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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초 고려의 국제 환경 변화와 생애 기록  :  고려 墓誌를 중심으로 = Private Memories on the Diplomatic Experiences : the Khitan Insurgents & the Brotherly Alliance with the Mongols Presented in the13th century Goryeo Epit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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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018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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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13세기 초에 고려의 변경을 넘어 온 거란 유종과 몽고, 두 집단과 고려간에 있었던 ‘거란 유종의 난’ 과 ‘형제 맹약’이 개인적 차원의 기록인 墓誌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두 사건 모두 고려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본고에서 검토한 총 49편의 묘지 중 거란 유종의 난을 언급한 묘지는 10편에 불과했고, 형제의 맹을 언급한 묘지는 3편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를 살면서 13세기 고려의 외교 관계를 바라보는 입장과 당시인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된다. 또한, 현전하는 자료의 수가 워낙 적어 섣불리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고려사절요』혹은 『고려사』김취려전 등에 의해 현재의 우리는 거란 유종의 난의 마무리 단계로써 형제의 맹을 이해하는데 비해, 두 사건을 모두 언급한 묘지는 3편뿐이라는 사실로 짐작건대 당시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두 사건을 연관 짓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두 사건을 직접・간접적으로 겪었던 인물들의 묘지 속에서 각각의 사건 및 두 외부집단은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어 기억되었다. 묘주를 위인화・영웅화하기 위해 같은 사건이라도 부분적 측면이 선택적으로 과장되기도 했고, 익히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다른 인물이 해당 사건의 공로자로 부각되거나(최충헌,한광연), 숨은 공로가 밝혀지기도 했다(조충,최이). 또한 고인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거란 유종이나 몽고와 같은 객체들이 폄하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반대로 거란 유종을 遼兵・遼師(한광연 묘지)혹은 金人(김중구 묘지)등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제의 맹에 참여한 몽고 장수는 묘주의 영웅성을 알아보는 식견 있는 상대로 기억되기도 했고(김취려 묘지)몽고국은 외교 상대국으로서 언급되기도 했다(조충 묘지).
      이처럼 기억의 편집 혹은 변용이 일어난 원인은 묘지 기록이 고인의 생애를 추모한다는 매우 강한 목적을 가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일 작자에 의해 작성된 백분화 묘지와 이적 묘지에 나타난 거란 유종에 대한 적대감의 차이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었다.
      아울러 왕조 차원에서는 중요한 외교 사건이라 하더라도 묘주 개인의 생애 속에서는 상대화되어 매우 소략하게 언급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조충과 김취려는 모두 거란 유종의 난을 진압하고 몽고와 형제의 맹을 맺는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거란 유종의 난 진압 직후 사망한 조충의 묘지에서는 이 사건이 고인의 최대 공로로써 대대적으로 다루어진 반면, 그보다 14년을 더 산 김취려의 삶을 조망하는 글 속에서는 거란 유종의 난이나 형제의 맹 모두 묘주의 많은 업적 중 하나로써 다루어졌다.
      묘지에 사용된 기년호를 통해 13세기 초 외교 환경의 변화가 고려인의 일상과 관련된 기년 방식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았다. 1213년 이후에는 연호 사용이 줄고 고려 왕력, 고갑자, 고인의 연령 등이 활용되었다. 금의 改元여부와 상관없이 금의 貞祐연호가 1227년까지 사용되었음을 보았는데, 이는 국제 정세변동기에 고려인들이 익숙했던 기존의 외교 질서에 따라 공식적으로 전달된 가장 최근의 연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라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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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13세기 초에 고려의 변경을 넘어 온 거란 유종과 몽고, 두 집단과 고려간에 있었던 ‘거란 유종의 난’ 과 ‘형제 맹약’이 개인적 차원의 기록인 墓誌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본고에서는 13세기 초에 고려의 변경을 넘어 온 거란 유종과 몽고, 두 집단과 고려간에 있었던 ‘거란 유종의 난’ 과 ‘형제 맹약’이 개인적 차원의 기록인 墓誌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두 사건 모두 고려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본고에서 검토한 총 49편의 묘지 중 거란 유종의 난을 언급한 묘지는 10편에 불과했고, 형제의 맹을 언급한 묘지는 3편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를 살면서 13세기 고려의 외교 관계를 바라보는 입장과 당시인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된다. 또한, 현전하는 자료의 수가 워낙 적어 섣불리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고려사절요』혹은 『고려사』김취려전 등에 의해 현재의 우리는 거란 유종의 난의 마무리 단계로써 형제의 맹을 이해하는데 비해, 두 사건을 모두 언급한 묘지는 3편뿐이라는 사실로 짐작건대 당시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두 사건을 연관 짓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두 사건을 직접・간접적으로 겪었던 인물들의 묘지 속에서 각각의 사건 및 두 외부집단은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어 기억되었다. 묘주를 위인화・영웅화하기 위해 같은 사건이라도 부분적 측면이 선택적으로 과장되기도 했고, 익히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다른 인물이 해당 사건의 공로자로 부각되거나(최충헌,한광연), 숨은 공로가 밝혀지기도 했다(조충,최이). 또한 고인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거란 유종이나 몽고와 같은 객체들이 폄하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반대로 거란 유종을 遼兵・遼師(한광연 묘지)혹은 金人(김중구 묘지)등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제의 맹에 참여한 몽고 장수는 묘주의 영웅성을 알아보는 식견 있는 상대로 기억되기도 했고(김취려 묘지)몽고국은 외교 상대국으로서 언급되기도 했다(조충 묘지).
      이처럼 기억의 편집 혹은 변용이 일어난 원인은 묘지 기록이 고인의 생애를 추모한다는 매우 강한 목적을 가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일 작자에 의해 작성된 백분화 묘지와 이적 묘지에 나타난 거란 유종에 대한 적대감의 차이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었다.
      아울러 왕조 차원에서는 중요한 외교 사건이라 하더라도 묘주 개인의 생애 속에서는 상대화되어 매우 소략하게 언급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조충과 김취려는 모두 거란 유종의 난을 진압하고 몽고와 형제의 맹을 맺는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거란 유종의 난 진압 직후 사망한 조충의 묘지에서는 이 사건이 고인의 최대 공로로써 대대적으로 다루어진 반면, 그보다 14년을 더 산 김취려의 삶을 조망하는 글 속에서는 거란 유종의 난이나 형제의 맹 모두 묘주의 많은 업적 중 하나로써 다루어졌다.
      묘지에 사용된 기년호를 통해 13세기 초 외교 환경의 변화가 고려인의 일상과 관련된 기년 방식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았다. 1213년 이후에는 연호 사용이 줄고 고려 왕력, 고갑자, 고인의 연령 등이 활용되었다. 금의 改元여부와 상관없이 금의 貞祐연호가 1227년까지 사용되었음을 보았는데, 이는 국제 정세변동기에 고려인들이 익숙했던 기존의 외교 질서에 따라 공식적으로 전달된 가장 최근의 연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라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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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the Goryeo people encountered two unfamiliar groups; one group was the Khitan rebels who rose in revolt against the dominant Jin dynasty and another was the new rising power, the Mongols. Since the remaining official history accounts of the period record that the Mongols came into the Goryeo territory during their military operations on the Khitan rebels who had rejected to surrender to the Mongols, the observers of the 21st century sees these incidents in sequence. However, did the contemporary Goryeo people understand as we do?
      This paper has been developed during the process to understand how the contemporary Goryeo people perceived the diplomatic events that are assigned as so by the modern his torians. The Goryeo people composed a sort of biography when their loved one dies to remember and commemorate their lives. The biography was inscribed on a stone and they buried it. As the Goryeo epitaphs were enclosed inside the tomb it carries highly assessed contemporary information on the exact time at which the epitaphs were buried. Also the epitaphs were written within the ‘private" context rather than the dynastic or national level. Thus, I believe the Goryeo epitaphs of the 13th century would be the most proper primary sources to peruse the contemporary individuals" viewpoints on the world they belonged to.
      According to the epitaphs of this period it seems that the two incidents were seen as two independent events, which coincidently happened almost at the same time. We who live in the 21st century call the Khitans as ‘Khitan Rebels"(契丹遺種) as it is written in the Official History of Goryeo (『고려사』). But the contemporary Goryeo documented them, in the epitaphs, also as ‘the Liao soldiers"(遼兵・ 遼師) and even ‘the Jin citizens"(金人). The Mongols were usually described as ‘beasts"(禽獸) but also appeared as heroic figures. And the instances of year naming were only partly coherent to the ‘official" way of the dynasty. This paper construes that this discordance are the evidence of the diverse individual perceptions of the 13th century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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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the Goryeo people encountered two unfamiliar groups; one group was the Khitan rebels who rose in revolt against the dominant Jin dynasty and another was the new rising power, the Mongols. Since the remaining offici...

