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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통일된 조국": 1989년 동독의 민주주의 혁명과 통일 문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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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89/90년 독일통일을 가능케 한 요인을 행위 주체를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급변이나 분단극복의 구조적 조건을 일단 제쳐놓고-살핀다면 다음 세 가지를 주요하게 초들 수 있다. 먼저, 동독 주민의 민주혁명과 통일열망이다. 1989년 10월 반체제 운동을 중심으로 동독 주민은 동독 공산주의 정권을 몰락시켜 체제전환의 물꼬를 텄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 시기에 독일통일 문제를 제기하고 선거를 통해 통일의 방식과 성격을 최종적으로 승인함으로써 통일과정의 일차적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로는 독일인의 자치권과 자기결정을 승인하고 존중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chail Gorbatschow)의 역할이다. 전후 소련에 대한 동독의 오랜 정치경제적 의존과 승전국으로서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에서 확보하고 있던 국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독일통일의 열쇠는 모스크바에 있다’라는 말은 허사가 아니었다. 1990년 1월 말 그동안 주저하던 태도("역사가 결정하리라")를 바꿔 고르바초프는 독일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했고 여러 전제조건과 경제 지원을 매개로 1990년 7월 최종적으로 통일독일이 스스로 안보동맹을 결정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군사 동맹 체제 문제에 대한 소련 정치 지도부의 이 양보로 통일독일의 외교적 안보적 성격은 나토의 일방적 확대로 귀착되었지만,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의 후원자로 기억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동독의 몰락과 민주적 체제전환이 평화적으로 통일로 귀결된 데에는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총리의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정치적 결정과 선택 또한 무시할 수 없다. 1989년 10월 말 콜 총리는 동독 체제 붕괴에 직면해 "경제 지원과 정치개혁"을 연계하여 동독 체제의 전환에 직접 개입했고 11월 28일 ‘독일통일 10개조’를 발표하며 독일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다시 1990년 1월 정세변화와 동독 주민의 통일열망에 조응해 콜은 급속한 통일로 방향을 전환했고 1990년 봄 내내 소련 정치도부와 끈질기게 협상하여 안보동맹의 자결권을 비롯한 통일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확보해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정작 1989년 가을 동독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던 동독 반체제운동의 주요 세력들은 통일과정에서 점점 더 주변으로 내몰렸다. 반체제 운동가 대다수는 1989/90년 시종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갱신을 통한 ‘이국가상태(Zweistaatlichkeit)’의 지속을 원했고 민족통일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동독이 ‘제3의 길’을 통해 그들 나름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독 체제로의 흡수로 귀결될 것이 뻔한 국민국가로의 민족 재결합을 오히려 막아야 했던 것이다.
      특히 1989년 11월 중순 민주혁명의 제 2국면에서 상당수 동독 주민들은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운동가 중심의 반체제운동 그룹들은 "제3의 길" 같은 동독의 독자적 발전 노선을 내세우며 서독과의 통일을 반대하고 견제했다. 국가적, 민족적 전망을 둘러싸고 점차 동독 내부의 균열과 불화가 드러나고 있었다. 통일이냐 현상유지냐의 문제에 더해 사회경제적 미래전망과 관련해 여러 대안적 길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동독 반체제운동의 정치 지향에서 국가연합이라는 이행기를 제쳐놓고 보면 이 시기 동독이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었던 궁극적인 도정은 6개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동독이 독립적인 국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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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90년 독일통일을 가능케 한 요인을 행위 주체를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급변이나 분단극복의 구조적 조건을 일단 제쳐놓고-살핀다면 다음 세 가지를 주요하게 초들 수 있다. 먼저, 동독 주...

