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중국의 특정 장소에 투사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졌고, 이후 연행을 떠났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 공간을 전유했음을 살폈다. 연행 노정 가운데 瀋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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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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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중국의 특정 장소에 투사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졌고, 이후 연행을 떠났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 공간을 전유했음을 살폈다. 연행 노정 가운데 瀋陽과 ...
조선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중국의 특정 장소에 투사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졌고, 이후 연행을 떠났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 공간을 전유했음을 살폈다. 연행 노정 가운데 瀋陽과 山海關의 중간에 있던 寧遠(현재의 興城)과 이곳에 얽힌 <嘔血臺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였다.
1626년 寧遠城을 수비하던 袁崇煥이 後金의 포위 공격을 격퇴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었던 누르하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嘔血]는 이야기가 연행록에 많이 보인다. 이 일화는 明과 淸의 자료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조선의 연행록에서는 지속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소설에 핍진할 정도로 그 편폭을 확대시키고 있다. ‘嘔血臺 이야기’는 병자호란 당시 淸 太宗이 주도한 남한산성의 포위와 그 결과로 이어진 항복의 아픈 기억을 포위를 이겨내고 결국 오랑캐를 패퇴시킨 袁崇煥의 승전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연행에 나선 조선 지식인들은 廣寧부터 山海關에 긴 노정을 明淸교체기의 격전장으로 인식했다. 비극적인 회고조로 진행되던 연행 노정은 寧遠城과 그 맞은편 首山 위의 煙臺에 이르면 조선 지식인들의 회고 정서는 복합적이 된다. 승리의 예찬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가 중첩되어 있다. 이곳은 명나라가 청나라를 대상으로 한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승리를 이룬 袁崇煥이 誣告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南漢山城과 ‘漢峰’에서 겪은 치욕과 아픔을 袁崇煥의 승리로 치유하고, ‘五山立馬’의 고사를 이용하여 淸나라가 지속되지 않을 것을 희구하였다. 袁崇煥의 통쾌한 승리, 오랑캐의 궤멸적 패배와 자발적 복종은 三國志演義에 보이는 제갈량과 맹획의 반사곡 전투를 위시한 七縱七擒의 고사를 원용하였다. 정통을 회복해야 하는 蜀漢의 비극적 운명과 그런 역경을 타개하려는 諸葛亮의 필사적인 노력, 北伐의 지난함과 그 과정에서 보인 南蠻 평정 등의 구체적인 문면이 당대 조선과 明의 처지와 호응을 이루었다.
‘嘔血臺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전개와 소설의 서사적 전개가 겹쳐지는 장면에 ‘좌절’과 ‘극복 의지’를 더하여 한 편의 감동적인 전투 장면을 만들어 연행노정의 한 지점에 아로새긴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