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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초기 陵幸의 정치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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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종이 즉위한 19세기 중엽 조선에서는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을 행사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척신들의 세력이 국왕을 압도하는 실정에서 왕권을 뒷받침해 줄 정치세력도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기 고종이 직면한 우선적인 과제는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정 운영을 왕권 중심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비변사 혁파, 삼군부 복설 등 제도상의 개혁과 함께 고종의 私親에 대한 追崇 작업, 국왕의 嘉禮, 親耕의 재개 등 왕과 왕실 관련 의례가 동원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왕실 고유의 행사로서, 대규모의 인원과 장비를 동원하여 왕권의 위엄을 민인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는 陵幸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고종의 능행은 즉위 1년(1864)부터 시작되었는데, 수렴청정이 끝난 즉위 3년(1866)부터는 매년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시기 능행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과도 관련하여 국왕 친림하의 군사훈련이 병행되고 있었다. 또한 고종의 혈통상의 약점을 보완하고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고종의 왕통상 선고에 해당하는 익종의 수릉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행사를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것은 고종 자신이 아니라 종친부를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일원으로서 자연스럽게 왕릉 친제에 참여할 수 있었고, 자신이 스스로 아헌관을 자청하여 국왕의 능행을 주도하고 있었다.
      국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즉위 8년(1871) 무렵부터 고종은 친정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능행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으며, 특히 즉위 9년(1872) 개성 행차는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개성 행차에서 고종은 조선국왕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려 태조의 현릉에 친히 제사하고 고려 왕실의 후예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포섭하는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대원군이 간여할 수 없는 행사를 주도하여 통치권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고, 자신의 위치가 조선왕실의 구성원을 넘어 국가 통치의 주체임을 천명하는 행위였다고 생각된다.
      국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린 왕의 輔政을 이유로 국정 운영에 깊이 간여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올라온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은 적극적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한편, 이전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정책 변경을 지켜보기만 하던 대원군은, 진무영 혁파를 계기로 남연군 묘 참배를 거쳐 양주에 은거함으로써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고종은 개성 참배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능행을 재개하여 한 계절에 11기 참배라는 이례적인 대규모 행사로 대응하였다.
      결국 다음해 6월 대원군의 귀경으로 양 세력의 갈등은 해소되어 국왕 고종의 친정체제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8년간 외교 현안이 되어왔던 일본의 서계문제는 한때 평화적 해결 기미를 보였다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채 운양호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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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이 즉위한 19세기 중엽 조선에서는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을 행사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척신들의 세력이 국왕을 압도하는 실정...

      고종이 즉위한 19세기 중엽 조선에서는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을 행사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척신들의 세력이 국왕을 압도하는 실정에서 왕권을 뒷받침해 줄 정치세력도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기 고종이 직면한 우선적인 과제는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정 운영을 왕권 중심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비변사 혁파, 삼군부 복설 등 제도상의 개혁과 함께 고종의 私親에 대한 追崇 작업, 국왕의 嘉禮, 親耕의 재개 등 왕과 왕실 관련 의례가 동원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왕실 고유의 행사로서, 대규모의 인원과 장비를 동원하여 왕권의 위엄을 민인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는 陵幸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고종의 능행은 즉위 1년(1864)부터 시작되었는데, 수렴청정이 끝난 즉위 3년(1866)부터는 매년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시기 능행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과도 관련하여 국왕 친림하의 군사훈련이 병행되고 있었다. 또한 고종의 혈통상의 약점을 보완하고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고종의 왕통상 선고에 해당하는 익종의 수릉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행사를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것은 고종 자신이 아니라 종친부를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일원으로서 자연스럽게 왕릉 친제에 참여할 수 있었고, 자신이 스스로 아헌관을 자청하여 국왕의 능행을 주도하고 있었다.
      국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즉위 8년(1871) 무렵부터 고종은 친정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능행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으며, 특히 즉위 9년(1872) 개성 행차는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개성 행차에서 고종은 조선국왕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려 태조의 현릉에 친히 제사하고 고려 왕실의 후예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포섭하는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대원군이 간여할 수 없는 행사를 주도하여 통치권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고, 자신의 위치가 조선왕실의 구성원을 넘어 국가 통치의 주체임을 천명하는 행위였다고 생각된다.
      국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린 왕의 輔政을 이유로 국정 운영에 깊이 간여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올라온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은 적극적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한편, 이전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정책 변경을 지켜보기만 하던 대원군은, 진무영 혁파를 계기로 남연군 묘 참배를 거쳐 양주에 은거함으로써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고종은 개성 참배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능행을 재개하여 한 계절에 11기 참배라는 이례적인 대규모 행사로 대응하였다.
      결국 다음해 6월 대원군의 귀경으로 양 세력의 갈등은 해소되어 국왕 고종의 친정체제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8년간 외교 현안이 되어왔던 일본의 서계문제는 한때 평화적 해결 기미를 보였다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채 운양호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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