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혁명가 이필제의 생애와 영해 = On the Revolutionist Lee Phil-Je' life and Yeonghae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4528573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Lee Phil-Je was taking the o'clock high anti-corrosion different from the previous leader. He analyze the society contradiction correctly and presented the relief measure in this top of the foundation. The progressive person giving an awakening to the ruler class which rather he was wet in the peony ideology, indulges in illegality and corruption for the advancement in life of oneself.
      Lee Phil-Je was the owner of the remarkable leadership. He was found the man to do the self and meaning together always. He was founded and venerable made its own colleague. He was persuaded the mate based on the high scholarship and full of righteous indignation sometimes and shed the tear and shared the pain of the people. He was stood always in a forefront and made a name stand and an interest wrote.
      Lee Pill-je was the mastermind and commander of a series of insurrections sparked across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including the Jincheon Uprising of 1869, the Jinju Uprisings of 1870 and the Yeonghae and Joryeong Uprisings of 1871. He nurtured expansionist ideas from his formative years on. His ambition to conquer the north, more specifically Qing Dynasty China, found fodder during his later years in Jeongamnok, an apocryphal book of prophecy, and became thereafter vested with a devotional intensity.
      However, unlike many others who responded to prophesies in Jeonggamnok by fleeing to the mountains, Lee Pil-je derived from it a sense of messianic mission which enabled him to put his expansionist ideas into action. By integrating the moral tenet of Jeongamnok with this expansionism, he managed to create a coalition force uniting Jeongamnok influenced local factions across the regions of Joseon, conspiring to disrupt the order of the regime, to serve his enterprise. The bargain was simply that, once the northern conquest was successfully brought to shore and China, handed to Lee Pill-je, Korea would be left under the control of these rebels.
      In the result reson why the launch an undertaking succeeds in the Yeonghae is due to participation of the DongHak followers. This feature first, a revolt was the wide orchid participating from 16 communities. second, Uprising was accomplish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which was well salty with the elaborate preparation. With the third, revealed the purpose of the Uprising in the clear slogan. their spirit of resistances was succeeded with the DongHak farmer revolution finally.
      번역하기

      Lee Phil-Je was taking the o'clock high anti-corrosion different from the previous leader. He analyze the society contradiction correctly and presented the relief measure in this top of the foundation. The progressive person giving an awakening to the...

      Lee Phil-Je was taking the o'clock high anti-corrosion different from the previous leader. He analyze the society contradiction correctly and presented the relief measure in this top of the foundation. The progressive person giving an awakening to the ruler class which rather he was wet in the peony ideology, indulges in illegality and corruption for the advancement in life of oneself.
      Lee Phil-Je was the owner of the remarkable leadership. He was found the man to do the self and meaning together always. He was founded and venerable made its own colleague. He was persuaded the mate based on the high scholarship and full of righteous indignation sometimes and shed the tear and shared the pain of the people. He was stood always in a forefront and made a name stand and an interest wrote.
      Lee Pill-je was the mastermind and commander of a series of insurrections sparked across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including the Jincheon Uprising of 1869, the Jinju Uprisings of 1870 and the Yeonghae and Joryeong Uprisings of 1871. He nurtured expansionist ideas from his formative years on. His ambition to conquer the north, more specifically Qing Dynasty China, found fodder during his later years in Jeongamnok, an apocryphal book of prophecy, and became thereafter vested with a devotional intensity.
      However, unlike many others who responded to prophesies in Jeonggamnok by fleeing to the mountains, Lee Pil-je derived from it a sense of messianic mission which enabled him to put his expansionist ideas into action. By integrating the moral tenet of Jeongamnok with this expansionism, he managed to create a coalition force uniting Jeongamnok influenced local factions across the regions of Joseon, conspiring to disrupt the order of the regime, to serve his enterprise. The bargain was simply that, once the northern conquest was successfully brought to shore and China, handed to Lee Pill-je, Korea would be left under the control of these rebels.
      In the result reson why the launch an undertaking succeeds in the Yeonghae is due to participation of the DongHak followers. This feature first, a revolt was the wide orchid participating from 16 communities. second, Uprising was accomplish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which was well salty with the elaborate preparation. With the third, revealed the purpose of the Uprising in the clear slogan. their spirit of resistances was succeeded with the DongHak farmer revolution finally.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시대의 풍운아였던 이필제는 민란을 주도했던 이전의 지도자와는 완전 다른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구제책을 제시했다. 더욱이 그는 당시까지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중국정벌이라는 거대한 구상을 하고 자신은 단군의 후손으로 천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이전 시대의 일부 지배층에게 이러한 북벌의 의지가 보이기는 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오히려 모화사상에 젖어 소중화를 외치고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던 지배층에 대한 각성을 주는 진취적 기상의 인물이었다.
      이필제는 1869년 진천작변 1870년 진주작변 1871년 영해란 조령의 난 등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젊어서부터 북벌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이필제는 그후 정감록적 사유의 영향으로 북벌에 대한 종교적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이필제는 북벌론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피난이나 은둔으로 머물 수도 있던 정감록적 소극성을 극복할 수 있었고 정감록을 통한 메시아적 사명감을 갖게 됨으로써 북벌에 대한 의지를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필제는 정감록적 사유방식과 북벌론을 결합함으로써 각 지역에서 정감록에 기반하여 변란을 도모하던 세력과 연합하여 거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즉 거사가 성공하면 이필제는 중원을 차지하고 조선에 대한 통치는 현지세력의 차지가 되게 하자는 역할분담이 있었다.
      한편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보였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우선 한 지방에 잠입을 하면 언제나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인물을 찾았고 그 지방에서 가장 덕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알아내어 기어코 그를 자신의 동조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상대를 설득할 때면 자신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나라의 현실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상대방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비분강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민중의 아픔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일의 선두에 서있었고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이름을 내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의 거사가 영해지방에서만 성공한 이유는 동학도들의 대규모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특징은 첫째, 영해의 난은 무려 16개 지역의 민중들이 참여한 지역을 넘어선 난이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이전의 민란들이 산발적이고 즉흥적이었던데 비하여 영해의 봉기는 매우 치밀한 준비와 잘 짜여진 조직체계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영해의 거사에서 쓰인 구호가 명확했다는 점이다. 즉, 이필제 스스로가 제세안민(濟世安民)이라고 할 정도로 명확한 구호로써 봉기의 뜻이 사회 불만세력의 일시적인 폭행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영해지방은 비록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만은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은 23년 뒤의 동학농민혁명으로 계승되었다.
      번역하기

