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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일반논문 : 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 대응과 후대의 기억 = The Responses to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8 and Memories of the War in the Region of Changn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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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으므로 침입과 약탈을 일찍부터 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창녕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토성(土姓)들은 전쟁 초기부터 의병을 조직·활동했으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재지사족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창녕 지역 의병운동의 한 특징이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있었던 창녕과 영산전투는 경상우도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의 지원, 창녕과 영산 지역 의병들의 참여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창녕에서는 성씨(成氏)와 조씨(曺氏), 영산에서는 신씨(辛氏) 가문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곽재우의 의병과 연합해 싸웠다. 지역의 지리에 밝은 의병들은 박진, 박곡 등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청야책(淸野策)에 따라 인근 고을 민을 동원하여 화왕산성을 쌓아 대비했는데, 농성전(籠城戰)으로 큰 전투 없이 수성(守城)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에서의 피난과 포로의 모습은 전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주목된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부역(附逆)한 영산인 공휘겸(孔□謙)이 있었다. 포로가 된 이진영(李眞榮)은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군에 끌려가 일본의 와가야마(和歌山)에서 살았다. 또 영산(靈山)에서 포로가 되어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피난의 경우 영산의 이석경(李碩慶)은 영산이 요충지에 위치하므로 난을 면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 거창으로 피난했다가 친구 정구(鄭逑)가 부사로 있던 강릉(江陵)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159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명(明)의 군사가 왕래하여 마을이 소란하자 현풍현 가태산(嘉泰山)에 셋집을 얻어 살았다. 1597년에는 곽재우와 군사 일을 의논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후 다시 관동(關東)으로 갔다. 1599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냉천정(冷泉亭) 아래로 이주하였다. 한편 창녕으로 피난 온 경우는 양산의 정승우(鄭承雨)가 일본군에 잡혀서 히젠(肥前)으로 팔려갔다가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산현에 와서 살았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기억의 재생을 국가 유지에 이용하였다. 창녕에서는 많은 인물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열녀에 선정되어 정문(旌門)을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숙종 연간에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서 연암서원(燕巖書院)과 물계서원(勿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있었던 화왕산성의 수성은 조선후기 경상도의 남인에게는 이념적 구심점이 되었으므로 영조 연간에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이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녕 지역의 인사로 명단이 올라 있는 인물들은 화왕산성과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실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활약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창녕 지역의 열녀수는 영산 1건, 창녕 9건으로 영산보다 창녕 지역에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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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으므로 침입과 약탈을 일찍부터 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창녕 지역의 재지사족...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으므로 침입과 약탈을 일찍부터 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창녕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토성(土姓)들은 전쟁 초기부터 의병을 조직·활동했으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재지사족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창녕 지역 의병운동의 한 특징이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있었던 창녕과 영산전투는 경상우도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의 지원, 창녕과 영산 지역 의병들의 참여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창녕에서는 성씨(成氏)와 조씨(曺氏), 영산에서는 신씨(辛氏) 가문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곽재우의 의병과 연합해 싸웠다. 지역의 지리에 밝은 의병들은 박진, 박곡 등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청야책(淸野策)에 따라 인근 고을 민을 동원하여 화왕산성을 쌓아 대비했는데, 농성전(籠城戰)으로 큰 전투 없이 수성(守城)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에서의 피난과 포로의 모습은 전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주목된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부역(附逆)한 영산인 공휘겸(孔□謙)이 있었다. 포로가 된 이진영(李眞榮)은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군에 끌려가 일본의 와가야마(和歌山)에서 살았다. 또 영산(靈山)에서 포로가 되어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피난의 경우 영산의 이석경(李碩慶)은 영산이 요충지에 위치하므로 난을 면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 거창으로 피난했다가 친구 정구(鄭逑)가 부사로 있던 강릉(江陵)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159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명(明)의 군사가 왕래하여 마을이 소란하자 현풍현 가태산(嘉泰山)에 셋집을 얻어 살았다. 1597년에는 곽재우와 군사 일을 의논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후 다시 관동(關東)으로 갔다. 1599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냉천정(冷泉亭) 아래로 이주하였다. 한편 창녕으로 피난 온 경우는 양산의 정승우(鄭承雨)가 일본군에 잡혀서 히젠(肥前)으로 팔려갔다가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산현에 와서 살았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기억의 재생을 국가 유지에 이용하였다. 창녕에서는 많은 인물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열녀에 선정되어 정문(旌門)을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숙종 연간에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서 연암서원(燕巖書院)과 물계서원(勿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있었던 화왕산성의 수성은 조선후기 경상도의 남인에게는 이념적 구심점이 되었으므로 영조 연간에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이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녕 지역의 인사로 명단이 올라 있는 인물들은 화왕산성과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실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활약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창녕 지역의 열녀수는 영산 1건, 창녕 9건으로 영산보다 창녕 지역에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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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From the beginning of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壬辰倭亂) the region around Changnyeong(昌寧) was under attack and plundered by the Japanese troops for its strategic point of both attacking and transportation route. In response to that, however, sooner or later, the voluntary corps which were led by Jaejisajok(在地士族) and Toseong(土姓) who were made up of Changnyeong Seong(成氏), Jo(曺氏), and Yeongsan Sin(辛氏) clans by and large were established and brought into practice. Moreover, thanks to support and assault of a group of militias led by Gwak Jaewoo(郭再祐) who stood up against the Japanese army and entered into the war in the western Gyeongsang province, especially Uiryeong(宜寧), they came to succeed in defeating the invaders. On the other hand, Kim Seongil(金誠一) who was appointed the Choyusa(招諭使) at that time supported their resistance by gathering a party of rest of Jaejisajoks around this region, and that is the characteristic of campaign of voluntary corps in this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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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the beginning of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壬辰倭亂) the region around Changnyeong(昌寧) was under attack and plundered by the Japanese troops for its strategic point of both attacking and transportation route. In response to th...

