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후학들은 누구나 다 퇴계를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후학들 가운데는 理氣互發說을 퇴계의 原義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에서 수정을 가한 경우가 많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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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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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후학들은 누구나 다 퇴계를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후학들 가운데는 理氣互發說을 퇴계의 原義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에서 수정을 가한 경우가 많다. 그...
퇴계의 후학들은 누구나 다 퇴계를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후학들 가운데는 理氣互發說을 퇴계의 原義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에서 수정을 가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갈암은 ‘퇴계의 理發’을 ‘主理’의 뜻과 ‘理가 스스로 발한다’는 뜻을 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옹호했다. 갈암은 퇴계설을 원형 그대로 인식하고, 옹호한 것이다. 갈암의 이러한 주장은 密庵 李栽, 淸臺 權相一 등에게 계승됐으나, 그 뒤로는 뚜렷하게 계승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大山 李象靖의 ‘理主氣資論’은 ‘理․氣’를 ‘本과 具’의 관점에서 해명한 것이다. 대산은 ‘形而上者인 理가 스스로 發動할 수는 없다’는 관점에서, ‘퇴계의 理發’을 ‘理가 스스로 발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만 ‘理를 主로 삼는다(主理)’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입장은 율곡 성리학과도 쉽게 회통될 수 있는 것이다. 대산은 영남지방에서 ‘小退溪’로 추앙받았다고 하거니와, 이는 대산의 理主氣資論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영남 성리학에서 ‘本具論的 思惟’가 자리잡는 과정에는 旅軒 張顯光의 理氣經緯說이 크게 기여한 것이다. 克齋 申益愰이 갈암에 맞서 율곡 성리학을 적극 옹호했던 것도 理氣經緯說에 입각한 것이었다.
영남성리학은 寒洲 李震相에 이르러 다시 異彩를 발하게 되니, 이른바 ‘心卽理說’이 그것이다. ‘心’에 관한 영남성리학의 宗旨는 ‘마음은 理와 氣가 합쳐진 것(心合理氣)’이라는 것이었다. 心合理氣說은 理氣互發說과 쉽게 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주가 心卽理說을 주장하여 心에 대한 논의에서 氣를 배제한 까닭은 이른바 ‘心統性情’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주의 理氣論은 대체에 있어서 대산의 理主氣資論을 따르는 것이요, 이 점에 있어서는 기호성리학과도 소통의 여지가 다분한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본 연구에서 다루어질 주요 성리학자들을 계통별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退溪 李滉(1501~1570)
② 愚潭 丁時翰(1625~1707), 葛庵 李玄逸(1627~1704)
密庵 李栽(1657~1730), 淸臺 權相一(1679~1760)
③ 旅軒 張顯光(1554~1637), 克齋 申益愰(1672~1722)
④ 大山 李象靖(1711~1781), 立齋 鄭宗魯(1738~1816), 定齋 柳致明(1777~1861)
⑤ 星湖 李瀷(1681~1763), 茶山 丁若鏞(1762~1836)
⑥ 寒洲 李震相(1818~1886), 俛宇 郭鍾錫(1846~1919)
위의 여러 계열 가운데, ②는 퇴계의 성리학을 원형 그대로 계승한 계열로서, 이들은 ‘理의 能動性’을 강조하였다. ③은 理氣經緯說에 입각해 理氣互發說을 비판적으로 인식했던 계열이다. 다만, 극재 신익황은 갈암과의 논변 이후 ②에 합류했다. ④는 ③의 영향을 받아 ‘理의 能發說’을 부정하는 계열이다. 이들은 理主氣資論에 입각하여 ‘理發․氣發’을 다만 ‘主理․主氣’의 뜻으로 해석하고, ‘渾淪과 分開의 균형’을 강조했다. ⑤는 畿湖南人 계열로서, 이들은 實學者로서뿐만 아니라 性理學者로서도 一家를 이루었다. ⑥은 理主氣資論를 전제로 삼은 점에서는 ④와 같으나, ‘心卽理’를 주장한 점에서 ④와 구별된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본 연구에서는 영남성리학을 계통별로 연구하고 그 전모와 특징을 해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