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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창녕 관룡사의 역사와 寺格 = The History and Temple Value of Guanryongsa Temple in Changnyeong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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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972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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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re are two documents on Guannyongsa Temple. One is a cultural heritage and the other is a literature material. According to this, you can see the creation of the 8th century a statue of Buddha and see what they look like in the 15th to 20th century.
      Guannyongsa Temple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of Silla. Since then, the history of Guannyongsa Temple has continued through the Goryeo and mid-Joseon Dynasties. After Japan invaded Joseon in 1592, Guannyongsa Temple was mostly burned down. However, it was restored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Guannyongsa Temple has been a representative temple in Changnyeong area since ancient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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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re are two documents on Guannyongsa Temple. One is a cultural heritage and the other is a literature material. According to this, you can see the creation of the 8th century a statue of Buddha and see what they look like in the 15th to 20th century...

      There are two documents on Guannyongsa Temple. One is a cultural heritage and the other is a literature material. According to this, you can see the creation of the 8th century a statue of Buddha and see what they look like in the 15th to 20th century.
      Guannyongsa Temple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of Silla. Since then, the history of Guannyongsa Temple has continued through the Goryeo and mid-Joseon Dynasties. After Japan invaded Joseon in 1592, Guannyongsa Temple was mostly burned down. However, it was restored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Guannyongsa Temple has been a representative temple in Changnyeong area since ancient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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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관룡사의 연혁은 문화재와 문헌 자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불보살상이나 벽화 등은 8세기와 17세기 전반~18세기 중반에 조성되었고, 약사전, 대웅전, 원음각 등의 건물은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에 건립되었다. <관룡사사적기>에는 17세기~18세기 관룡사의 연혁이 전하고, 상량문에는 15세기 전반~19세기 전반 관룡사의 상황이 담겼으며, 여러 문인의 문집에서도 17세기~20세기 관룡사의 모습이 확인된다.
      현재 전하는 전승에 의하면, 진평왕 때 이래로 지금의 관룡사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찰이 자리하였다가 원효와 관련하여 ‘관룡사’라고 불렸다. 성덕왕 때 용선대에 조성・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을 찾는 순례자나 기도자들이 머무는 사찰로 기능하다가 경덕왕 때 중창되었고, 여러 불사는 혜공왕 때에도 설행되었다. 9세기에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 조성되고, 약사전 석조여래좌상과 약사전 앞 3층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되었다. 약사전 건립이나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의 봉안도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 관룡사 법등은 6세기 이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어져 왔다.
      임진왜란 때 관룡사는 약사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복원 불사는 17세기에 집중 설행되었는데, 이전의 건물을 중창하는 것 외에 새 전각을 집중 건립하였고, 불보살상을 제작․봉안하면서 주변 암자도 경내로 옮겼다. 점차 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1704년(숙종 30) 7월에 주변에 많은 비가 내려 크게 훼손되었다. 그 뒤로도 복원 불사가 이어졌지만, 전각의 수나 규모는 이전보다 줄었다. 1749년(영조 25)부터 또 다른 불사가 설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1733년에 <관룡사사적기>이 찬술되었다.
      인양사처럼 창녕 일대 사찰은 창녕 일대 유력 세력은 물론 신라 조정이나 왕경의 사찰과 긴밀하였다. 관룡사에는 원효의 ≪화엄경≫ 강경 전승이 전해질 정도로, 반룡사, 옥천사 등 창녕 주변 화엄 사찰의 영향이 제법 미쳐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다. 원효 전승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원효의 저작이 포함된 <초발심자경문>이 관룡사에서 간행되었다. 관룡사의 사격은 조선 전기에도 提高되거나 유지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전란과 홍수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창녕 일대 불교계의 전통을 계승하는 불사가 꾸준히 설행되면서, 창녕 유력 세력은 물론 고령, 밀양, 대구 등지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일대의 주요 사찰로 자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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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룡사의 연혁은 문화재와 문헌 자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불보살상이나 벽화 등은 8세기와 17세기 전반~18세기 중반에 조성되었고, 약사전, 대웅전, 원음각 등의 건물은 ...