    From the beginning of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壬辰倭亂) the region around Changnyeong(昌寧) was under attack and plundered by the Japanese troops for its strategic point of both attacking and transportation route. In response to that, however, sooner or later, the voluntary corps which were led by Jaejisajok(在地士族) and Toseong(土姓) who were made up of Changnyeong Seong(成氏), Jo(曺氏), and Yeongsan Sin(辛氏) clans by and large were established and brought into practice. Moreover, thanks to support and assault of a group of militias led by Gwak Jaewoo(郭再祐) who stood up against the Japanese army and entered into the war in the western Gyeongsang province, especially Uiryeong(宜寧), they came to succeed in defeating the invaders. On the other hand, Kim Seongil(金誠一) who was appointed the Choyusa(招諭使) at that time supported their resistance by gathering a party of rest of Jaejisajoks around this region, and that is the characteristic of campaign of voluntary corps in this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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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龍蛇日錄"

    2 "嶺南古文書集成"

    3 "亂中雜錄" 1982

    4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 지역과 역사 (31) : 5 ~ 40, 2012

    5 鄭萬祚, "조선후기 서원연구" 집문당, 1997

    6 박주, "조선시대의 여성과 유교문화" 국학자료원, 2006

    7 이형석, "임진전란사 상~하" 임진왜란사간행위원회, 1974

    8 서인한, "임진전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9 김강식, "임진왜란과 경상우도의 의병운동" 혜안, 2001

    10 하영휘,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1 "龍蛇日錄"

    2 "嶺南古文書集成"

    3 "亂中雜錄" 1982

    4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 지역과 역사 (31) : 5 ~ 40, 2012

    5 鄭萬祚, "조선후기 서원연구" 집문당, 1997

    6 박주, "조선시대의 여성과 유교문화" 국학자료원, 2006

    7 이형석, "임진전란사 상~하" 임진왜란사간행위원회, 1974

    8 서인한, "임진전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9 김강식, "임진왜란과 경상우도의 의병운동" 혜안, 2001

    10 하영휘,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11 정홍준, "임진왜란 전후 통치체제의 정비과정" 규장각 (11), 1988

    12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의 산성 축조와 전투" 지역과 역사 (33) : 65 ~ 95, 2013

    13 정해은,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 사족의 전쟁 체험-함양 양반 정경운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64) : 65 ~ 100, 2007

    14 임란호국영남추의단보존회, "임진영남의병사" 보문사, 2001

    15 박병련, "남명학파와 영남우도의 사림" 예문서원, 2004

    16 "鶴峯全集"

    17 "靑莊館全書"

    18 李章熙, "郭在祐硏究" 養英閣, 1983

    19 金潤坤, "郭再祐의 義兵活動-特히 組織의 過程과 戰術·戰略을 中心으로-" 歷史學報 (33), 1967

    20 貫井正之, "郭再佑-抵抗とその生涯-" 朝鮮學報 (83), 1977

    21 "輿志集成"

    22 "燃藜室記述"

    23 "火旺入城同苦錄"

    24 "東國新續三綱行實圖"

    25 朴珠, "朝鮮時代의 旌表政策" 일조각, 1990

    26 姜祥澤, "朝鮮後期 昌寧地域의 書院과 役割" 釜大史學 (19), 1995

    27 池內宏, "文祿慶長の役" 吉川弘文館, 1936

    28 "懲毖錄"

    29 "忘憂集"

    30 金康植,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運動과 政治的 役割" 南冥學硏究 (5), 1996

    31 "嶠南誌" 1985

    32 강문식, "實錄을 통해 본 郭再祐(1552~1617)의 義兵 활동" 규장각 (33) : 95 ~ 121, 2008

    33 "宣祖實錄"

    34 "宣祖修正實錄"

    35 "孤臺日錄"

    36 "大日本古文書"

    37 許善道, "壬辰倭亂의 克服과 嶺右義兵-그 戰略的 意義를 中心으로-" 晉州文化 (4), 1983

    38 "倡義錄"

    39 "『邑誌』 慶尙道"

    40 김강식, "16세기 南冥學派의 義理 인식과 郭再祐의 義兵運動" 釜山史學 (40·4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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