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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중반 韓中 關係의 이해: 韓國獨立에 관한 中華意識의 二重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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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연구방법은 실재성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 현안을 중심으로 전개할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대한인식에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와 국민정부의 관계, 카이로회담 전후 중국의 구상...

      연구방법은 실재성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 현안을 중심으로 전개할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대한인식에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와 국민정부의 관계, 카이로회담 전후 중국의 구상과 대응 등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또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아직 공개되지 않았거나 활용되지 못한 檔案 및 개인자료를 적극 조사, 활용함으로써 이 시기 본격적인 연구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ꡔ大公報ꡕ, ꡔ申報ꡕ, ꡔ益世報ꡕ, ꡔ中央日報ꡕ 등은 물론 ꡔ新民日報ꡕ, ꡔ新聞報ꡕ, ꡔ中華時報ꡕ, ꡔ東南日報ꡕ, ꡔ和平日報ꡕ, ꡔ大剛報ꡕ, ꡔ新民報ꡕ, The China Press, The Shanghai Evening Post 등의 다양한 신문․잡지들을 활용하여 연구내용의 객관성을 제고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해방이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관한 중국의 평가 및 한국 임시정부와 국민정부의 관계를 규명할 것이다. 종전 이전의 한중 관계는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맞아 한국과 중국이 함께 싸우는 連帶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과 만주는 역사․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력․재정 면에서 독립운동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한국의 가장 크고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정세변화에 따라 한국독립운동을 둘러싼 중국정부의 이해와 협력, 갈등과 대립은 시기마다 차이를 보였다. 이에 관한 분석은 전환기 한중 관계를 이해하는데 기본요소로서 반드시 파악되어야 할 문제이다. 임시정부와 국민정부의 관계는 1937년 7․7사변이후 抗日戰爭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합작으로 전환하였다. 국민정부가 임시정부를 경제적 혹은 군사적으로 지원한 것은 임정으로 하여금 미래의 독립된 한국을 통치할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향후 中華民國의 국익에 부합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한중 관계는 임시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의 교류가 사실상 유일한 공식관계로, 이에 관한 검토는 해방이후 국가간 정상교류의 시금석으로서 중화의식의 변용이란 관점에서 규명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전후 한국문제에 관한 중국의 구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카이로회담 전후 중국의 태도와 역할을 통해 대한정책의 기본 틀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중협력의 체계화가 필요해짐에 따라 국민정부는 한국독립문제에 대하여 조직적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전후의 한국독립문제와 임시정부 승인문제가 한중 양국간의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하였고, 그 방법과 절차를 둘러싼 논란이 분분하여 다양한 견해가 나타났다. 종전 후 한국독립지위의 획득과 관련하여 중국이 취하였던 태도와 역할은 카이로회담을 중심으로 두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회의의 전 단계에서는 중국 측이 전후 한국의 독립지위를 보증하는 문제에 중점을 두었고,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한국의 독립시기와 임시정부의 지위를 쟁취하고 승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중국은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태도를 가지고 다양한 접촉을 통해 미국과 소련 측의 주위를 환기시켜 대변자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이렇듯 전후 한국문제처리에서 보여준 중국의 우호적 태도와 적극적인 역할은 역사적으로 변용된 중화의식의 지속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의 나약한 외교․군사 역량은 중화의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이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끝으로 미․소 군정시기 중국의 인식과 대응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해방정국은 중국에서 활동해 온 金九 및 임시정부, 미국에서 외교활동에 주력한 李承晩과 그 동료들이 대표적 세력으로,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의 적극적인 신뢰와 지원을 받았고, 김구는 중화민국의 기대와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김구와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한국에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중화민국이 한국에 대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기대와 지원을 받은 김구는 새로운 국가를 창출할 힘을 갖지 못하였고, 그가 지도하던 임시정부는 무기력하게 해산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 미․소 군정을 거치는 동안 脣亡齒寒의 관계로 여겨진 중국의 역할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던 主動的인 지위에서 傍觀者的인 助演者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국 정부와 언론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결코 한국문제를 방기하지 않았으며, 이에 관한 총체적 인식은 오늘날 한중 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수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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