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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암 이종일과 동학, 천도교, 그리고 3ㆍ1독립만세운동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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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176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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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묵암(默菴)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인 역할과 그의 동학-천도교-3.1운동 계승관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묵암이 3.1만세운동의 가장 핵심인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개설서들에서는 ‘인쇄, 배포’ 과정에서의 역할만을 기술함으로써 역할을 애써 축소하였으며, 천도교의 역할 또한 사상사 차원에서는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규명하였다. 첫째, 1919년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주의나 고종의 붕어 등 우연과 외재적 변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묵암을 비롯한 천도교의 줄기찬, 그리고 철두철미한 준비의 결과이며, 특히 묵암은 일제강점이 시작되는 1910년부터 줄곧 독립을 위한 대규모 민중봉기를 지향/준비/시도해온 결과로서 마침내 1919년의 3.1운동을 귀결한 것이다. 둘째, 묵암은 3.1만세운동 당시 보성사 사장으로서 단순히 33인의 일인으로서 인쇄와 배포만 한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 조직화는 물론 현장 낭독 및 현장 선언문 살포 및 구호 선창 등의 주역이기도 하며, 가담자들 중 가장 중형을 받은 사람에 속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오직 제2, 제3의 3.1민중시위를 구상하여 실제 출옥하자마자 시위운동을 주도, 이후 결국은 감시 속에서 감금당하다시피 하여 아사하였다. 셋째,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는 3.1독립만세운동을 1894년의 동학혁명과 동학전쟁의 계승 및 동학의 1904년 갑진개혁의 계승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3.1운동은 우리 민족 역사나 사상사에서 단절된 어떤 것이 아니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과 이것의 더욱 대중적 형태인 천도교의 전통을 당대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인식,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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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묵암(默菴)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인 역할과 그의 동학-천도교-3.1운동 계승관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묵암이 3.1만세운동의 가장 핵심인사...

      이 논문은 묵암(默菴)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인 역할과 그의 동학-천도교-3.1운동 계승관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묵암이 3.1만세운동의 가장 핵심인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개설서들에서는 ‘인쇄, 배포’ 과정에서의 역할만을 기술함으로써 역할을 애써 축소하였으며, 천도교의 역할 또한 사상사 차원에서는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규명하였다. 첫째, 1919년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주의나 고종의 붕어 등 우연과 외재적 변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묵암을 비롯한 천도교의 줄기찬, 그리고 철두철미한 준비의 결과이며, 특히 묵암은 일제강점이 시작되는 1910년부터 줄곧 독립을 위한 대규모 민중봉기를 지향/준비/시도해온 결과로서 마침내 1919년의 3.1운동을 귀결한 것이다. 둘째, 묵암은 3.1만세운동 당시 보성사 사장으로서 단순히 33인의 일인으로서 인쇄와 배포만 한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 조직화는 물론 현장 낭독 및 현장 선언문 살포 및 구호 선창 등의 주역이기도 하며, 가담자들 중 가장 중형을 받은 사람에 속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오직 제2, 제3의 3.1민중시위를 구상하여 실제 출옥하자마자 시위운동을 주도, 이후 결국은 감시 속에서 감금당하다시피 하여 아사하였다. 셋째,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는 3.1독립만세운동을 1894년의 동학혁명과 동학전쟁의 계승 및 동학의 1904년 갑진개혁의 계승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3.1운동은 우리 민족 역사나 사상사에서 단절된 어떤 것이 아니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과 이것의 더욱 대중적 형태인 천도교의 전통을 당대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인식,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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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ore rol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by Mukam Lee Jong-il (1858-1925) and his view that it inherited the spirit of Donghak and Cheondogyo. Although Mukam was the cor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the existing rebooks reduced the role of Cheondogyo by describing only its role in the printing and distribution process, and the role of Cheondogyo was also not fully evaluated at the thought history level. The following points were identified in this paper. First,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was not caused by chance and external variables such as Wilson’s nationalism or the death of King Gojong but by the tenacity and thorough preparation of Cheondogyo, including rock and rock, and especially Mukam, which was the result of the massive popular uprising/preparation/attemptions for independence since 1910, when the Japanese colonial era began, finally returned to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Second, Mukam, the president of Boseongsa, a publishing company, during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not only printed and distributed, but was also the main figure in the preparation, organization, field reading, distribution of on-site declarations. And he was sentenced to the heaviest punishment among the participants and served the longest time in prison. And as soon as he was released from prison, he planned the 2nd and 3rd March 1st demonstrations and led the protest. More importantly, he recognized it as the succession of the Donghak Revolution, the Donghak War in 1894, and the Gabjin Reform in 1904. For him,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as not something that was cut off from the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or history of thought, but rather a practice of the Donghak and Cheondogyo tra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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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ore rol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by Mukam Lee Jong-il (1858-1925) and his view that it inherited the spirit of Donghak and Cheondogyo. Although Mukam was the core of the March 1 Indepen...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ore rol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by Mukam Lee Jong-il (1858-1925) and his view that it inherited the spirit of Donghak and Cheondogyo. Although Mukam was the cor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the existing rebooks reduced the role of Cheondogyo by describing only its role in the printing and distribution process, and the role of Cheondogyo was also not fully evaluated at the thought history level. The following points were identified in this paper. First,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was not caused by chance and external variables such as Wilson’s nationalism or the death of King Gojong but by the tenacity and thorough preparation of Cheondogyo, including rock and rock, and especially Mukam, which was the result of the massive popular uprising/preparation/attemptions for independence since 1910, when the Japanese colonial era began, finally returned to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Second, Mukam, the president of Boseongsa, a publishing company, during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not only printed and distributed, but was also the main figure in the preparation, organization, field reading, distribution of on-site declarations. And he was sentenced to the heaviest punishment among the participants and served the longest time in prison. And as soon as he was released from prison, he planned the 2nd and 3rd March 1st demonstrations and led the protest. More importantly, he recognized it as the succession of the Donghak Revolution, the Donghak War in 1894, and the Gabjin Reform in 1904. For him,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as not something that was cut off from the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or history of thought, but rather a practice of the Donghak and Cheondogyo tra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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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서론
      • Ⅱ. 자료와 관련하여
      • Ⅲ. 3ㆍ1운동과 묵암의 위상
      • Ⅳ. 묵암의 동학-천도교-3ㆍ1운동의 계승 논리와 성격
      • 국문초록
      • Ⅰ. 서론
      • Ⅱ. 자료와 관련하여
      • Ⅲ. 3ㆍ1운동과 묵암의 위상
      • Ⅳ. 묵암의 동학-천도교-3ㆍ1운동의 계승 논리와 성격
      • 1. 동학에 대한 묵암의 인식
      • 2. 천도교인(동학인)으로서의 실천관
      • Ⅴ. 결론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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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제국신문, 조선일보 1925.9.1"

