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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정체성 변화와 천도 = Transfer of the Cpaital and Changes in the Identity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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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854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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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백제는 부여계의 건국세력과 마한계의 피지배세력으로 이루어진 이중적(二重的)주민구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 부여계의 건국세력은 동명묘(東明廟)를 숭배하며 부여계임을 지켰고, 마한계 피지배세력은 백제의 직접지배가 4세기 후반까지 오늘날 충남 일부 지역까지만 미쳤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의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났다. 남천(南遷)이후 백제내에서 동명신앙이 쇠퇴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원인으로 백제의 도성이 한강지역에서 웅진으로 옮겨졌다는 점을 고려 할 수 있다. 이때 웅진은 백제의 직접지배가 된지 불과 1백여 년 밖에 되지 않았기에 백제 지배세력의 정체성이 전파되기에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한계 피지배세력은 백제의 천도 이후 백제의 중심세력으로 포함 되었다. 즉 건국집단의 부여계 정체성이 약해지고, 마한계가 중심세력으로 편입되면서 백제가 부여계의 국가가 아닌 마한계 국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백제의 첫 번째 도성이었던 한성(漢城)은 방어와 경제력이 중시되어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도성인 웅진(熊津)은 좁은 지형 때문에 인적 · 물적 자원이 확보가 힘든 임시적 성격을 띤 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4세기 후반까지 백제의 직접적 지배가 오늘날 충남 일부 지역까지였기 때문에 웅진 이남의 지역으로 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도성인 사비(泗?)는 금강이 방어선을 형성해주고 평야가 인접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역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사비로의 천도는 백제 중앙 지배세력의 마한계 중심지였던 익산으로의 접근이며, 마한 세력의 융합을 다분히 염두에 둔 정치적 조치와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백제의 웅진과 사비로의 천도는 군사적, 지리적 요소 또는 지역 세력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정체성 변화와 더불어 부여계와 마한계의 융합(融合) 차원까지 고려된 천도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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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는 부여계의 건국세력과 마한계의 피지배세력으로 이루어진 이중적(二重的)주민구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 부여계의 건국세력은 동명묘(東明廟)를 숭배하며 부여계임을 지켰고, 마한계 ...

      백제는 부여계의 건국세력과 마한계의 피지배세력으로 이루어진 이중적(二重的)주민구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 부여계의 건국세력은 동명묘(東明廟)를 숭배하며 부여계임을 지켰고, 마한계 피지배세력은 백제의 직접지배가 4세기 후반까지 오늘날 충남 일부 지역까지만 미쳤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의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났다. 남천(南遷)이후 백제내에서 동명신앙이 쇠퇴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원인으로 백제의 도성이 한강지역에서 웅진으로 옮겨졌다는 점을 고려 할 수 있다. 이때 웅진은 백제의 직접지배가 된지 불과 1백여 년 밖에 되지 않았기에 백제 지배세력의 정체성이 전파되기에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한계 피지배세력은 백제의 천도 이후 백제의 중심세력으로 포함 되었다. 즉 건국집단의 부여계 정체성이 약해지고, 마한계가 중심세력으로 편입되면서 백제가 부여계의 국가가 아닌 마한계 국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백제의 첫 번째 도성이었던 한성(漢城)은 방어와 경제력이 중시되어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도성인 웅진(熊津)은 좁은 지형 때문에 인적 · 물적 자원이 확보가 힘든 임시적 성격을 띤 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4세기 후반까지 백제의 직접적 지배가 오늘날 충남 일부 지역까지였기 때문에 웅진 이남의 지역으로 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도성인 사비(泗?)는 금강이 방어선을 형성해주고 평야가 인접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역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사비로의 천도는 백제 중앙 지배세력의 마한계 중심지였던 익산으로의 접근이며, 마한 세력의 융합을 다분히 염두에 둔 정치적 조치와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백제의 웅진과 사비로의 천도는 군사적, 지리적 요소 또는 지역 세력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정체성 변화와 더불어 부여계와 마한계의 융합(融合) 차원까지 고려된 천도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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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BAEKJE was comprised of people of BUYEO extraction, namely the ruling class, and people of MAHAN extraction, i.e., subjugated class. The ruling class runs in its blood, inheriting the culture of KING DONGMYEONG. Even though they could keep from their roots, the ruling class did not extend all over the country. They only extended to the southwest of the Central Korean Peninsula by the late 4th century.
      After invasion of KING KWANGGAETO, BAEKJE began to decline in national power and lost their pride. The death of KING KWANGGAETO and loss of authority situations led decaying in the inherited culture of KING DONGMEONG. The sudden capital movement from the HAN River to UNGJIN was the transition point of BAEKJE. However, UNGJIN was even not ready to be under BAEKJE. UNGJIN had been only one hundreds year under the rule of BAEKJE, so the culture, political belief, custom of UNGJIN was not identical with BAEKJE.
      In the meantime, MAHAN extraction began to be a part of central force of BAEKJE. The established group of people gained the country area that was made after transfer to South, and culture and characteristic of BUYEO extraction was weaken by the previous situation. Moreover, the situation led the various residents’ tradition and culture of MAHAN to be considered, and made the country impossible to manage.
      The first capital, HANSEONG, was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country. It was likely to be focused on defense and economic development. The second capital, UNGJIN, was a temporary place in case of emergency. It refers to the situation, which is BAEKJE extended control area to a location south of UNGJIN by the late of 4th century. That is the reason why a new capital was replaced with UNGJIN. The third capital, SABI, was advantageous for economic development. GEUM River formed a defense line, and it was close to the plain area. Moreover, the capital’s being moved to SABI led to access to IKSAN, home to people of MAHAN extraction, which may be defined as a political ground work to integrate people of MAHAN extraction.
      Consequently, BAEKJE’s transferred its capital to UNGJIN and SABI, was because of military and topographical factors, relationships with local forces. Simultaneously, changes in its identity and the integration of the two powers between BUYEO and MAHAN extraction continuously made MAHAN stronger as a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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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EKJE was comprised of people of BUYEO extraction, namely the ruling class, and people of MAHAN extraction, i.e., subjugated class. The ruling class runs in its blood, inheriting the culture of KING DONGMYEONG. Even though they could keep from their ...

