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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시대 백제의 도교 = Taoism of Baekje in Sabi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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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333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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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fter moving the capital to Sabi, Baekje’s Taoism influenced the king’s world view about the afterlife. The living descendants sincerely hoped that the dead king would become a Sin-sun, a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s. However, the king changed his direction to pursue the eternal youth and immortality during his lifetime, not in the afterlife. The king desired to obtain the eternal life by becoming Sin-sun while still living. It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the king Mu, who built a pond on the south side of the royal palace and built a pavilion facing the sea, sought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through Taoism and hoped to have the eternal youth and immortality at the same time.
      It is difficult to grasp the interrelation between Baekje’s Taoism and its aristocracy. The aristocrats of the Jwapyeong class seem to have pursued the eternal youth and immortality as well as the king. However, it is thought that they would have been more interested in withdrawing from the reality and achieving the inner peace as in the case of Silla. This is shown from the fact that the nobles who lived in the capital city of Buyeo made a garden with a pond, and the case of Sataek-Jijeok, who was politically ruined, removing himself from Buyeo and retreating elsewhere. This trend would have been escalated as the Thoughts of the Lotus Sutra of Buddhism gained its fame in the Baekje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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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ter moving the capital to Sabi, Baekje’s Taoism influenced the king’s world view about the afterlife. The living descendants sincerely hoped that the dead king would become a Sin-sun, a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s. However, the king cha...

      After moving the capital to Sabi, Baekje’s Taoism influenced the king’s world view about the afterlife. The living descendants sincerely hoped that the dead king would become a Sin-sun, a Taoist hermit with miraculous powers. However, the king changed his direction to pursue the eternal youth and immortality during his lifetime, not in the afterlife. The king desired to obtain the eternal life by becoming Sin-sun while still living. It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the king Mu, who built a pond on the south side of the royal palace and built a pavilion facing the sea, sought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through Taoism and hoped to have the eternal youth and immortality at the same time.
      It is difficult to grasp the interrelation between Baekje’s Taoism and its aristocracy. The aristocrats of the Jwapyeong class seem to have pursued the eternal youth and immortality as well as the king. However, it is thought that they would have been more interested in withdrawing from the reality and achieving the inner peace as in the case of Silla. This is shown from the fact that the nobles who lived in the capital city of Buyeo made a garden with a pond, and the case of Sataek-Jijeok, who was politically ruined, removing himself from Buyeo and retreating elsewhere. This trend would have been escalated as the Thoughts of the Lotus Sutra of Buddhism gained its fame in the Baekje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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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사비로 천도한 직후 백제의 도교는 국왕에게 사후세계관으로 반영되었다. 국왕의 무덤들에서 도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후손들은 국왕이 죽어서 신선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후세계관으로 중요한 비중을 가진 도교는 백제의 현실 정치나 사회에서 상당한 의미를 나타내었다. 국왕이 사후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국왕은 살아서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왕대에 들어와서 국왕이 도교를 바탕으로 궁남지와 망해루를 만들면서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기를 바랐던 사실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귀족과 도교의 상호관계는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이 경우 좌평신분의 귀족들에게는 국왕과 마찬가지로 현실세계에서 불로장생을 추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들 역시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교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은거하여 편안함을 얻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왕도인 부여에 살고 있던 귀족들이 원림을 만들거나, 아니면 좌평출신의 사택지적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부여를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은거해가는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백제사회에 불교의 법화사상이 유행하면서 귀족들에게 더욱 확대되어 가는 추세를 보여주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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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로 천도한 직후 백제의 도교는 국왕에게 사후세계관으로 반영되었다. 국왕의 무덤들에서 도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후손들은 국왕이 죽어서 신선이...