      2 박걸순, "이종일.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7

      3 이현희, "의암 손병희와 3․1운동" 동학학회 (17) : 289-324, 2009

      4 김범수, "옥파 이종일선생 이야기" 창작시대 2009

      5 박춘석, "옥파 이종일" 태안향토문화연구소 2008

      6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암손병희선생전기"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1967

      7 김용덕, "북학사상과 동학" (16) : 1969

      8 성주현, "민중에게 다가간 독립운동가 이종일" 역사공간 2017

      9 심형준,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이종일의 상징화 사례 연구 -「묵암비망록」, 데마고기, 상징화 주체와 전략의 변화-" 한국종교학회 78 (78): 37-74, 2018

      10 임형진, "묵암 이종일과 3ㆍ1운동" 8 : 2009

      1 "제국신문, 조선일보 1925.9.1"

      2 박걸순, "이종일.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7

      3 이현희, "의암 손병희와 3․1운동" 동학학회 (17) : 289-324, 2009

      4 김범수, "옥파 이종일선생 이야기" 창작시대 2009

      5 박춘석, "옥파 이종일" 태안향토문화연구소 2008

      6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암손병희선생전기"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1967

      7 김용덕, "북학사상과 동학" (16) : 1969

      8 성주현, "민중에게 다가간 독립운동가 이종일" 역사공간 2017

      9 심형준,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이종일의 상징화 사례 연구 -「묵암비망록」, 데마고기, 상징화 주체와 전략의 변화-" 한국종교학회 78 (78): 37-74, 2018

      10 임형진, "묵암 이종일과 3ㆍ1운동" 8 : 2009

      11 이현희, "동학과 민족운동" 동학학회 9 (9): 189-211, 2005

      12 "동아일보 1925.9.1"

      13 정영희, "默菴 李鍾一의 近代敎育運動" 26 : 2004

      14 묵암기념사업회, "默菴 李鍾一先生 警世의 偉業과 生涯" 默菴紀念事業會 1979

      15 이현희, "默菴 李鍾一 先生 備忘錄(3)" (18) : 1981

      16 이현희, "默菴 李鍾一 先生 備忘錄(2)" (17) : 1979

      17 이현희, "默菴 李鍾一 先生 備忘錄" (16) : 1978

      18 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서문당 1920

      19 김용호, "沃坡李鍾一硏究: 新村情神, 先改情神의 提唱者" 敎學社 1984

      20 沃坡記念事業會, "沃坡李鍾一先生論說集 1,2,3" 敎學社 1984

      21 길창근, "沃坡 李鐘一의 敎育思想에 대한 考察" 9 (9): 2000

      22 전기영, "沃坡 李鍾一의 敎育思想" 5 : 1987

      23 박걸순, "沃坡 李鍾一의 思想과 民族運動" (9) : 1995

      24 옥파기념사업회, "沃坡 李鍾一의 思想과 民族獨立運動" 옥파기념사업회 1995

      25 沃坡記念事業會, "沃坡 李鍾一先生의 警世의 偉業과 生涯" 옥파기념사업 1995

      26 "張孝根日記" 성신여대 사범대 (1) : 1976

      27 이현희, "天道敎와 民衆運動: <默菴備忘錄>과 <東菴日記>를 중심으로" 63 : 1978

      28 이현희, "『默菴備忘錄』 解題" (78) : 1619

      29 정운현, "3ㆍ1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역사인 2019

      30 김창수, "3ㆍ1運動과 沃坡 李鍾一" 1995

      31 朴杰淳, "3ㆍ1 獨立宣言書 公約三章 起草者를 둘러싼 論議" (18) : 1994

      32 박찬승, "3․1독립선언서 인쇄과정과 판본의 검토" 동아시아문화연구소 (80) : 83-114, 2020

      33 李炳憲, "3·1運動祕史" 시사신보사 1959

      34 김삼웅, "33인의 약속" 산하 1997

      35 김홍주, "(구한말)선각자 옥파 이종일" 세광문화기획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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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12-23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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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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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 0.7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8 0.55 0.797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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