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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왕실의 시조와 조경묘(肇慶廟)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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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은 조경묘 건립 과정을 다음 세 가지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1) 시조묘 건립의 배경을 찾는 것으로 당시 건립 주창자와 영조의 주장을 검토하였다. 시조묘 건립은 1765년(영조 41)년에 이육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육은 전주 건지산의 시조 묘역과 연계하여 사당의 건립을 주장하였지만 불확실한 증거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논의는 점차 제후의 시조 제사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발전하였는데 건립 주창자들은 송대 예학자에 의존하여 시조제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제후의 시조 제사를 정당화하였다. 영조는 당시 사대부가의 시조 공경과 역대시조묘, 백두산 치제 등의 예를 통해서 그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고려시대 인물인 윤관의 묘역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파평윤씨가와 청풍심씨가의 분쟁을 예로 들면서 영조는 사대부가의 시조 공경과 왕실의 시조 공경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조선후기 사전(祀典)에 속한 역대 시조묘의 제향과 이에 대한 사대부가의 관심을 통해서 왕실 시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의의 분석을 통해 본고는 조선후기 사회에 확산된 문중 조직 및 가계의식에 대한 반응이 조경묘 건립에 크게 작용하였음을 밝혔다.
      2) 시조 이한의 제향을 통해서 구체화된 왕실 역사의 의미화에 주목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백두산의 치제에서 왕실의 발상지로 북방지역을 강조하였던 영조는 전주의 시조묘 건립을 통해서 왕실 역사를 신라시대 이한으로까지 소급하여 올리고 이를 ‘수덕(樹德)’의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왕실과 사대부가의 관계를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재정립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동시에 고찰하였다.
      3) 조경묘 건립의 구체적인 과정과 그에 따른 법식의 제정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영조는 조경묘의 제향이 속례(俗禮)에 속하는 것임에도 중사(中祀)인 역대시조묘와 격을 맞추고 세록지가의 후손을 묘관(廟官)으로 임명하였던 영조의 의도를 밝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본고는 영조의 왕실 존숭 사업이 조선후기 문중 조직과 가계의식의 강화에 대한 반응과 대응이란 점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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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조경묘 건립 과정을 다음 세 가지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1) 시조묘 건립의 배경을 찾는 것으로 당시 건립 주창자와 영조의 주장을 검토하였다. 시조묘 건립은 1765년(영조 41)년...

      본 논문은 조경묘 건립 과정을 다음 세 가지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1) 시조묘 건립의 배경을 찾는 것으로 당시 건립 주창자와 영조의 주장을 검토하였다. 시조묘 건립은 1765년(영조 41)년에 이육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육은 전주 건지산의 시조 묘역과 연계하여 사당의 건립을 주장하였지만 불확실한 증거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논의는 점차 제후의 시조 제사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발전하였는데 건립 주창자들은 송대 예학자에 의존하여 시조제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제후의 시조 제사를 정당화하였다. 영조는 당시 사대부가의 시조 공경과 역대시조묘, 백두산 치제 등의 예를 통해서 그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고려시대 인물인 윤관의 묘역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파평윤씨가와 청풍심씨가의 분쟁을 예로 들면서 영조는 사대부가의 시조 공경과 왕실의 시조 공경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조선후기 사전(祀典)에 속한 역대 시조묘의 제향과 이에 대한 사대부가의 관심을 통해서 왕실 시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의의 분석을 통해 본고는 조선후기 사회에 확산된 문중 조직 및 가계의식에 대한 반응이 조경묘 건립에 크게 작용하였음을 밝혔다.
      2) 시조 이한의 제향을 통해서 구체화된 왕실 역사의 의미화에 주목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백두산의 치제에서 왕실의 발상지로 북방지역을 강조하였던 영조는 전주의 시조묘 건립을 통해서 왕실 역사를 신라시대 이한으로까지 소급하여 올리고 이를 ‘수덕(樹德)’의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왕실과 사대부가의 관계를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재정립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동시에 고찰하였다.
      3) 조경묘 건립의 구체적인 과정과 그에 따른 법식의 제정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영조는 조경묘의 제향이 속례(俗禮)에 속하는 것임에도 중사(中祀)인 역대시조묘와 격을 맞추고 세록지가의 후손을 묘관(廟官)으로 임명하였던 영조의 의도를 밝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본고는 영조의 왕실 존숭 사업이 조선후기 문중 조직과 가계의식의 강화에 대한 반응과 대응이란 점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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