      사비로 천도한 직후 백제의 도교는 국왕에게 사후세계관으로 반영되었다. 국왕의 무덤들에서 도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후손들은 국왕이 죽어서 신선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후세계관으로 중요한 비중을 가진 도교는 백제의 현실 정치나 사회에서 상당한 의미를 나타내었다. 국왕이 사후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국왕은 살아서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왕대에 들어와서 국왕이 도교를 바탕으로 궁남지와 망해루를 만들면서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기를 바랐던 사실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귀족과 도교의 상호관계는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이 경우 좌평신분의 귀족들에게는 국왕과 마찬가지로 현실세계에서 불로장생을 추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들 역시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교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은거하여 편안함을 얻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왕도인 부여에 살고 있던 귀족들이 원림을 만들거나, 아니면 좌평출신의 사택지적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부여를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은거해가는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백제사회에 불교의 법화사상이 유행하면서 귀족들에게 더욱 확대되어 가는 추세를 보여주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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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수태, "한국고대사연구의 시각과 방법" 사계절 2014

      2 이기백, "한국고대사론" 일조각 1995

      3 장인성, "한국 고대 도교의 특징" 백제문화연구소 1 (1): 71-90, 2015

      4 "일본서기"

      5 김영심, "웅진․사비시기 백제 지배층의 사상적 지향 - 六朝 士大夫와의 비교를 통하여 -" 백제문화연구소 1 (1): 205-239, 2012

      6 주보돈, "신라의 한문자 정착과정과 불교수용" 1 : 2001

      7 장인성,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7

      8 이기백,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9 박광연, "신라법화사상사연구" 한국연구원 2013

      10 노중국, "신라 中古期 儒學 사상의 수용과 확산" 대구사학회 93 : 1-28, 2008

      1 김수태, "한국고대사연구의 시각과 방법" 사계절 2014

      2 이기백, "한국고대사론" 일조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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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일본서기"

      5 김영심, "웅진․사비시기 백제 지배층의 사상적 지향 - 六朝 士大夫와의 비교를 통하여 -" 백제문화연구소 1 (1): 205-239, 2012

      6 주보돈, "신라의 한문자 정착과정과 불교수용" 1 : 2001

      7 장인성,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7

      8 이기백,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9 박광연, "신라법화사상사연구" 한국연구원 2013

      10 노중국, "신라 中古期 儒學 사상의 수용과 확산" 대구사학회 93 : 1-28, 2008

      11 김수태, "성주탁교수 추모사학논총" 진인진 2012

      12 "삼국유사"

      13 "삼국사기"

      14 박중환,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에 반영된 소승불교적(小乘佛敎的) 성격에 대하여" 백제문화연구소 (39) : 125-141, 2008

      15 조경철, "사비도읍기의 백제" 2007

      16 심상육, "부여 구아리 319 유적 출토 편지목간의 이해" 한국목간학회 (15) : 45-63, 2015

      17 심상육, "부여 ‘중앙성결교회유적’ 및 ‘뒷개 유적’ 출토 목간보고" 7 : 2011

      18 장인성, "백제의 제의와 종교" 2007

      19 김두진, "백제의 정신세계" 주류성 2006

      20 채미하, "백제의 산천제사와 그 整備" 동국역사문화연구소 (48) : 31-62, 2010

      21 김수태, "백제의 사비천도와 불교" 대구사학회 95 : 73-101, 2009

      22 길기태, "백제의 법화사상과 ‘혜현구정’" 31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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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김영심, "무령왕릉에 구현된 도교적 세계관" 한국사상사학회 (40) : 211-25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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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무령왕릉 출토 方格規矩神獸文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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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최수빈, "도교에서 바라보는 저세상 : 신선(神仙)과 사자(死者)들의 세계에 반영된 도교적 세계관과 구원" 한국도교문화학회 (41) : 303-350, 2014

      36 박중환, "金石文을 통해서 본 백제인의 來世觀" 호남사학회 (29) : 27-56, 2007

      37 김영심, "百濟의 道敎 成立 問題에 대한 一考察" 백제연구소 (53) : 159-190, 2011

      38 조성우,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과 道敎 ― 五石을 중심으로 ―" 동양사학회 (117) : 51-87, 2011

      39 조성우, "中世 中國 生死觀의 一面과 道敎 ― 殃禍의 觀念을 중심으로 ―" 중국고중세사학회 (25) : 185-2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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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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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18 1.1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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