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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인박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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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 영정: 왕인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375-384년)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시어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이무렵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였으며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와 수교를 맺고 태자전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왜왕 응신은 백제의 태자전지가 도왜한지 7년만에 백제의 태자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 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하였다. 백제 17대 아신왕때에 왕인은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당시 왕인은 32세 이었으며, 상대포는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 때에도 이 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오고 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 들이 큰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와 나라(奈良)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 예술을 꽃피웠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오사카(大阪府) 히라카타(枚方)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대판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정화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양력 4월 초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출처 : 영암군청)

      - 탄생지: 왕인유적지 오른쪽 기슭이 왕인이 태어났다는 성기동이다. 그 중 한바위에 ‘옛 최씨원으로 지 금조가장이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기념정화비: 이 비는 정화사업을 기념한 비로 정화사업 추진내역이 기록되어있다. 이 비는 일본 동경에 있는 왕인라이온스클럽에서 세웠다. 정화기념비 앞에 놓여진 책한권은 천자문책이고 양쪽에 다섯권, 다섯권은 논어 10권을 뜻한다. 그리고 동그란 원은 북을 뜻한다.
      ① 덕건명립(德建名立): 올바른 일을 행하여 그 이름이 아름답게 나타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는 뜻
      ② 형단표정(形端表正) : 사람의 외모가 단정하면 마음씨도 고우며 무엇이든 바르게 보인다는 뜻
      ③ 책공무실(策功茂實) : 공을 도모함에 무성하고, 충실하였다.
      ④ 늑비각명(勒碑刻銘) : 살아서 공을 많이쌓은 사람은 죽은다음에도 시석에 그 공을 기린다. (출처: 영암군청)

      - 문산재: 문산재는 왕인박사가 8살 때까지 이곳에서 수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영암군청)

      - 상대포: 백제시대 때, 국제무역항으로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도일하실 때 이 곳 상대포에서 배를타고 일본으로 떠나셨다 지금은 간척지 사업과 영산강 개발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고 조그만한 호수와 정자만 세워져 있다.

      - 성천: 왕인박사 탄생지에서 계곡 50미터 정도 들어가면 조그만 샘이 있다. 이 샘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성인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신성한 샘으로 여긴다.

      - 왕인석상: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모습의 왕인석상은 높이가 2.75m정도로 왕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하며 만들어 세웠다고 전해진다. 석상은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던 돌정고개와 상대포를 내려다보고 있다.

      - 책굴: 왕인석상 옆에는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만한 입구에 네댓평 정도의 평평한 바닥을 가진 자연 동굴이 있다. 왕인박사가 책을 쌓아두고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이 책굴로 불리고 있다. (출처: 영암군청)

      - 학이문: 학이문은 왕인박사께서 도일시 논어를 가지고 가셨는데 논어책 첫편에 학이편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또 이 문은 안에 있다하여 내삼문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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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정: 왕인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375-384년)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시어 유학과 경전을...

      - 영정: 왕인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375-384년)때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탄생하였다. 8세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시어 유학과 경전을 수학하고, 문장이 뛰어나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이무렵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태였으며 17대 아신왕은 지금의 일본인 왜와 수교를 맺고 태자전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왜왕 응신은 백제의 태자전지가 도왜한지 7년만에 백제의 태자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 보내면서 훌륭한 학자를 청하였다. 백제 17대 아신왕때에 왕인은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당시 왕인은 32세 이었으며, 상대포는 국제 무역항으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 때에도 이 곳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해오고 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 들이 큰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飛鳥)문화와 나라(奈良)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 경제와 문화 예술을 꽃피웠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오사카(大阪府) 히라카타(枚方)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대판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정화하여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양력 4월 초에 왕인박사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출처 : 영암군청)

      - 탄생지: 왕인유적지 오른쪽 기슭이 왕인이 태어났다는 성기동이다. 그 중 한바위에 ‘옛 최씨원으로 지 금조가장이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기념정화비: 이 비는 정화사업을 기념한 비로 정화사업 추진내역이 기록되어있다. 이 비는 일본 동경에 있는 왕인라이온스클럽에서 세웠다. 정화기념비 앞에 놓여진 책한권은 천자문책이고 양쪽에 다섯권, 다섯권은 논어 10권을 뜻한다. 그리고 동그란 원은 북을 뜻한다.
      ① 덕건명립(德建名立): 올바른 일을 행하여 그 이름이 아름답게 나타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는 뜻
      ② 형단표정(形端表正) : 사람의 외모가 단정하면 마음씨도 고우며 무엇이든 바르게 보인다는 뜻
      ③ 책공무실(策功茂實) : 공을 도모함에 무성하고, 충실하였다.
      ④ 늑비각명(勒碑刻銘) : 살아서 공을 많이쌓은 사람은 죽은다음에도 시석에 그 공을 기린다. (출처: 영암군청)

      - 문산재: 문산재는 왕인박사가 8살 때까지 이곳에서 수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영암군청)

      - 상대포: 백제시대 때, 국제무역항으로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도일하실 때 이 곳 상대포에서 배를타고 일본으로 떠나셨다 지금은 간척지 사업과 영산강 개발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고 조그만한 호수와 정자만 세워져 있다.

      - 성천: 왕인박사 탄생지에서 계곡 50미터 정도 들어가면 조그만 샘이 있다. 이 샘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성인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신성한 샘으로 여긴다.

      - 왕인석상: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은 모습의 왕인석상은 높이가 2.75m정도로 왕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하며 만들어 세웠다고 전해진다. 석상은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던 돌정고개와 상대포를 내려다보고 있다.

      - 책굴: 왕인석상 옆에는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만한 입구에 네댓평 정도의 평평한 바닥을 가진 자연 동굴이 있다. 왕인박사가 책을 쌓아두고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이 책굴로 불리고 있다. (출처: 영암군청)

      - 학이문: 학이문은 왕인박사께서 도일시 논어를 가지고 가셨는데 논어책 첫편에 학이편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또 이 문은 안에 있다하여 내삼문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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