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관동대지진에 대한 언론 보도의 경향이다.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국한문판 『매일신보』와 일본어판『경성일보』, 당시 민족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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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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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관동대지진에 대한 언론 보도의 경향이다.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국한문판 『매일신보』와 일본어판『경성일보』, 당시 민족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와...
첫째는 관동대지진에 대한 언론 보도의 경향이다.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국한문판 『매일신보』와 일본어판『경성일보』, 당시 민족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있었다. 이들 신문은 기본적으로 그 성향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관동대지진의 보도 경향 역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착목하여 이들 신문의 보도 경향의 추이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식민지 조선에서 발행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는 관동대지진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발행되었던 신문의 사설의 내용도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둘째는 관동대지진과 식민지배정책과의 관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총독부에 관동대지진 소식이 전달된 것은 1923년 9월 1일 오후 6시 30분경 조선호텔 연회장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폭동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는 ‘문화통치’로 비교적 안정화되어가는 상황에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할 우려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귀화하는 조선인을 영접하거나 문안하는 등 위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동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를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유족들에게 1인당 1백 엔의 조의금을 지급하는 한편 지방관으로 하여금 유가족을 위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심의 동향으로 파악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당시 친일인사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계열, 공산주의계열을 포함하여 각종 사회단체, 나아가 일반 민중의 동향까지도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경성을 비롯하여 주요 도시, 지방에 이르기까지 민정시찰이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조선인의 관동대지진에 대한 인식을 ‘민심의 경향’으로 수시로 조사하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보는 3.1운동 이후 전개된 문화통치와 밀접하게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관동대지진 이후 귀국한 유학생을 비롯하여 노동자 등을 사회적으로 분리시키려는 공작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점은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 등 일본에서 자행되었던 조선인 학살의 목격담이 일반사회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인 학살을 유언비어라고 하여 철저하게 단속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관동대지진 이후 지배정책에까지 변화를 주었다. 이에 대해 분석적으로 추적해보고자 한다.
셋째는 관동대지진 발생 직후 전개되었던 구제활동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기 국내의 상황은 서선지역에 대규모의 수해가 발생하여 사회전반에서 이재민 구제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의 상황은 혼란이 가중되었다. 초기의 서선지역 수해에 대한 구제활동도 점차 관동대지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구제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인 구제활동이 전개되었다. 구제활동은 인류애라는 명분으로 관주도로 전개되었지만 여전히 두 민족 간의 갈등의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의 모금액과 방법에 대한 차이가 적지 않았으며, 관주도의 구제금 모금은 자발성보다는 강제성이 강하였기 때문에 대한 반발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주도 외에도 청년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자발성에 의거한 구제활동도 적지 않았다. 이는 구제활동을 통해 일선융화를 내세우는 관주도의 구제활동과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포애를 강조하는 사회단체의 자발적 구제활동을 분석하고 지배정책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넷째는 관동대지진이 식민지시기 어떻게 기억이 되고 전승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재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마다 기억되고 전승되었다. 조선인 학살은 해마다 추모 관련 행사를 통해 기억되고 전승되었다. 이러한 기억과 전승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교민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우선 관동대지진 1주년을 맞는 1924년 9월 1일 인천노동총동맹은 추도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이러한 추모행사는 사회단체와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언론에서도 관동대지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였다. 『동아일보』는 1924년 9월 1일자 신문에 당시 보도하였던 기사를 사진으로 게재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사회의 기억과 전승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