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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군란 시기 慶軍 막료의 기록을 통해 본 청 내부 정치 갈등 = The Internal strife of Q’ing officials During the Joseon Imo Incident(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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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90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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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882년 임오군란은 병자호란 이후 청이 200여 년 만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사례이자, 조선의 수도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사건이었다. 또한 외교사적 관점에서 임오군란은 조선 문제의 국제화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청에서 파견된 경군은 신속하게 군란을 진압한 이후, 서울 내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후 조선 측 영접관 김창희는 경군의 막료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이 중 장건과 이연호로부터 조선의 시무에 대한 헌책(獻策)을 받을 수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진압 직후 청군 인사와 교류를 가졌던 영접관 김창희와 그가 남긴 기록에 있는 장건과 이연호의 헌책에는 표면적으로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각자 소속 집단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또한 양무(洋務)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구상의 차이도 반영되었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청 내부 정치 갈등이 청류파와 양무파 간의 양자 대립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 집단 간의 다중경쟁의 구도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집단의 이해 관계가 청의 내부 정책뿐만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대외 정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홍장과 오장경의 정치적 반목이 조선 정부를 향한 장건과 이연호의 헌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갈등은 조선에서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1884년 오장경의 사망과 원세개의 전향은 내부 정치 집단 간의 갈등 관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청의 조선 정책 변화의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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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년 임오군란은 병자호란 이후 청이 200여 년 만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사례이자, 조선의 수도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사건이었다. 또한 외교사적 관점에서 임오군란은 조선 문제의 국제...

      1882년 임오군란은 병자호란 이후 청이 200여 년 만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사례이자, 조선의 수도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사건이었다. 또한 외교사적 관점에서 임오군란은 조선 문제의 국제화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청에서 파견된 경군은 신속하게 군란을 진압한 이후, 서울 내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후 조선 측 영접관 김창희는 경군의 막료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이 중 장건과 이연호로부터 조선의 시무에 대한 헌책(獻策)을 받을 수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진압 직후 청군 인사와 교류를 가졌던 영접관 김창희와 그가 남긴 기록에 있는 장건과 이연호의 헌책에는 표면적으로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각자 소속 집단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또한 양무(洋務)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구상의 차이도 반영되었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청 내부 정치 갈등이 청류파와 양무파 간의 양자 대립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 집단 간의 다중경쟁의 구도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집단의 이해 관계가 청의 내부 정책뿐만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대외 정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홍장과 오장경의 정치적 반목이 조선 정부를 향한 장건과 이연호의 헌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갈등은 조선에서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1884년 오장경의 사망과 원세개의 전향은 내부 정치 집단 간의 갈등 관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청의 조선 정책 변화의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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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n 1882, the Imo Incident was the first case in more than 200 years that the Q‘ing dispatched army to Joseon after the Manchu Invasion(1636) of Korea, and it was the first case in which a foreign army was stationed in the capital of Joseon. In addition, from an another spectrum, the Imo Incident is also an important starting point for the internationalization of the Joseon issue.
      The army dispatched from Q’ing were stationed at strategic points in Seoul after quickly suppressing the rebellion. Since then, Kim Chang-hee, a receptionist of the Joseon government, had exchanges with the officers of Q’ing army(慶軍), Jiang jian(張謇) and Lee Yanhu(李延祜). Kim Chang-hee were able to receive suggestions(獻策) for reform of the Joseon government’s pending issue.
      However, Jiang jian and Lee Yan-hu’s suggestions appear to be ostensibly claiming similar content, but they actually represented the positions of their affiliated political groups. In addition, differences in the modernization(洋務) plans and initiatives for both affairs were also reflected.
      In this article, It would like to prove that the internal political conflict of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19th century was not a bilateral confrontation between the Qingliu groups(淸流派) and the Yangwu groups(洋務派), but a multi-competition structure between various political groups. In addition, the interests of each political group were reflected not only in the internal policies of the Office but also in foreign policies including Joseon.
      Political conflicts within the Q’ing were reflected in the suggestions of Jiang jian and Lee Yan-hu, and their political struggles were taking place not in the Qing mainland, but in Joseon. In addition, the death of Wu Jiang-qing(吳長慶) and the conversion of Yuan Shi-kai(袁世凱) around 1884 not only revealed the conflict between internal political groups, but also served as the starting point for the change in the Q’ing Dynasty’s Joseon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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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1882, the Imo Incident was the first case in more than 200 years that the Q‘ing dispatched army to Joseon after the Manchu Invasion(1636) of Korea, and it was the first case in which a foreign army was stationed in the capital of Joseon. In addit...