      BAEKJE was comprised of people of BUYEO extraction, namely the ruling class, and people of MAHAN extraction, i.e., subjugated class. The ruling class runs in its blood, inheriting the culture of KING DONGMYEONG. Even though they could keep from their roots, the ruling class did not extend all over the country. They only extended to the southwest of the Central Korean Peninsula by the late 4th century.
      After invasion of KING KWANGGAETO, BAEKJE began to decline in national power and lost their pride. The death of KING KWANGGAETO and loss of authority situations led decaying in the inherited culture of KING DONGMEONG. The sudden capital movement from the HAN River to UNGJIN was the transition point of BAEKJE. However, UNGJIN was even not ready to be under BAEKJE. UNGJIN had been only one hundreds year under the rule of BAEKJE, so the culture, political belief, custom of UNGJIN was not identical with BAEKJE.
      In the meantime, MAHAN extraction began to be a part of central force of BAEKJE. The established group of people gained the country area that was made after transfer to South, and culture and characteristic of BUYEO extraction was weaken by the previous situation. Moreover, the situation led the various residents’ tradition and culture of MAHAN to be considered, and made the country impossible to manage.
      The first capital, HANSEONG, was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country. It was likely to be focused on defense and economic development. The second capital, UNGJIN, was a temporary place in case of emergency. It refers to the situation, which is BAEKJE extended control area to a location south of UNGJIN by the late of 4th century. That is the reason why a new capital was replaced with UNGJIN. The third capital, SABI, was advantageous for economic development. GEUM River formed a defense line, and it was close to the plain area. Moreover, the capital’s being moved to SABI led to access to IKSAN, home to people of MAHAN extraction, which may be defined as a political ground work to integrate people of MAHAN extraction.
      Consequently, BAEKJE’s transferred its capital to UNGJIN and SABI, was because of military and topographical factors, relationships with local forces. Simultaneously, changes in its identity and the integration of the two powers between BUYEO and MAHAN extraction continuously made MAHAN stronger as a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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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백제의 지배력 확장과 정체성 변화
      • 3. 백제의 천도와 그 의미
      • 4. 맺음말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백제의 지배력 확장과 정체성 변화
      • 3. 백제의 천도와 그 의미
      • 4.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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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北史"

      2 이익섭, "한국언어지도" 태학사 2008

      3 권오영,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2003

      4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5 이한상,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2009

      6 朴漢濟, "역사와 도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7 김기흥,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실체" 인문학연구원 61 : 371-401, 2015

      8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9 김수태, "백제의 천도" 한국고대사학회 36 : 19-64, 2004

      10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1 "北史"

      2 이익섭, "한국언어지도" 태학사 2008

      3 권오영,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2003

      4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5 이한상,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2009

      6 朴漢濟, "역사와 도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7 김기흥,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실체" 인문학연구원 61 : 371-401, 2015

      8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9 김수태, "백제의 천도" 한국고대사학회 36 : 19-64, 2004

      10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11 임영진, "백제의 영역 변천" 주류성 2006

      12 성정용, "백제와 영산강" 학연문화사 2012

      13 이남석,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2007

      14 이남석, "백제문화 국제학술 세미나 특집 : 웅진시대 백제문화의 재조명 / 웅진지역 백제유적의 존재의미 - 백제의 웅진천도와 관련하여 -" 백제문화연구소 (26) : 25-52, 1997

      15 강종원, "백제 국가권력의 확산과 지방" 서경문화사 2012

      16 장미애, "무왕의 세력기반으로서 익산의 위상과 의미" 한국고대사학회 (60) : 159-196, 2010

      17 임영진, "묘제를 통해 본 마한의 지역성과 변천과정 –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백제학회 (3) : 2010

      18 "魏書"

      19 "高麗史"

      20 이남석, "考古學資料를 통한 百濟 泗沘遷都의 再認識" 백제문화연구소 2 (2): 61-85, 2010

      21 崔完奎, "益山의 先史와 古代文化"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1

      22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 대구사학회 11 : 1976

      23 李基東, "百濟史硏究" 一潮閣 1996

      24 金周成, "百濟 사비時代 政治史 硏究" 全南大學校 大學院 1990

      25 近藤浩一, "扶餘 陵山里 羅城築造 木簡의 硏究" 백제연구소 (39) : 85-129, 2004

      26 尹善泰, "扶餘 陵山里 出土 百濟 木簡의 再檢討" 東國史學會 40 : 2004

      27 李炳鎬, "扶餘 陵山里 出土 木簡의 性格" 한국목간학회 1 : 2008

      28 "孟子"

      29 朴仲煥, "夫餘 陵山里發掘 木簡 豫報" 한국고대사학회 28 : 2002

      30 "周書"

      31 "三國志"

      32 "三國史記"

      33 金英心, "5~6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2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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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27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통일인문학논총 -> 통일인문학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1-03-23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인문학논총 -> 통일인문학논총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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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4 0.84 0.8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4 0.89 1.222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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