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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1860년대 對日貿易과 公木 · 公作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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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205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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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 정부는 공무역(公貿易)에서 일본이 가져온 물품에 대하여 15세기 초부터 면포 즉 공목(公木)으로 결제해 주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19세기 중엽에는 공목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지급했는데 그것을 공작미(公作米)라 불렀다. 왜관을 통해 대마도로 건너간 조선의 공목과 공작미는 일본 대마도 경제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글에서는 1860년대 공목과 공작미 문제를 분석하였다. 1862년에는 조선의 공무역 담당자가 실제로는 미지급된 공목과 공작미가 남아 있었는데도, 그들이 마치 왜관에 완납을 한 것으로 중앙정부에 보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상대편인 왜관의 일본 측 공무역 담당자들은 공목과 공작미를 완납 받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64년에는 왜관의 일본인들이 왜관으로 들어간 조선 역관을 왜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이 왜관 밖에 있던 조선 역관의 근무지인 임소(任所)까지 찾아와서 그곳에서 철야를 하다가 다시 왜관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공목과 공작미 지급이 근대 이전의 대일무역 뿐만 아니라 대일외교에서도 중요한 문제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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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정부는 공무역(公貿易)에서 일본이 가져온 물품에 대하여 15세기 초부터 면포 즉 공목(公木)으로 결제해 주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19세기 중엽에는 공목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지급했...

      조선 정부는 공무역(公貿易)에서 일본이 가져온 물품에 대하여 15세기 초부터 면포 즉 공목(公木)으로 결제해 주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19세기 중엽에는 공목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지급했는데 그것을 공작미(公作米)라 불렀다. 왜관을 통해 대마도로 건너간 조선의 공목과 공작미는 일본 대마도 경제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글에서는 1860년대 공목과 공작미 문제를 분석하였다. 1862년에는 조선의 공무역 담당자가 실제로는 미지급된 공목과 공작미가 남아 있었는데도, 그들이 마치 왜관에 완납을 한 것으로 중앙정부에 보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상대편인 왜관의 일본 측 공무역 담당자들은 공목과 공작미를 완납 받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64년에는 왜관의 일본인들이 왜관으로 들어간 조선 역관을 왜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이 왜관 밖에 있던 조선 역관의 근무지인 임소(任所)까지 찾아와서 그곳에서 철야를 하다가 다시 왜관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공목과 공작미 지급이 근대 이전의 대일무역 뿐만 아니라 대일외교에서도 중요한 문제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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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Joseon Korea government paid cotton cloth (gongmok) in the official trade with Japanese traders for their exports from Japan in the fifteenth century. Later, from the mid-seventeenth century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the Joseon government converted some of the cotton cloth into rice (gong jakmi). The cotton cloth and rice transported to Tsushima from Joseon became the foundation of Tsushima’s economy. The problems relating to cotton cloth and rice are analyzed in this paper. Korean trade officials reported untruthfully that they had paid in full to Japan, though, in fact, there was cotton cloth and rice that had not been paid to the Japan House (Waegwan) in 1862. However, Japanese trade officials (daikan) made greater efforts to receive the full payment of cotton cloth and rice from the Joseon government. For example, Japanese trade officials prevented Korean trade officials from leaving the Japan House in 1864. In addition, Japanese trade officials visited and stayed all night in the office (imso) of the Korean interpreters of Japanese language (hundo and byeolcha), and returned to the Japan House the next day. This is evidence that the payments of cotton cloth and rice could be an economic or a diplomatic problem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pre-moder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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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Joseon Korea government paid cotton cloth (gongmok) in the official trade with Japanese traders for their exports from Japan in the fifteenth century. Later, from the mid-seventeenth century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the Joseon government conv...

      The Joseon Korea government paid cotton cloth (gongmok) in the official trade with Japanese traders for their exports from Japan in the fifteenth century. Later, from the mid-seventeenth century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the Joseon government converted some of the cotton cloth into rice (gong jakmi). The cotton cloth and rice transported to Tsushima from Joseon became the foundation of Tsushima’s economy. The problems relating to cotton cloth and rice are analyzed in this paper. Korean trade officials reported untruthfully that they had paid in full to Japan, though, in fact, there was cotton cloth and rice that had not been paid to the Japan House (Waegwan) in 1862. However, Japanese trade officials (daikan) made greater efforts to receive the full payment of cotton cloth and rice from the Joseon government. For example, Japanese trade officials prevented Korean trade officials from leaving the Japan House in 1864. In addition, Japanese trade officials visited and stayed all night in the office (imso) of the Korean interpreters of Japanese language (hundo and byeolcha), and returned to the Japan House the next day. This is evidence that the payments of cotton cloth and rice could be an economic or a diplomatic problem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pre-moder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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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자료 소개
      • 3. 1862년 조·일 간 공목·공작미의 지급 실태
      • 4. 1864년 조·일 담당자의 왜관과 임소 출입 실태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자료 소개
      • 3. 1862년 조·일 간 공목·공작미의 지급 실태
      • 4. 1864년 조·일 담당자의 왜관과 임소 출입 실태
      • 5.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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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양흥숙, "조선후기 왜관 통제책과 동래 지역민의 대응" 효원사학회 37 : 105-148, 2010

