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각 지방에서 威勢品이 공반되고 있는 분묘들이 조영되었던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후반에 지방통치방식의 변화를 초래한 배경을 대외관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중앙 정치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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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orean
대외관계 ; 위세품(威勢品) ; 재지세력 ; 부체제 ; 담로제(?魯制) ; 왕후제(王侯制) ; foreign policy ; prestige goods ; provincial forces ; Bu system
KCI등재
학술저널
207-2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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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각 지방에서 威勢品이 공반되고 있는 분묘들이 조영되었던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후반에 지방통치방식의 변화를 초래한 배경을 대외관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중앙 정치상황의 변동 속에서 고찰한 것이다.
한성후기 백제 대외관계의 흐름을 내용적으로 보면 크게 3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에 해당하는 근초고왕~침류왕대는 마한세력의 통합 및 대내적인 체제정비를 토대로 국력의 대외적 확산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와 같은 국력의 팽창을 바탕으로 백제는 능동적인 입장에서 동진 및 왜, 신라 등과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제2기인 진사왕~아신왕대는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수세적인 상황에 놓였다. 먼저 중국과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는데,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제1기와는 달리 진사왕 이후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한 군사적 원조의 필요성에서 추진되었으나 큰 성과는 확인되지 않으며, 오히려 왕위계승분쟁과 정치세력의 변동을 초래하였다. 제3기는 전지왕대부터 개로왕대까지로, 이 시기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위기의식은 오히려 가중된 시기이다. 이에 신라와 다시 우호관계를 맺고, 왜 및 중국과의 교류도 보다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한성 후기 고구려의 남진시기와 맞물려 백제는 왕위 계승 분쟁과 귀족세력의 교체라는 정치적 변동을 겪었다. 고구려의 한강 이북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북부를 세력기반으로 하고 王妃族이었던 진씨 세력의 위축을 초래함으로써 해씨세력이 왕비족으로 등장하고, 금강유역의 신진세력이 중앙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왕위계승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과 정치세력의 변동은 국가 통치체제의 약화를 가져왔고, 이는 결국 국가권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지방에 대한 지배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후반에는 각 지역에서 위세품이 부장된 대규모의 고분이 조영되었다. 이들 위세품이 공반된 고분의 피장자는 재지세력으로서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지방지배자로서의 위상을 지닌 존재였다. 당시 이들 재지세력들에게 위세품이 사여된 배경은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중앙통치체제의 약화로 지방에 대한 지배체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지방세력의 이탈을 방지하고 각 지방으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받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즉 한성후기 部體制하에서 지방통치체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던 시기로부터 檐魯制로 이행하기 전까지 나타났던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aims to consider the events that brought about changes in foreign policy and the circumstances of Baekje"s central government during late 4<SUP>th</SUP> to mid 5<SUP>th</SUP> century when the provincial leaders chang...
This paper aims to consider the events that brought about changes in foreign policy and the circumstances of Baekje"s central government during late 4<SUP>th</SUP> to mid 5<SUP>th</SUP> century when the provincial leaders changed their burial practices.
The nature of Baekje foreign policy in the late Hanseong period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We infer that during King GeunChogo of Baekje"s(and his son King GeunGusu) influence grew after King Gogukwon of Goguryeo was overthrown during the invasion of Pyungyang castle in the 1<SUP>st</SUP> period. Baekje then favored a policy of open exchange and commerce with Dongjin, China and Japan to bolster Baekje"s regional power.
The direction of policy shifted in the 2<SUP>nd</SUP> period. Following a Chinese/Goguryeo war, ties with China became more lax. Baekje"s relationship with Japan grew with the aim of securing military assistance to wage war against Goguryeo after death of King Jinsa. Upuntil this period, foreign policy had only been used to maintain Baekje"s national status.
The 3<SUP>rd</SUP> period, from King Jeonji to King Gaero, asense of crisis occurred when Goguryeo moved its capital to Pyungyang, despite a lull in the war against Goguryeo. Baekje needed to secure more reliable alliances in preparation for Goguryoe’s southward advance. Accordingly, Baekje resumed friendly relations with Silla and again actively pushed ahead with international cooperation with Japan and China.
During the later part of the Hanseong period, Baekje experienced political instability due to internal disputes over succession at a time when Goguryeo was advancing south. Goguryeo influence south of the Han River diminished the leverage of the Hae clan decline, a family based on northern region. Consequently, the another clan and other new forces along Geum River made their way to political center. Conflict over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changes in political power deteriorated the nation’s ruling system, influence and control over the provinces.
From the late 4<SUP>th</SUP> to 5<SUP>th</SUP> century, large tombs were built regionally to honor provincial rulers. Various artifacts and treasures were buried with the departed. These treasures had been given in order to secure loyalty, provisions and provincial forces at a time when the central ruling system was having trouble maintaining control. This practice appeared to have been implemented during a time of transition, from Bu system to Damroje.
목차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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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이력
|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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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08-12-06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호서사학 -> 역사와 담론외국어명 : HO-SUH SAHAK -> HISTORY AND DISCOURSE(Journal of Historycal Review) | ![]() |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 2005-09-29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호서사학외국어명 : HO-SUH SAHAK | ![]() |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 2016 | 0.56 | 0.56 | 0.48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 0.46 | 0.46 | 0.953 | 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