      In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the Goryeo people encountered two unfamiliar groups; one group was the Khitan rebels who rose in revolt against the dominant Jin dynasty and another was the new rising power, the Mongols. Since the remaining official history accounts of the period record that the Mongols came into the Goryeo territory during their military operations on the Khitan rebels who had rejected to surrender to the Mongols, the observers of the 21st century sees these incidents in sequence. However, did the contemporary Goryeo people understand as we do?
      This paper has been developed during the process to understand how the contemporary Goryeo people perceived the diplomatic events that are assigned as so by the modern his torians. The Goryeo people composed a sort of biography when their loved one dies to remember and commemorate their lives. The biography was inscribed on a stone and they buried it. As the Goryeo epitaphs were enclosed inside the tomb it carries highly assessed contemporary information on the exact time at which the epitaphs were buried. Also the epitaphs were written within the ‘private" context rather than the dynastic or national level. Thus, I believe the Goryeo epitaphs of the 13th century would be the most proper primary sources to peruse the contemporary individuals" viewpoints on the world they belonged to.
      According to the epitaphs of this period it seems that the two incidents were seen as two independent events, which coincidently happened almost at the same time. We who live in the 21st century call the Khitans as ‘Khitan Rebels"(契丹遺種) as it is written in the Official History of Goryeo (『고려사』). But the contemporary Goryeo documented them, in the epitaphs, also as ‘the Liao soldiers"(遼兵・ 遼師) and even ‘the Jin citizens"(金人). The Mongols were usually described as ‘beasts"(禽獸) but also appeared as heroic figures. And the instances of year naming were only partly coherent to the ‘official" way of the dynasty. This paper construes that this discordance are the evidence of the diverse individual perceptions of the 13th century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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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서론
      • 2. 거란 유종에 대한 여러 기억
      • 3. 몽고와의 형제의 맹과 이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
      • 4. 13세기 초 국제 정세 변화와 기년 방식의 다양화
      • 국문초록
      • 1. 서론
      • 2. 거란 유종에 대한 여러 기억
      • 3. 몽고와의 형제의 맹과 이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
      • 4. 13세기 초 국제 정세 변화와 기년 방식의 다양화
      • 5. 결론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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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개석, "麗蒙兄弟盟約과 초기 麗蒙關係의 성격: 사료의 再檢討를 중심으로" 대구사학회 101 : 81-132, 2010

