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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김병로의 항일변론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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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일제하 대표적인 항일변호사로 꼽히는 김병로의 1930년대 변론활동의 전개를 살펴본 것이다. 김병로는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산, 변호사정직처분 등의 위기를 겪으며, 자신을 재정비하여 1930년대 항일변론을 본격화한다. 이인 변호사와 청진동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1941년까지 항일변론을 주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가 한 변론으로는 안창호 사건, 조용하 사건,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 박헌영 사건, 이재유 사건, 동우회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안창호 사건, 동우회 사건을 제외하고 김병로의 주요 변론을 살펴보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보도통제가 강화되어 그 구체적인 변론내용이 직접 소개되어 있지 않기에, 추론적 접근을 꾀하였다.
      김병로가 이 시기에 한 사건은 주로 ‘사상사건’이고 지도적 공산주의자에 대한 변론이 적지 않았다. 그는 대표적인 ‘사상변호사’ ‘좌경변호사’로 일컬어졌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다수는, 수사자료, 일제 관헌의 문건, 법정진술 등을 통해 볼 때 민족주의를 바탕에 깔고 거기에 공산화로 더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김병로는 독립민족국가를 쟁취하자는 공통목표를 갖고 있다고 보았고, 자신의 변론은 그들과 공동전선을 펴는 것으로 이해했다. 때문에 그는 좌/우를 막론하고, 동지적 입장에서 변론을 전개했다.
      기존의 김병로 연구에서는 김병로의 창동 이사(1930년대 초반) 이후에 변론활동을 덮고 ‘은거’ ‘수절’했다고 정리하고 있으나, 자료와 증언에 입각해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20년대보다 어려워진 여건 하에서도 그의 항일변론활동이 가열차게 전개됨을 확인한 점은 본고의 성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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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일제하 대표적인 항일변호사로 꼽히는 김병로의 1930년대 변론활동의 전개를 살펴본 것이다. 김병로는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산, 변호사정직처분 등의 위기를 겪으며, 자신을 재정비...

      본고는 일제하 대표적인 항일변호사로 꼽히는 김병로의 1930년대 변론활동의 전개를 살펴본 것이다. 김병로는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산, 변호사정직처분 등의 위기를 겪으며, 자신을 재정비하여 1930년대 항일변론을 본격화한다. 이인 변호사와 청진동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1941년까지 항일변론을 주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가 한 변론으로는 안창호 사건, 조용하 사건,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 박헌영 사건, 이재유 사건, 동우회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안창호 사건, 동우회 사건을 제외하고 김병로의 주요 변론을 살펴보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보도통제가 강화되어 그 구체적인 변론내용이 직접 소개되어 있지 않기에, 추론적 접근을 꾀하였다.
      김병로가 이 시기에 한 사건은 주로 ‘사상사건’이고 지도적 공산주의자에 대한 변론이 적지 않았다. 그는 대표적인 ‘사상변호사’ ‘좌경변호사’로 일컬어졌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다수는, 수사자료, 일제 관헌의 문건, 법정진술 등을 통해 볼 때 민족주의를 바탕에 깔고 거기에 공산화로 더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김병로는 독립민족국가를 쟁취하자는 공통목표를 갖고 있다고 보았고, 자신의 변론은 그들과 공동전선을 펴는 것으로 이해했다. 때문에 그는 좌/우를 막론하고, 동지적 입장에서 변론을 전개했다.
      기존의 김병로 연구에서는 김병로의 창동 이사(1930년대 초반) 이후에 변론활동을 덮고 ‘은거’ ‘수절’했다고 정리하고 있으나, 자료와 증언에 입각해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20년대보다 어려워진 여건 하에서도 그의 항일변론활동이 가열차게 전개됨을 확인한 점은 본고의 성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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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im Pyong Ro [1987-1964] was the first 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of Korea. He has enthusiastically defended the Korean patriots who were accused by Japanese Colon for their anti-Japanese movement under the colonial period especially in 1920s. This paper demonstrates his legal practice against Japanese domination in the entire 1930s, which is under evaluated.
      In the 1930s, most of his cases were related to “the communist organizers”. Often, he was called as a “left-wing lawyer” or an “ideological lawyer”. He did not distinguish the simple nationalist anti-colonial case from the communist-tended case when he selected his own case. As many socialist/communist leaders stated at the court, it was unimaginable to step forward any communist agenda under the colonial iron-rule. Although he was not a communist, he advocated the communist organizers in the colonial era. Communist movement at that time was closely related to Korean liberation anti-colonial movement. His advocacy was based on the premise that every kind of anti-Japanese movement should be/could be integrated into one goalthe Independence of Korea. Kim Pyong Ro and his colleague “left-wing lawyers” have arduously advocated communist leaders in the 1930s. Anti-Japanese law practice of Kim Pyong Ro in the 1930s has been undervalued compared to one in the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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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 Pyong Ro [1987-1964] was the first 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of Korea. He has enthusiastically defended the Korean patriots who were accused by Japanese Colon for their anti-Japanese movement under the colonial period especially in 1920s....