      관룡사의 연혁은 문화재와 문헌 자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불보살상이나 벽화 등은 8세기와 17세기 전반~18세기 중반에 조성되었고, 약사전, 대웅전, 원음각 등의 건물은 18세기 중반~19세기 전반에 건립되었다. <관룡사사적기>에는 17세기~18세기 관룡사의 연혁이 전하고, 상량문에는 15세기 전반~19세기 전반 관룡사의 상황이 담겼으며, 여러 문인의 문집에서도 17세기~20세기 관룡사의 모습이 확인된다.
      현재 전하는 전승에 의하면, 진평왕 때 이래로 지금의 관룡사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찰이 자리하였다가 원효와 관련하여 ‘관룡사’라고 불렸다. 성덕왕 때 용선대에 조성・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을 찾는 순례자나 기도자들이 머무는 사찰로 기능하다가 경덕왕 때 중창되었고, 여러 불사는 혜공왕 때에도 설행되었다. 9세기에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 조성되고, 약사전 석조여래좌상과 약사전 앞 3층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되었다. 약사전 건립이나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의 봉안도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 관룡사 법등은 6세기 이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어져 왔다.
      임진왜란 때 관룡사는 약사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복원 불사는 17세기에 집중 설행되었는데, 이전의 건물을 중창하는 것 외에 새 전각을 집중 건립하였고, 불보살상을 제작․봉안하면서 주변 암자도 경내로 옮겼다. 점차 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1704년(숙종 30) 7월에 주변에 많은 비가 내려 크게 훼손되었다. 그 뒤로도 복원 불사가 이어졌지만, 전각의 수나 규모는 이전보다 줄었다. 1749년(영조 25)부터 또 다른 불사가 설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1733년에 <관룡사사적기>이 찬술되었다.
      인양사처럼 창녕 일대 사찰은 창녕 일대 유력 세력은 물론 신라 조정이나 왕경의 사찰과 긴밀하였다. 관룡사에는 원효의 ≪화엄경≫ 강경 전승이 전해질 정도로, 반룡사, 옥천사 등 창녕 주변 화엄 사찰의 영향이 제법 미쳐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다. 원효 전승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원효의 저작이 포함된 <초발심자경문>이 관룡사에서 간행되었다. 관룡사의 사격은 조선 전기에도 提高되거나 유지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전란과 홍수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창녕 일대 불교계의 전통을 계승하는 불사가 꾸준히 설행되면서, 창녕 유력 세력은 물론 고령, 밀양, 대구 등지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일대의 주요 사찰로 자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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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장일규, "창녕 관룡사의 신라 불교사적 위상" 신라사학회 (26) : 51-77, 2012

      2 임영애,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의 새로 발견된 '명문'과 '양식' 문제" 신라문화연구소 47 : 55-78, 2016

      3 최성은,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 小考-造像銘文과 중대신라 불교조각" 신라사학회 (16) : 225-260, 2009

      4 박홍국,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과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의 풍우(風雨) 마모흔 고찰" 22 : 2016

      5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 해체수리 자료집 사찰건축편" 2010

      6 文化財廳, "觀龍寺大雄殿修理報告書" 2002

      7 金周泰, "觀龍寺大雄殿上樑文" 6 (6): 1965

      8 "東文選"

      9 유경희, "朝鮮後期 白衣觀音壁畵의 圖像과 信仰 硏究" 한국미술사학회 265 (265): 197-231, 2010

      10 "昌舍集"

      1 장일규, "창녕 관룡사의 신라 불교사적 위상" 신라사학회 (26) : 51-77, 2012

      2 임영애,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의 새로 발견된 '명문'과 '양식' 문제" 신라문화연구소 47 : 55-78, 2016

      3 최성은,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 小考-造像銘文과 중대신라 불교조각" 신라사학회 (16) : 225-260, 2009

      4 박홍국,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과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의 풍우(風雨) 마모흔 고찰" 22 : 2016

      5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 해체수리 자료집 사찰건축편" 2010

      6 文化財廳, "觀龍寺大雄殿修理報告書" 2002

      7 金周泰, "觀龍寺大雄殿上樑文" 6 (6): 1965

      8 "東文選"

      9 유경희, "朝鮮後期 白衣觀音壁畵의 圖像과 信仰 硏究" 한국미술사학회 265 (265): 197-231, 2010

      10 "昌舍集"

      11 河日植, "昌寧觀龍寺의 石佛臺座銘과 ≪觀龍寺事蹟記≫" 12 : 1997

      12 하일식, "昌寧仁陽寺碑文의 硏究-8세기 말~9세기 초 신라 지방사회의 단면" 95 : 1996

      13 채민석, "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佛坐像의 조성 배경과 檀越 세력" 신라사학회 (41) : 65-115, 2017

      14 "新增東國輿地勝覽"

      15 "巖棲集"

      16 "嶺南昌寧縣火王山觀龍寺事蹟"

      17 "崔文昌侯全集"

      18 "修山集"

      19 "三國遺事"

      20 "三國史記"

      21 최경현, "19世紀의 寺刹 壁畵 硏究- 一般繪畵를 中心으로 -" 한국문화사학회 (38) : 139-16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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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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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1 0.58 0.981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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