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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관료 박중양과 조선통치 = Park Jung-Yang, a Pro-Japanese Government Official, and the Rule over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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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487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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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is paper, the trail of Park Jung-yang's life was traced and his consciousness and acts as a pro-Japanese government official were examined. He gained Japan's trust by studying in Japan and joining the army in the Russo-Japanese War, which helped him to step on the fast track as a government official. After he was chosen as a governor of Daegu by Ito Hirobumi in 1906, he was served as a provincial governor for 3 years and 3 months. Working as a provincial government official in the days of Daehan Empire, he proved his loyalty to Japan by taking the initiative in introducing Japanese system and facilities with the slogan of reforming what's old into what's new(革舊改新), representing the interests of Japanese in Korea and cooperating in suppressing the voluntary troops in resistance against Japan. During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he organized a refrain club in Daegu and led the oppression of the movement by making use of his experience of crackdown on the anti-Japan troops as a governor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With his steadfast loyalty to Japan, he could get quick promotions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return to his governmental office after two failures in promotion because of a woman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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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is paper, the trail of Park Jung-yang's life was traced and his consciousness and acts as a pro-Japanese government official were examined. He gained Japan's trust by studying in Japan and joining the army in the Russo-Japanese War, which helped ...

      In this paper, the trail of Park Jung-yang's life was traced and his consciousness and acts as a pro-Japanese government official were examined. He gained Japan's trust by studying in Japan and joining the army in the Russo-Japanese War, which helped him to step on the fast track as a government official. After he was chosen as a governor of Daegu by Ito Hirobumi in 1906, he was served as a provincial governor for 3 years and 3 months. Working as a provincial government official in the days of Daehan Empire, he proved his loyalty to Japan by taking the initiative in introducing Japanese system and facilities with the slogan of reforming what's old into what's new(革舊改新), representing the interests of Japanese in Korea and cooperating in suppressing the voluntary troops in resistance against Japan. During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he organized a refrain club in Daegu and led the oppression of the movement by making use of his experience of crackdown on the anti-Japan troops as a governor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With his steadfast loyalty to Japan, he could get quick promotions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return to his governmental office after two failures in promotion because of a woman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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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박중양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의 친일관료로서의 의식과 행동을 밝혔다. 박중양은 일본유학, 러일전쟁 종군을 통해서 일본의 신뢰를 획득해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1904년 귀국하여 1906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대구 군수로 발탁되었다가 1907년부터 3년 3개월 동안 관찰사로 재직했다. 대한제국 시절 박중양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革舊改新을 구호로 일본의 제도와 시설을 도입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재한일본인의 이해를 대변하고 의병탄압에 협력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했다. 3.1운동 때에는 경북관찰사 시절의 의병 선유 활동 경험을 살려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에 대한 철저한 충성심으로 관료로서 고속 승진할 수 있었고 여성문제로 두차례 낙마한 후에도 다시 관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박중양은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의 시정방침과 산업정책에 따라 도작 개량, 뽕나무 보급, 도로 개수 등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사업들을 강제적으로 시행해 조선인의 많은 반발을 샀지만 ‘민도’가 낮은 조선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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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에서는 박중양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의 친일관료로서의 의식과 행동을 밝혔다. 박중양은 일본유학, 러일전쟁 종군을 통해서 일본의 신뢰를 획득해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

      본고에서는 박중양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의 친일관료로서의 의식과 행동을 밝혔다. 박중양은 일본유학, 러일전쟁 종군을 통해서 일본의 신뢰를 획득해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1904년 귀국하여 1906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대구 군수로 발탁되었다가 1907년부터 3년 3개월 동안 관찰사로 재직했다. 대한제국 시절 박중양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革舊改新을 구호로 일본의 제도와 시설을 도입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재한일본인의 이해를 대변하고 의병탄압에 협력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했다. 3.1운동 때에는 경북관찰사 시절의 의병 선유 활동 경험을 살려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에 대한 철저한 충성심으로 관료로서 고속 승진할 수 있었고 여성문제로 두차례 낙마한 후에도 다시 관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박중양은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의 시정방침과 산업정책에 따라 도작 개량, 뽕나무 보급, 도로 개수 등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사업들을 강제적으로 시행해 조선인의 많은 반발을 샀지만 ‘민도’가 낮은 조선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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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도형, "한말 경북지역의 近代敎育과 儒敎" (10) : 1999