      2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3 김용선, "일본에 있는 한국금석문 자료" 한림대 출판부 2010

      4 윤용혁, "세기 고려와 김취려의 활약" 혜안 175-, 2011

      5 백미나, "묘지명과 열전을 통해서 본 문학성과 역사성의 상호관련 양상 연구 -이자겸 난과 관련된 인물을 중심으로-" 동방한문학회 (48) : 135-156, 2011

      6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7 백미나, "고려후기 묘지명의 창작 방식 - 구성 원리를 통해 본 선택과 집중의 양상 -" 한민족문화학회 (33) : 3-30, 2010

      8 김보경, "고려전기 묘지명 연구-知制誥 찬 묘지명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회 (51) : 11-57, 2013

      9 김창현, "고려시대 묘지명에 보이는 연대와 호칭 표기방식" 고려사학회 (48) : 107-159, 2012

      10 최영호, "고려시대 묘지명과 고려사 열전의 서술형태" 한국중세사학회 (19) : 175-203, 2005

      1 이개석, "麗蒙兄弟盟約과 초기 麗蒙關係의 성격: 사료의 再檢討를 중심으로" 대구사학회 101 : 81-132, 2010

      2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3 김용선, "일본에 있는 한국금석문 자료" 한림대 출판부 2010

      4 윤용혁, "세기 고려와 김취려의 활약" 혜안 175-, 2011

      5 백미나, "묘지명과 열전을 통해서 본 문학성과 역사성의 상호관련 양상 연구 -이자겸 난과 관련된 인물을 중심으로-" 동방한문학회 (48) : 135-156, 2011

      6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7 백미나, "고려후기 묘지명의 창작 방식 - 구성 원리를 통해 본 선택과 집중의 양상 -" 한민족문화학회 (33) : 3-30, 2010

      8 김보경, "고려전기 묘지명 연구-知制誥 찬 묘지명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회 (51) : 11-57, 2013

      9 김창현, "고려시대 묘지명에 보이는 연대와 호칭 표기방식" 고려사학회 (48) : 107-159, 2012

      10 최영호, "고려시대 묘지명과 고려사 열전의 서술형태" 한국중세사학회 (19) : 175-203, 2005

      11 이미지, "고려시기 對거란 외교의 전개와 특징" 고려대학교 2012

      12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2

      13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누리미디어

      14 신수정, "고려 무신정권기 최충헌 가문의 혼인" 20 : 2008

      15 박한제, "魏晉南北朝時代 墓葬習俗의 變化와 墓誌銘의 流行" 동양사학회 (104) : 37-83, 2008

      16 장동익, "高麗時代 對外關係史 綜合年表" 동북아역사재단 2009

      17 "高麗史節要"

      18 "高麗史"

      19 李丙燾, "韓國史 中世篇" 乙酉文化社 1961

      20 "金史"

      21 丁善溶, "趙冲의 對蒙交涉과 그 政治的 意味" 93 : 2002

      22 高柄翊, "蒙古・高麗의 兄弟盟約의 性格" 6 : 1969

      23 "益齋集"

      24 "東國李相國全集"

      25 高柄翊,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70

      26 "寶慶四明志"

      27 "宋史"

      28 "元史"

      29 남종진, "中國 墓誌銘 起源考" 중국어문학연구회 (26) : 699-7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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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2-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9-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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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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