      2 김경란, "조선후기 동래부의 공작미(公作米) 운영실태와 그 성격" 한국역사연구회 (72) : 103-129, 2009

      3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4 김영록, "조선후기 대일공무역과 公木" 한일관계사학회 (42) : 465-502, 2012

      5 다시로 가즈이, "왜관-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 2005

      6 "邊例集要 상" 국사편찬위원회 1971

      7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8 "東萊府啓錄 하"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9 "東萊府啓錄 상" 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64

      10 이성무, "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攬-雜科榜目의 電算化-"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 양흥숙, "조선후기 왜관 통제책과 동래 지역민의 대응" 효원사학회 37 : 105-148, 2010

      2 김경란, "조선후기 동래부의 공작미(公作米) 운영실태와 그 성격" 한국역사연구회 (72) : 103-129, 2009

      3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4 김영록, "조선후기 대일공무역과 公木" 한일관계사학회 (42) : 465-502, 2012

      5 다시로 가즈이, "왜관-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 2005

      6 "邊例集要 상" 국사편찬위원회 1971

      7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8 "東萊府啓錄 하"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9 "東萊府啓錄 상" 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64

      10 이성무, "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攬-雜科榜目의 電算化-"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1 "朝鮮御代官記錄, 寶永2년(1705) 8~12월(국사편찬위원회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No. 5110, MF 0832)"

      12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下" 吉川弘文館 1969

      13 長正統, "日鮮関係における記録の時代" 50 (50): 1968

      14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目錄集"

      15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目錄集"

      16 김건서, "增正交隣志" 민족문화추진회 1998

      17 田代和生, "國立國會圖書館所藏「宗家文書」の特色"

      18 田代和生, "參考書誌硏究第76號-國立國會圖書館所藏「宗家文書」目錄"

      19 田代和生, "マイクロフイルム版対馬宗家文書第Ⅲ期倭館館守日記・裁判記錄別冊上・中・下" ゆまに書房 2005

      20 "「朝鮮御代官記錄」, 寶永2년(1705) 1~7월(국사편찬위원회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No. 5109, MF 0832)"

      21 "「(館守) 每日記」 元治원년(1864) 9월(일본 國立國會圖書館463, WA 1-6-34)"

      22 "「(館守) 每日記」 元治원년(1864) 7~8월(일본 國立國會圖書館462, WA 1-6-34)"

      23 "「(館守) 每日記」 元治원년(1864) 4~6월(일본 國立國會圖書館366-2, WA 1-6-8)"

      24 "「(館守) 每日記」 元治원년(1864) 1~3월(일본 國立國會圖書館366-1, WA 1-6-8)"

      25 "「(館守) 每日記」 元治원년(1864) 11~12월(일본 國立國會圖書館465, WA 1-6-34)"

      26 "「(館守) 每日記」 元治원년(1864) 10월(일본 國立國會圖書館464, WA 1-6-34)"

      27 "「(一代官) 每日記」 文久4년(1864) 4~6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Dc 14)"

      28 "「(一代官) 每日記」 文久4년(1864) 1~3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Dc 13)"

      29 "「(一代官) 每日記」 文久3년(1863) 6~10월(국사편찬위원회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No.1445 MF 0271)"

      30 "「(一代官) 每日記」 文久3년(1863) 1~5월(국사편찬위원회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No.1441 MF 0270, 0271)"

      31 "「(一代官) 每日記」 文久3년(1863) 10~12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Dc 12)"

      32 "「(一代官) 每日記」 文久2년(1862) 윤8~12월(국사편찬위원회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No.1440 MF 0270)"

      33 "「(一代官) 每日記」 元治원년(1864) 7~9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Dc 15)"

      34 "「(一代官) 每日記」 元治원년(1864) 10~12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Dc 16)"

      35 "「(一代官) 每日記」 元治2년(1865) 6~7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일기류 Dc 19)"

      36 "「(一代官) 每日記」 元治2년(1865) 4~윤5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일기류 Dc 18)"

      37 "「(一代官) 每日記」 元治2년(1865) 1~3월(일본 對馬歷史民俗資料館宗家文庫日記類Dc 17)"

      38 정성일, "19세기 대일공무역 결제수단의 변경과 금납화 –1841년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45) : 249-287, 2013

      39 김동철, "17・18세기 대일 공무역에서의 공작미 문제"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0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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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일관계사학회 -> 한일관계사연구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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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17 1.09 1.872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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