      In 1882, the Imo Incident was the first case in more than 200 years that the Q‘ing dispatched army to Joseon after the Manchu Invasion(1636) of Korea, and it was the first case in which a foreign army was stationed in the capital of Joseon. In addition, from an another spectrum, the Imo Incident is also an important starting point for the internationalization of the Joseon issue.
      The army dispatched from Q’ing were stationed at strategic points in Seoul after quickly suppressing the rebellion. Since then, Kim Chang-hee, a receptionist of the Joseon government, had exchanges with the officers of Q’ing army(慶軍), Jiang jian(張謇) and Lee Yanhu(李延祜). Kim Chang-hee were able to receive suggestions(獻策) for reform of the Joseon government’s pending issue.
      However, Jiang jian and Lee Yan-hu’s suggestions appear to be ostensibly claiming similar content, but they actually represented the positions of their affiliated political groups. In addition, differences in the modernization(洋務) plans and initiatives for both affairs were also reflected.
      In this article, It would like to prove that the internal political conflict of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19th century was not a bilateral confrontation between the Qingliu groups(淸流派) and the Yangwu groups(洋務派), but a multi-competition structure between various political groups. In addition, the interests of each political group were reflected not only in the internal policies of the Office but also in foreign policies including Joseon.
      Political conflicts within the Q’ing were reflected in the suggestions of Jiang jian and Lee Yan-hu, and their political struggles were taking place not in the Qing mainland, but in Joseon. In addition, the death of Wu Jiang-qing(吳長慶) and the conversion of Yuan Shi-kai(袁世凱) around 1884 not only revealed the conflict between internal political groups, but also served as the starting point for the change in the Q’ing Dynasty’s Joseon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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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봉준, "해방론의 맥락에서 본 청의 속국 정책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대(對)조선 정책의 변화" 2022

      2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 근대편" 동북아역사재단 2018

      3 최우길, "임오군란 직후 淸종군인사들의 조선 내정 개혁안 - 새 자료 『三籌合存』 독해를 중심으로" 열상고전연구회 (39) : 62-97, 2014

      4 侯宜杰, "원세개 : 中國의 마지막 皇帝" 지호 2003

      5 이정희 ; 이혜경, "오무장공사 소장 유물과 화교사회 -근대 시기 유물을 중심으로-" 중앙사학연구소 (57) : 219-263, 2022

      6 박영준, "동아시아 패권전쟁으로서의 청일전쟁 재조명: 조선 정치세력의 대응정책 대립과 그 귀결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44 (44): 47-82, 2023

      7 김규선, "김창희의 『석릉수간』과 임오군란 직후 한중 교류의 한 국면" 열상고전연구회 (39) : 36-61, 2014

      8 최우길, "개항기 한중 지식인의 조선개혁론과 삼주합존" 보고사 2016

      9 이양자,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한울 2020

      10 "高宗實錄"

      1 김봉준, "해방론의 맥락에서 본 청의 속국 정책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대(對)조선 정책의 변화" 2022

      2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 근대편" 동북아역사재단 2018

      3 최우길, "임오군란 직후 淸종군인사들의 조선 내정 개혁안 - 새 자료 『三籌合存』 독해를 중심으로" 열상고전연구회 (39) : 62-97, 2014

      4 侯宜杰, "원세개 : 中國의 마지막 皇帝" 지호 2003

      5 이정희 ; 이혜경, "오무장공사 소장 유물과 화교사회 -근대 시기 유물을 중심으로-" 중앙사학연구소 (57) : 219-263, 2022

      6 박영준, "동아시아 패권전쟁으로서의 청일전쟁 재조명: 조선 정치세력의 대응정책 대립과 그 귀결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44 (44): 47-82, 2023

      7 김규선, "김창희의 『석릉수간』과 임오군란 직후 한중 교류의 한 국면" 열상고전연구회 (39) : 36-6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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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周家祿, "近代中國史料叢刊 42" 文海出版社 1969

      12 金昌熙, "譚屑"

      13 郭明芳, "談"臺灣地圖總圖""及其副本" (36) : 2018

      14 林明德, "袁世凱與朝鮮"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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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하정원, "石菱 金昌熙의 古文作法과 散文批評에 대한 一考" 우리한문학회 25 : 383-4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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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劉增合, "1840~1884年晩淸外交觀念的演進" (1)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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