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해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공포하였다. 국가총동원법의 공포와 함께 실행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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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해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공포하였다. 국가총동원법의 공포와 함께 실행된 ...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해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공포하였다. 국가총동원법의 공포와 함께 실행된 총동원체제는 조선인들에게 노동력 동원의 법적 근거를 부여하였고, 이는 일제의 침략전쟁수행을 위한 물적ㆍ인적 물자의 통제와 운용, 국민징용과 노동조건의 규제, 그리고 언론 통제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국가통제를 가능케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칙령으로 이를 정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자 수급과 조정, 단체 협력, 국민징용, 노사협조를 위한 노동쟁의 방지, 고용제한, 수출입 통제, 물자 사용·수용(收用)자금 수급 조정, 공장시설 등 수용, 광업권 제한, 물가통제, 출판 제한·금지 등과 같은 사회전반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후 1939년에 들어서자 일본 정부는 ‘국민징용령(國民徴用令)’과 ‘가격 등 통제령(価格等統制令)’ 등과 같은 주요 칙령을 잇따라 발령하면서 국가전시체제의 영향은 식민지민의 경제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였고,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인적 자원의 통제와 전시동원을 본격화하였다.
전시동원의 본격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장의 확대와 장기화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생산성 증강을 요구하였고, 이에 일제는 일본 내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인을 동원ㆍ배치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모집(募集)’과 ‘관알선(官斡旋)’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된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일본대자본과 식민지 행정력이 투입된 강압적 행위였다. 이후 전황이 악화될수록 노동력 동원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일본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하여 노동력 동원을 지속하였고, 지방의 말단 행정에서는 식량배급의 불이행이나 촌락 내 자본ㆍ계급 차이를 이용하여 노동력 동원을 충당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조선인들은 일본 내 탄광이나 군수회사의 작업장으로 배치되거나 동남아시아, 또는 사할린 지역으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1937년 전시체제기 이전부터 식민지의 노동력 활용에 대한 고민에 따른 조사를 실시하였다. 식민통치 초기인 1910년에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선인 신체 조사나 인류학적인 측면으로 인식ㆍ접근하였지만, 1920년대 공업화의 진행과 함께 조선인들이 일본 본토로 유입되면서 노동자로서의 조선인으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해당 시기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조사는 노동력과 그에 따른 통제에 대한 조사가 아닌 일본 사회 내 관리해야 할 계층으로서, 게으르고 더러운 인종집단으로 인식ㆍ처우하였다.
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제국의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만주국 운영을 담당하던 국책회사였던 만철은 그 하위기관인 경제조사부와 흥중공사를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들의 노동능력을 수치화하여 조사를 진행하였고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능률적인 활용과 관리ㆍ통제 방법을 모색하였다.
만철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만주인 노동자들의 노동능력은 신체적 조건이나 작업태도에 따라 노동능률에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음을 밝혀냈다. 다만 식민지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선 언어나 생활 문화 차이에 의한 어려움이 존재하였고, 이는 노동 관리와 통제의 필요성을 제시하면서 노동시장에서 일본인 노동자의 입지에도 영향을 줄 것임을 예측하였다. 이러한 만철의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능력 조사는 제국 운영의 방침과 필요에 따라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증거임과 동시에 조선인 노동력 사용을 위한 사전 조사작업이었다.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은 전시체제기 동안 일본 내 군수사업장에 본격적으로 동원ㆍ유입되었고, 이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활용되었다.
전시체제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선인 노동력 동원을 통해 수급하고자 하였다. 특히 중국과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전황이 확대되고면서 장기전 양상에 의해 군수물자의 지속적인 생산요구는 이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일본대자본에게 수행토록 하였다. 이에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일본대자본의 전쟁 수행은 이윤창출이라는 기업의 본래적 요구와 함께 적용되었고, 이는 조선인 노동자에게 차별적 저임금체제와 억압적 노동 관리ㆍ통제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인 노동자에 하여금 일본 정부의 국가적 전쟁 수행과 일본대자본의 이윤창출이라는 부담을 전가시켰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리야마채탄의 조선인 노동자 관리담당자의 증언과 다이쇼광업의 임금표는 일본대자본이 행정력을 통해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력 수탈 실태를 보여준다.
1937년부터 본젹적으로 조선인 탄광 노동자를 동원하기 시작한 이리야마채탄은 1944년 기준 4,000여명의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갱내 작업에 투입되었다.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광부로서 일본인 숙련 탄광 노동자인 사키야마와 조를 맞춰 갱내로 투입, 채탄작업에 동원되었다. 작업 이후에는 아오바구에 설치된 기숙사에서 기거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인 기숙소장의 엄격하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다. 이리야마채탄은 기숙사에 거주하는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에 대하여 폭력을 통해 도주방지와 생활 통제를 하였고, 도망가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지역 경찰과 협업하여 통제하였다. 또한 임금조차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고, 식사나 치료조차 미비하여 전염병이나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노동자나 포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리야마채탄의 조선인 탄광 노동자 동원과 통제는 강제적이며 착취적인 노동환경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 대한 임금과 노동력 수탈로 이어졌다.
한편 큐슈 치쿠호탄전에 자리잡은 다이쇼광업 역시 전시체제기 이후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동원ㆍ관리하였다. 다이쇼광업은 탄광 노동자의 근무년수나 숙련도와는 상관없이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일본인 탄광 노동자와는 차별적인 임금체계 속에서 채탄작업에 동원하였고, 이는 임금수탈로 이어졌다. 또한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은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작업에 투입되었음에도 산정된 임금은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적은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공제내역에서는 민족간 임금 차이가 나타나는데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은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과는 달리 더 많은 공제내역과 공제금이 할당되었고, 이는 직역저금이나 국채저금, 배식비나 유부비와 같은 명목의 내역을 통해 임금의 상당액이 공제되었다. 이러한 차별적인 임금체계는 일본탄광대자본으로 하여금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노동수당을 들이며 채탄생산비용을 낮추는 대신 생산량을 증가시키려 했고, 이는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 대한 임금수탈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조선인ㆍ일본인 탄광 노동자의 차별적 임금체계 속에서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낮은 인건비를 통해 침략전쟁 수행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전시체제기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식민지 조선에서 실행된 적극적ㆍ강제적 노동력 수탈이었다. 일제는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근본적 필수요소였던 노동력을 식민지 조선인을 통해 수급ㆍ동원하였고,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적인 식민행정과 착취적인 일본대자본의 노동 관리ㆍ통제를 실행하였다.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운영과 전쟁수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노동력을 저임금체계와 동원행정을 통해 이루어진 식민 지배의 본질이었다. 이러한 전시체제기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식민지 조선의 산업과 사회의 근간이 되는 인적자원의 말살과 수탈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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