      시대의 풍운아였던 이필제는 민란을 주도했던 이전의 지도자와는 완전 다른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구제책을 제시...

      시대의 풍운아였던 이필제는 민란을 주도했던 이전의 지도자와는 완전 다른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구제책을 제시했다. 더욱이 그는 당시까지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중국정벌이라는 거대한 구상을 하고 자신은 단군의 후손으로 천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이전 시대의 일부 지배층에게 이러한 북벌의 의지가 보이기는 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오히려 모화사상에 젖어 소중화를 외치고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던 지배층에 대한 각성을 주는 진취적 기상의 인물이었다.
      이필제는 1869년 진천작변 1870년 진주작변 1871년 영해란 조령의 난 등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젊어서부터 북벌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이필제는 그후 정감록적 사유의 영향으로 북벌에 대한 종교적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이필제는 북벌론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피난이나 은둔으로 머물 수도 있던 정감록적 소극성을 극복할 수 있었고 정감록을 통한 메시아적 사명감을 갖게 됨으로써 북벌에 대한 의지를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필제는 정감록적 사유방식과 북벌론을 결합함으로써 각 지역에서 정감록에 기반하여 변란을 도모하던 세력과 연합하여 거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즉 거사가 성공하면 이필제는 중원을 차지하고 조선에 대한 통치는 현지세력의 차지가 되게 하자는 역할분담이 있었다.
      한편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보였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우선 한 지방에 잠입을 하면 언제나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인물을 찾았고 그 지방에서 가장 덕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알아내어 기어코 그를 자신의 동조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상대를 설득할 때면 자신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나라의 현실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상대방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비분강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민중의 아픔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일의 선두에 서있었고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이름을 내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의 거사가 영해지방에서만 성공한 이유는 동학도들의 대규모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특징은 첫째, 영해의 난은 무려 16개 지역의 민중들이 참여한 지역을 넘어선 난이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이전의 민란들이 산발적이고 즉흥적이었던데 비하여 영해의 봉기는 매우 치밀한 준비와 잘 짜여진 조직체계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영해의 거사에서 쓰인 구호가 명확했다는 점이다. 즉, 이필제 스스로가 제세안민(濟世安民)이라고 할 정도로 명확한 구호로써 봉기의 뜻이 사회 불만세력의 일시적인 폭행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영해지방은 비록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만은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은 23년 뒤의 동학농민혁명으로 계승되었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표영삼, "해월의 고난 역정 동학 2" 통나무 2005

      2 이이화, "한국근대인물의 해명" 학민사 1985

      3 연갑수, "이필제 연구" 6 : 2003

      4 이이, "이야기인물한국사 4" 한길사 1993

      5 "용담유사"

      6 표영삼, "동학의 신미 영해 교조신원운동에 관한 소고" 21 : 1989

      7 "高宗實錄"

      8 "道源記書"

      9 "辛未寧海府賊變文軸"

      10 "羅巖隨錄"

      1 표영삼, "해월의 고난 역정 동학 2" 통나무 2005

      2 이이화, "한국근대인물의 해명" 학민사 1985

      3 연갑수, "이필제 연구" 6 : 2003

      4 이이, "이야기인물한국사 4" 한길사 1993

      5 "용담유사"

      6 표영삼, "동학의 신미 영해 교조신원운동에 관한 소고" 21 : 1989

      7 "高宗實錄"

      8 "道源記書"

      9 "辛未寧海府賊變文軸"

      10 "羅巖隨錄"

      11 朴孟洙, "海月 崔時亨의 初期行跡과 思想"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 : 1986

      12 "東經大全"

      13 金庠基, "東學과 東學亂" 춘추문고 1975

      14 "東學史"

      15 韓㳓劤, "東學2亂 起因에관한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16 尹大遠, "李弼濟亂의 硏究" 서울대 國史學科 16 : 1987

      17 "日省錄"

      18 "推案及鞫案"

      19 "慶尙監營啓錄"

      20 "忠淸道監營狀啓謄錄"

      21 "左捕廳謄錄"

      22 "嶠南公蹟"

      23 朴孟洙, "崔時亨硏究 : 主要活動과 思想을 中心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24 "天道敎會史草稿"

      25 "天道敎創建史"

      26 "侍天敎歷史"

      27 張泳敏, "1871年 寧海 東學亂" 一志社 47 : 1987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12-23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 0.7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8 0.55 0.797 0.15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