      2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99인 1" 돌베개 1993

      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2009

      4 조지훈, "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 나남출판 1996

      5 한긍희,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도지사 임용정책과 양상" 역사문제연구소 13 (13): 109-143, 2009

      6 동선희, "조선총독부 통치구조 하에서의 道 및 道知事의 기능과 역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

      7 박은경,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 학민사 1999

      8 김원도, "일제강점기 조선인 도지사 연구" 경성대학교 2018

      9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농업"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4

      10 송지연, "러일전쟁이후 일제의 軍用地 收用과 한국민의 저항 : 서울(용산), 평양, 의주를 중심으로" (30) : 1997

      1 김도형, "한말 경북지역의 近代敎育과 儒敎" (10) : 1999

      2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99인 1" 돌베개 1993

      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2009

      4 조지훈, "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 나남출판 1996

      5 한긍희,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도지사 임용정책과 양상" 역사문제연구소 13 (13): 109-143, 2009

      6 동선희, "조선총독부 통치구조 하에서의 道 및 道知事의 기능과 역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

      7 박은경, "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 학민사 1999

      8 김원도, "일제강점기 조선인 도지사 연구" 경성대학교 2018

      9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농업"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4

      10 송지연, "러일전쟁이후 일제의 軍用地 收用과 한국민의 저항 : 서울(용산), 평양, 의주를 중심으로" (30) : 1997

      11 김윤희, "러일전쟁기 일본군 협력 한인 연구-일본정부의 훈포상자를 중심으로-" 고려사학회 (35) : 295-328, 2009

      12 대구상공회의소, "대구상공회의소 70년사 상권" 대구상공회의소 1977

      13 박중양, "述懷" 자가출판

      14 森山茂德, "近代日韓關係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87

      15 岡本眞希子, "總督政治と政党政治-二大政党期の總督人事と總督府官制·予算" 38 : 2000

      16 稲葉継雄, "李軫鎬研究-朝鮮総督府初の朝鮮人学務局長の軌跡" (6) : 2006

      17 藤本修三, "朴重陽について" (4) : 2002

      18 古庄逸夫, "朝鮮統治回想錄" 자가출판 1962

      19 佐々木隆爾, "朝鮮における日本帝国主義の養蚕業政策-第1次大戦期を中心に-" (114) : 1976

      20 松田利彦, "日本の朝鮮植民地支配と警察 一九〇五~一九四五年" 校倉書房 2009

      21 淺井良純, "日帝侵略初期における朝鮮人官吏の形成について-大韓帝国官吏出身者を中心に" (155) : 1995

      22 伊藤之雄, "伊藤博文をめぐる日韓關係 : 韓國統治の夢と挫折, 1905~1921" ミネルヴァ書房 2011

      23 山口盛, "わが七十七年の歩み" 自家版 1971

      24 김일수, "‘한일병합’ 이전 대구의 일본인거류민단과 식민도시화" 한국학연구원 (59) : 253-283, 2015

      25 이형식, "‘조선의 전기왕’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조선사회" 동양사학회 (145) : 171-211, 2018

      26 이양희, "3·1운동기 일제의 한국인 자위단체 조직과 운용" 한국근현대사학회 (83) : 173-204, 2017

      27 윤주한, "3·1운동기 自制團의 등장과 활동" 한양대학교 대학원 2017

      28 김일수, "3·1운동 전후 독립에 대한 인식과 독립운동 –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회 (38) : 67-100, 2018

      29 이영학,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 한국학연구소 (36) : 549-58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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