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 한 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하류지역이 점차 고구려 문화 분포의 핵심적인 지역으로 되었다. 이 지역에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석실묘가 분포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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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153-18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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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 한 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하류지역이 점차 고구려 문화 분포의 핵심적인 지역으로 되었다. 이 지역에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석실묘가 분포하고 ...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 한 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하류지역이 점차 고구려 문화 분포의 핵심적인 지역으로 되었다. 이 지역에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석실묘가 분포하고 있으며 묘장 형식도 일치해지고 있다. 구체적인 양상이 묘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으로 띄고 있고. 묘실의 벽이 수직으로 되어있으며, 천정은 2층이나 3층의 평형 抹角疊??구조로 되고 있으며, 平行疊??과 抹角疊?? 2층 형식이 대다수 이다. 東潮의 연구 과정에서 무덤의 공통성을 주목하고 있으며 이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무덤이“平壤型石室”과“平壤型亞型”으로 구분하고 있고, 그의 분포범위에 따라 고구려 왕기 범위에 대표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우리가 이런 형식의 무덤이 완전의미의 고구려 봉토 석실묘로 칭한다. 연구결과를 보면 이런 봉토석실묘의 대부분의 연대는 6세기이며, 일부의 상한 연대는 5세기 후엽이다. 대동강하류 봉토석실묘형태는 일치해지고 있는데, 이 시기에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구려 봉토석실묘로 사후 매장방식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같은 의식이 가지고 있으면 서북한 지역에서 비교적 안정된 고구려 사회 양상을 확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왕이 金字塔정점 일 때는 고구려정권제도와 건설이 완성 된 것을 상징한다. 이런 양상 후에 같지 않은 무덤 사이에 현저히 규모차이가 나타나며, 뿐만 아니라 같지 않은 무덤이 같지 않은 사회계층과 대응하고 있다. 고구려 봉토 석실묘 등급과 무덤주인의 신분 검토를 통해 우리가 6-7세기 고구려 사회의 등급제도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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