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변경인(邊境人) 소롱이(小弄耳)를 통해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롱이는 조선의 ‘번호’에서 홀...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G3718127
2016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변경인(邊境人) 소롱이(小弄耳)를 통해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롱이는 조선의 ‘번호’에서 홀...
본 연구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였던 변경인(邊境人) 소롱이(小弄耳)를 통해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롱이는 조선의 ‘번호’에서 홀라온 부잔타이의 ‘홀차’로, 다시 건주위 누르하치의 ‘차호’ 및 ‘호차’로 그 위치가 변화되었고 조선과의 외교적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첫째,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변경인 소롱이를 통해 여진 사신이라 할 수 있는 ‘호차’의 발생과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국가 권력의 변화, 국제 관계의 변화 속에서 변경인들의 위치 변화와 역할 변화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 변화 속에서 나타난 조선과 여진과의 현안 문제들을 파악해 보고 조선의 여진에 대한 외교적 대응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변경인의 변화상의 일단을 살펴보는 동시에 전근대 조선의 북방 외교정책을 새롭게 조망하여 보고자 한다. 아울러 변화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조선의 외교적 대응 방안과 양상을 살펴보면서 조선의 북방 외교정책의 종합적 이해를 도모해보고자 한다.
본 연구과제 수행을 위한 연구 추진전략과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선행연구 조사를 통해 관련 연구 성과를 검토한다. 둘째, 사료 조사를 통해 관련 내용을 파악하고 기초자료를 분석·정리한다. 셋째, 연구논문 작성 및 학회 발표를 통해 연구를 보완하고, 보완된 연구 결과물을 전문학술지에 개재한다.
본 연구내용의 대략적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번호 통제는 사실상 상실되었으며, 조선은 새로운 북방 세력의 출현과 침입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에서는 홀라온(忽剌溫)이라 부르던 세력이었다. 홀라온의 부잔타이가 두만강 유역을 침입하여 조선의 번호들에 대한 복속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변경도 부잔타이에게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의 번호였던 소롱이는 ‘홀차’로서 조선에 파견되어 부잔타이와 조선 간의 여러 외교적 현안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부잔타이와 경쟁하던 누르하치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부잔타이의 군대를 격파하고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복속시켰으며, 이후 여진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고 후금(後金)을 세웠다. 후금은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심하(深河)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을 패퇴시켰고, 조선의 강홍립(姜弘立) 등이 항복하면서 이들이 후금에 포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롱이는 ‘차호(差胡)’ 또는 ‘호차(胡差)’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한다. 누르하치로서는 소롱이를 이용하여 조선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시도하였고, 심하전투 이후에는 조선에 후금의 국서를 전달하거나 포로 송환 및 조선의 사신 파견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결국 소롱이는 16∼17세기 조선과 여진과의 변화된 관계 속에서 최일선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롱이가 조선의 번호에서 홀라온의 사신 홀차로, 다시 누르하치의 사신 호차로 바뀐 것은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 변화,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