      1989/90년 독일통일을 가능케 한 요인을 행위 주체를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급변이나 분단극복의 구조적 조건을 일단 제쳐놓고-살핀다면 다음 세 가지를 주요하게 초들 수 있다. 먼저, 동독 주민의 민주혁명과 통일열망이다. 1989년 10월 반체제 운동을 중심으로 동독 주민은 동독 공산주의 정권을 몰락시켜 체제전환의 물꼬를 텄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 시기에 독일통일 문제를 제기하고 선거를 통해 통일의 방식과 성격을 최종적으로 승인함으로써 통일과정의 일차적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로는 독일인의 자치권과 자기결정을 승인하고 존중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chail Gorbatschow)의 역할이다. 전후 소련에 대한 동독의 오랜 정치경제적 의존과 승전국으로서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에서 확보하고 있던 국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독일통일의 열쇠는 모스크바에 있다’라는 말은 허사가 아니었다. 1990년 1월 말 그동안 주저하던 태도("역사가 결정하리라")를 바꿔 고르바초프는 독일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했고 여러 전제조건과 경제 지원을 매개로 1990년 7월 최종적으로 통일독일이 스스로 안보동맹을 결정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군사 동맹 체제 문제에 대한 소련 정치 지도부의 이 양보로 통일독일의 외교적 안보적 성격은 나토의 일방적 확대로 귀착되었지만,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의 후원자로 기억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동독의 몰락과 민주적 체제전환이 평화적으로 통일로 귀결된 데에는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총리의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정치적 결정과 선택 또한 무시할 수 없다. 1989년 10월 말 콜 총리는 동독 체제 붕괴에 직면해 "경제 지원과 정치개혁"을 연계하여 동독 체제의 전환에 직접 개입했고 11월 28일 ‘독일통일 10개조’를 발표하며 독일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다시 1990년 1월 정세변화와 동독 주민의 통일열망에 조응해 콜은 급속한 통일로 방향을 전환했고 1990년 봄 내내 소련 정치도부와 끈질기게 협상하여 안보동맹의 자결권을 비롯한 통일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확보해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정작 1989년 가을 동독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던 동독 반체제운동의 주요 세력들은 통일과정에서 점점 더 주변으로 내몰렸다. 반체제 운동가 대다수는 1989/90년 시종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갱신을 통한 ‘이국가상태(Zweistaatlichkeit)’의 지속을 원했고 민족통일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동독이 ‘제3의 길’을 통해 그들 나름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독 체제로의 흡수로 귀결될 것이 뻔한 국민국가로의 민족 재결합을 오히려 막아야 했던 것이다.
      특히 1989년 11월 중순 민주혁명의 제 2국면에서 상당수 동독 주민들은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운동가 중심의 반체제운동 그룹들은 "제3의 길" 같은 동독의 독자적 발전 노선을 내세우며 서독과의 통일을 반대하고 견제했다. 국가적, 민족적 전망을 둘러싸고 점차 동독 내부의 균열과 불화가 드러나고 있었다. 통일이냐 현상유지냐의 문제에 더해 사회경제적 미래전망과 관련해 여러 대안적 길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동독 반체제운동의 정치 지향에서 국가연합이라는 이행기를 제쳐놓고 보면 이 시기 동독이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었던 궁극적인 도정은 6개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동독이 독립적인 국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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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When we look at Germany today, 20 years since its reunification and choose to focus on the problems of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it is important to recall the warning the West German leftists continuously have emphasized, which was that the "Goliath West Germany" should not lopsidedly ‘tutor’ "David East Germany". Even if the national division in Korea would be transformed into a situation of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the virtues and political principles of federalism, namely the respect of diversity and the coexistence of differences, must be upheld.
      There were six alternatives for the democratic movement organisation in the east Germany. The first was a renewed socialism in the east Germany, and the second was a capitalist GDR with the market economy and liberal-democratic political system, the third was a third way with a socialist economic system but the liberal democracy, the fourth was a way of the reunification but with a third way in the diplomacy, the fifth was a reunification fot the double western way, the sixth was a reunification for the double discontinuity of the wesern way. The real problem of the democratic movements in the east Germant was that they were not able to unite themselves in the issue on the renu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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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en we look at Germany today, 20 years since its reunification and choose to focus on the problems of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it is important to recall the warning the West German leftists continuously have emphasized, which was that the "Gol...

      When we look at Germany today, 20 years since its reunification and choose to focus on the problems of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it is important to recall the warning the West German leftists continuously have emphasized, which was that the "Goliath West Germany" should not lopsidedly ‘tutor’ "David East Germany". Even if the national division in Korea would be transformed into a situation of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the virtues and political principles of federalism, namely the respect of diversity and the coexistence of differences, must be upheld.
      There were six alternatives for the democratic movement organisation in the east Germany. The first was a renewed socialism in the east Germany, and the second was a capitalist GDR with the market economy and liberal-democratic political system, the third was a third way with a socialist economic system but the liberal democracy, the fourth was a way of the reunification but with a third way in the diplomacy, the fifth was a reunification fot the double western way, the sixth was a reunification for the double discontinuity of the wesern way. The real problem of the democratic movements in the east Germant was that they were not able to unite themselves in the issue on the renu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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