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40년대 일제의 강제 징용·징병에 맞서 집단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慶山 南山面 청년들의 의거를 다루었다. ‘大王山竹槍義擧(여기에서는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決心隊의 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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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Korean
결심대 ; 대왕산 ; 강제동원 ; 경산 ; 징병 ; 징용 ; 대왕산죽창의거 ; Gyeolsimdae ; Daewangsan ; compulsory-mobilization ; Gyungsan ; conscription ; Daewangsan Jukchang Uig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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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115-15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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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40년대 일제의 강제 징용·징병에 맞서 집단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慶山 南山面 청년들의 의거를 다루었다. ‘大王山竹槍義擧(여기에서는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決心隊의 大...
본 연구는 1940년대 일제의 강제 징용·징병에 맞서 집단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慶山 南山面 청년들의 의거를 다루었다. ‘大王山竹槍義擧(여기에서는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決心隊의 大王山義擧로 부른다.)’라고 알려져 있는 의거의 배경에는 농촌에 대한 극심한 경제침탈이 있었다. 여기에 강제인력동원이 더해지자, 일부 청년들이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남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金仁鳳과 朴在千, 그리고 朴在達이 주도하여 동지규합에 나섰고, 최종 29명이 모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탈출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 맞서 싸우기에 적합한 은거지로 ‘大王山’을 선택하였다. 처음에는 세부계획 없이 대왕산에 올랐으나 얼마 뒤 ‘決心隊’라는 조직을 꾸리고, 주재소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나갔다.
이러한 청년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일경이 검거하러 나섰고, 세 차례의 투석전이 벌어졌다. 결심대는 회유와 협박으로 접근하는 일경을 모두 물리쳤다. 하지만 식량이 다 떨어져 청년들은 결국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전원 체포되었다.
결심대는 일제와 맞서 15일 동안 항거하였는데, 이는 전시체제 아래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체포된 뒤 50일 동안 극심한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았고 열악한 환경의 감옥 생활이 이어졌다. 그 결과 2명의 대원이 형무소에서 목숨을 잃고, 6명이 크게 다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결국 광복이 되어서야 모든 대원이 풀려날 수 있었다.
대왕산 의거는 이듬해 일제가 帝國議會에 소개할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인력동원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치안 확보에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애써 축소하여 보고하려고 시도하였다.
대개 1940년대 징병·징용에 대한 집단적 거부 움직임은 이념으로 무장한 단체를 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거나, 주도층이 학생인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산 의거는 그 구성원은 대부분 농민으로, 특별한 이념적 특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해외독립운동세력과 연계되어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심대는 징용을 거부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전시수탈로 인한 농촌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이었다. 또 이 항쟁은 1940년대 다른 징용·징병거부 움직임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research focuses on armed struggle of youths of Gyungsan Namsanmyun, occurred in 1940, protesting the forced requisition and conscription by Japanese Imperialism. This movement is known as ‘Daewangsan Jukchang Uigeo’ (Hereinafter Daewangsan U...
This research focuses on armed struggle of youths of Gyungsan Namsanmyun, occurred in 1940, protesting the forced requisition and conscription by Japanese Imperialism. This movement is known as ‘Daewangsan Jukchang Uigeo’ (Hereinafter Daewangsan Uigeo by Gyeolsimdae). Fierce economical pillage motivated this struggle. When forced requisition and conscription was made addition to this, several youths have started to refuse.
Kim In Bong, Park Jae Cheon and Park Jae Dal, who worked for Namsanmyeon office led the forming of protesting group. 29 members in final has planned an escape in order to protest the mischief of Japanese. They chose Daewangsan as a place to fight against Japanese police in secret. At first, they reached the mountain without any detail plan. Soon after, however, they have named themselves as ‘Gyeolsimdae’, and planned the attack on supervising office.
Japanese police went into action in order to arrest this group. Therefore, three times of fight with stone has occurred. Gyeolsimdae has turned down every conciliations and threats by Japanese police. However, they ran out of provisions, which made them come down from the mountain. Every members were arrested.
Gyeolsimdae has carried on their protest for 15 days, which was unacceptable for Japanese Imperialism owing to their wartime state. Therefore, all the arrested members have gone through strict investigation with severe torture, poor circumstances of jail in addition. Two of them died in imprisonment, and six of them were out on bail due to their diseases. Rest of the members could be released after the liberation.
Daewangsan Uigeo was regarded as very crucial movement, which made Japanese to report even to their congress. They thought this movement could be a hazard to their requisition and conscription on Josun. Moreover, the movement has revealed the blind point of their public security, which made Japanese police to conceal the movement.
Most protestant movements against Japanese conscription in 1940s were led by ideologies. And many of them were also related with liberators abroad, or led by students. However, Daewangsan Uigeo was led mostly by farmers, without any specific ideology or relation with liberators abroad. While their procedure through protest to conscription and escape, their movement has shifted to independence movement, which originated from suffering caused by wartime exploitation. This movement is taken as valuable example for protesting movement against requisition and conscription in 1940s.
목차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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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関東)대지진과 지바(千葉)에서의 조선인 학살의 추이
일제 말기 필리핀ㆍ버마지역 한인 병사의 강제동원과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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