán)’ was irrelevant to ‘淵(yeon, yuān). After Yeongaesomun carried out a coup, ‘泉’ and ‘淵’ was formulate as his surmame 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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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범 (한성대학교)
2016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47-76(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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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gaesomun’s surname was spelled originally ‘錢(qián)’ or ‘泉(quán)’. This times ‘泉(quán)’ was irrelevant to ‘淵(yeon, yuān). After Yeongaesomun carried out a coup, ‘泉’ and ‘淵’ was formulate as his surmame making...
Yeongaesomun’s surname was spelled originally ‘錢(qián)’ or ‘泉(quán)’. This times ‘泉(quán)’ was irrelevant to ‘淵(yeon, yuān). After Yeongaesomun carried out a coup, ‘泉’ and ‘淵’ was formulate as his surmame making the tradition of Yeongaesomun’s surname. course not avoiding to call the name of an emperor of Tang(唐) Gaozu(高祖).
The tradition of Yeongaesomun’s surname, that is ‘born in water(水中生)’, was caused by the absence of legitimacy of his power. The ‘born in water(水中生)’ made ‘泉’ and ‘淵[イリ]’ into his surname in place of ‘錢’. ‘泉’ or ‘淵’ was bound up with ‘水(Water)’. Way of the Five Pecks of Rice(五斗米敎), was prevail in Goguryeo, attached importance to ‘水’. So Yeongaesomun did bring Taoism and taoists monk into Goguryeo aggressinely. In this process, he did cunstruct the individual origin of tradition distinguished from The royal family replacing origin of tradition entrusted Goguryeo founder which applied to origin tradition of the aristocracy. A case in point is to destroy the Stone of Jochen(朝天石, The stone entering heaven palace).
But these measures caused disintegration of his family not also the aristocracy breaking away. When he effected a coup, a member of his family wsa housecleaned and before the fall of Goguryeo, his brother, was to close Buddhist community, walked out on Silla. These are the best examples of all. In the end, after the fall of Goguryeo, origin of tradition formed by Yeongaesomun was thrown out, it began to take on a aspect replaced by conventional origin of tradition as we saw with the epitapts of his descendant.
연개소문의 성씨는 처음 ‘錢’ 또는 ‘泉’으로 표기되었다. 이때 ‘泉’은 ‘淵’과 상통할 수 있는 의미는 없었다. 그러다가 같은 의미를 갖는 ‘泉’과 ‘淵’이 성씨 표기로 공식화되...
연개소문의 성씨는 처음 ‘錢’ 또는 ‘泉’으로 표기되었다. 이때 ‘泉’은 ‘淵’과 상통할 수 있는 의미는 없었다. 그러다가 같은 의미를 갖는 ‘泉’과 ‘淵’이 성씨 표기로 공식화되었다. 그 이유는 당 고조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기 보다는 연개소문 가문의 성씨에 대한 전승이 당대 고구려의 정치적 변화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과 연관이 있다.
연개소문 가문의 ‘水中生’ 전승은 그 선대 때 조성되었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나타난 권력의 정당성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정변을 통해 집권을 하면서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泉’과 통용되었던 ‘錢’을 대신하여 泉과 그 뜻이 같은 ‘淵[イリ]’을 함께 성씨의 표기로 삼게 되었다. ‘泉’ 또는 ‘淵’은 당시 고구려에서 성행했던 오두미교에서 중시한 ‘水’와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연개소문은 도교의 수입과 도사의 초빙을 적극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귀족들의 족조전승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던 고구려 시조에 의탁한 출자관념을 대신하여 왕실과 차별화된 독자의 출자전승을 구축했다. 주몽과 연계되는 水中의 朝天石을 깨뜨린 것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처는 고구려 귀족들의 이탈은 물론이고 연개소문 가문 내의 분열을 초래했다. 연개소문의 정변 당시 같은 가문의 일원으로 보이는 인물의 숙청과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연개소문의 아우가 고구려 멸망 이전 신라로 이탈한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결국 고구려 멸망 후 연개소문이 확립한 가계 및 출자 전승은 폐기되어 연개소문 후손들의 묘지명에서 보듯 본래의 전통적인 족조전승으로 대체되었다.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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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朝時代 北朝 고분 출토 西方係 琉璃器 - 신라 고분 출토 서방계 유리기의 수용경로와 관련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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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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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 1.18 | 1.18 | 1.06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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