      Kim Pyong Ro [1987-1964] was the first 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of Korea. He has enthusiastically defended the Korean patriots who were accused by Japanese Colon for their anti-Japanese movement under the colonial period especially in 1920s. This paper demonstrates his legal practice against Japanese domination in the entire 1930s, which is under evaluated.
      In the 1930s, most of his cases were related to “the communist organizers”. Often, he was called as a “left-wing lawyer” or an “ideological lawyer”. He did not distinguish the simple nationalist anti-colonial case from the communist-tended case when he selected his own case. As many socialist/communist leaders stated at the court, it was unimaginable to step forward any communist agenda under the colonial iron-rule. Although he was not a communist, he advocated the communist organizers in the colonial era. Communist movement at that time was closely related to Korean liberation anti-colonial movement. His advocacy was based on the premise that every kind of anti-Japanese movement should be/could be integrated into one goalthe Independence of Korea. Kim Pyong Ro and his colleague “left-wing lawyers” have arduously advocated communist leaders in the 1930s. Anti-Japanese law practice of Kim Pyong Ro in the 1930s has been undervalued compared to one in the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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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 요약]
      • Ⅰ. 글머리에
      • Ⅱ. 김병로 - 이인의 합동법률사무소 시대
      • Ⅲ. 조용하 사건의 변론
      • Ⅳ.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변론
      • [국문 요약]
      • Ⅰ. 글머리에
      • Ⅱ. 김병로 - 이인의 합동법률사무소 시대
      • Ⅲ. 조용하 사건의 변론
      • Ⅳ.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변론
      • 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활동에 대한 변론
      • Ⅵ. 이재유와 공산당재건운동사건 변론
      • Ⅶ. 사상변호사와 공산주의자의 관계
      • Ⅷ.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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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병로, "회견기: 반민법 실시와 대법원측 구상, 신법전의 발포와 기타에 대하야" 삼천리사 (6) : 1948

      2 김기림, "해소 가결 전후의 신간회" 삼천리사 (16) : 1931

      3 홍석률, "한국사 15 :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1" 한국사편집위원회 1994

      4 김호일, "한국 근대 학생운동사" 선인 2005

      5 신용하, "조소앙의 사회사상과 삼균주의" 일지사 (104) : 2001

      6 "조선중앙일보"

      7 "조선일보"

      8 "조선일보"

      9 "조선일보"

      10 장덕조, "일곱장의 편지" 우주 1981

      1 김병로, "회견기: 반민법 실시와 대법원측 구상, 신법전의 발포와 기타에 대하야" 삼천리사 (6) : 1948

      2 김기림, "해소 가결 전후의 신간회" 삼천리사 (16) : 1931

      3 홍석률, "한국사 15 :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1" 한국사편집위원회 1994

      4 김호일, "한국 근대 학생운동사" 선인 2005

      5 신용하, "조소앙의 사회사상과 삼균주의" 일지사 (104) : 2001

      6 "조선중앙일보"

      7 "조선일보"

      8 "조선일보"

      9 "조선일보"

      10 장덕조, "일곱장의 편지" 우주 1981

      11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12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푸른역사 2007

      13 김병로, "신간회의 해소론이 대두함에 제하야" (18) : 1931

      14 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허헌 김병로 이인과 항일재판투쟁" 경인문화사 2012

      15 최종고, "사도법관 김홍섭" 육법사 1985

      16 "보성전문학교 일람"

      17 동허자, "변호사 평판기(1)" 동광사 (31) : 1932

      18 동허자, "변호사 평판기(1)" 동광사 (33) : 1932

      19 김갑수, "법창30년" 법정출판사 1970

      20 고재호, "법조반백년" 박영사 1985

      21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학 출판부 1974

      22 "민족주의와 사상범" 삼천리사 11 (11): 1939

      23 "매일신보"

      24 "매일신보"

      25 "매일신보"

      26 "매일신보"

      27 "동아일보"

      28 "동아일보"

      29 "동아일보"

      30 "동아일보"

      31 "동아일보"

      32 "동아일보"

      33 "동아일보"

      34 "동아일보"

      35 "동아일보"

      36 "동아일보"

      37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술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1

      38 이충우, "경성제국대학" 다락원 1980

      39 김학준, "가인 김병로 평전: 민족주의적 법률가ㆍ정치가의 생애" 민음사 1988

      40 김학준, "가인 김병로 평전: 민족주의적 법률가ㆍ정치가의 생애" 민음사 2013

      41 김진배, "가인 김병로" 삼하인쇄주식회사 1983

      42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42권 獨立軍資金募集 11" 국사편찬위원회 1986

      43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42권 獨立軍資金募集 11" 국사편찬위원회 1986

      44 "機密室(우리 社會의 諸內幕)" 삼천리사 10 (10): 13-23, 1938

      45 "在布哇趙鏞夏事件判決"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 3 (3): 11-13, 1933

      46 "出頭巨頭의 其後, 第一․二次 共産黨事件의 首腦者, 民衆運動者大會事件의 首腦者" 삼천리사 6 (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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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1 1.1 0.9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1 0.76 1.284 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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