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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천석(吳天錫) 연보의 재구성: 미국 유학 후 조선 생활을 중심으로 = A Reconstruction of the Oh Chun-seok’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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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95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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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은 교육가이자 교육학자로 유명한 오천석의 생애에서, 오천석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후부터 8·15 해방 이전까지의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자서전에서 간략하게만 언급했거나 전혀 말하지 않은 부분을 밝힌 것이다. 오천석은 1932년 1월 귀국하여 동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35년 9월 사직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전공인 교육학 과목이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과 연구에 대한 아쉬움, 미국 박사를 우대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와 운영에 대한 불만 등으로 오천석의 보성전문학교 교수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한 뒤 오천석은 회사 임원으로 살아갔다. 처음에는 평양의 대표적인 유지로서 사업가이자 개신교 장로인 김동원이 설립한 태안양행에서 중역으로 일했다. 이후 다시 서울로 이주하여 평안도 출신 실업가 박흥식의 화신무역에서 영업과장으로 재직했다. 화신무역에 재직 중이던 1940년 12월-1941년 4월, 화신무역의 동남아 ‘진출’을 위해 남양 출장을 다녀왔으며, 『조광』 1941년 2-7월호에 「남양행」이라는 제목으로 기행문을 기고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42년 봄,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했다. 상하이에서도 임승업의 경화산업과 기타 조선인,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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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교육가이자 교육학자로 유명한 오천석의 생애에서, 오천석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후부터 8·15 해방 이전까지의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자서전에서 간략하게만 언급했...

      본 논문은 교육가이자 교육학자로 유명한 오천석의 생애에서, 오천석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후부터 8·15 해방 이전까지의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자서전에서 간략하게만 언급했거나 전혀 말하지 않은 부분을 밝힌 것이다. 오천석은 1932년 1월 귀국하여 동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35년 9월 사직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전공인 교육학 과목이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과 연구에 대한 아쉬움, 미국 박사를 우대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와 운영에 대한 불만 등으로 오천석의 보성전문학교 교수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한 뒤 오천석은 회사 임원으로 살아갔다. 처음에는 평양의 대표적인 유지로서 사업가이자 개신교 장로인 김동원이 설립한 태안양행에서 중역으로 일했다. 이후 다시 서울로 이주하여 평안도 출신 실업가 박흥식의 화신무역에서 영업과장으로 재직했다. 화신무역에 재직 중이던 1940년 12월-1941년 4월, 화신무역의 동남아 ‘진출’을 위해 남양 출장을 다녀왔으며, 『조광』 1941년 2-7월호에 「남양행」이라는 제목으로 기행문을 기고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42년 봄,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했다. 상하이에서도 임승업의 경화산업과 기타 조선인,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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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paper reveals what Oh Chun-seok, famous as an educator and educational administrator, did until the Liberation of Korea on August 15, 1945 after returning from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Oh Cheon-seok returned to Joseon in January 1932, served as a professor at Boseong College from April 1932, and resigned in September 1935. He didn’t have the opportunity to teach his major, pedagogy, at Boseong Colege, and he was dissatisfied with the school’s management style and atmosphere, so it appears that he was not ssatisfied with his life as a professor at Boseong Colege.
      After resigning from Boseong College, Oh Chun-seok served as a company executive. The companies he worked for were trading companies suspected of cooperating in the Japanese Aggressive War, including Park Heung-sik’s trading company ‘Hwashin Trade’ and Lim Seung-eop’s company ‘Kyunghwa industry’. Oh Chun-seok never mentioned the fact that he had worked at these kinds of companies. In the spring of 1942, Oh Chun-seok left for Shanghai with his family. As a result, he was able to avoid engaging in wartime cooperation. Oh Chun-seok was able to endure the wartime period without engaging in pro-Japanese behavior, whether actively or passively, by utilizing the network derived from his background, religion, education, and connections. So he could have moral confidence in working as an educator in Korea after 1945. Therefore, Oh Chun-seok would have wanted to erase or conceal the fact that he worked at a company suspected of being pro-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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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paper reveals what Oh Chun-seok, famous as an educator and educational administrator, did until the Liberation of Korea on August 15, 1945 after returning from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Oh Cheon-seok returned to Joseon in January 1932, serve...

      This paper reveals what Oh Chun-seok, famous as an educator and educational administrator, did until the Liberation of Korea on August 15, 1945 after returning from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Oh Cheon-seok returned to Joseon in January 1932, served as a professor at Boseong College from April 1932, and resigned in September 1935. He didn’t have the opportunity to teach his major, pedagogy, at Boseong Colege, and he was dissatisfied with the school’s management style and atmosphere, so it appears that he was not ssatisfied with his life as a professor at Boseong Colege.
      After resigning from Boseong College, Oh Chun-seok served as a company executive. The companies he worked for were trading companies suspected of cooperating in the Japanese Aggressive War, including Park Heung-sik’s trading company ‘Hwashin Trade’ and Lim Seung-eop’s company ‘Kyunghwa industry’. Oh Chun-seok never mentioned the fact that he had worked at these kinds of companies. In the spring of 1942, Oh Chun-seok left for Shanghai with his family. As a result, he was able to avoid engaging in wartime cooperation. Oh Chun-seok was able to endure the wartime period without engaging in pro-Japanese behavior, whether actively or passively, by utilizing the network derived from his background, religion, education, and connections. So he could have moral confidence in working as an educator in Korea after 1945. Therefore, Oh Chun-seok would have wanted to erase or conceal the fact that he worked at a company suspected of being pro-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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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화신사십년사편찬위원회, "화신오십년사" 화신산업 1977

      2 화신사십년사편찬위원회, "화신사십년사" 화신산업 1966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4 오천석화보편집위원회, "한국 현대교육의 선구자 오천석" 천원오천석기념회 2019

      5 오천석, "한국 민주교육의 초석을 다진 오천석 박사" 111 : 1982

      6 김학원, "친일파죄상기" 학민사 1993

      7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9 "조선총독부관보"

      10 "조선중앙일보"

      1 화신사십년사편찬위원회, "화신오십년사" 화신산업 1977

      2 화신사십년사편찬위원회, "화신사십년사" 화신산업 1966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4 오천석화보편집위원회, "한국 현대교육의 선구자 오천석" 천원오천석기념회 2019

      5 오천석, "한국 민주교육의 초석을 다진 오천석 박사" 111 : 1982

      6 김학원, "친일파죄상기" 학민사 1993

      7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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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조선중앙일보"

      11 "조선일보"

      12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13 "조광"

      14 김광재, "전후 上海한인사회의 전시 대일협력 인식-교민신문 『대한일보』 기고문을 중심으로-" 115 : 2014

      15 오진석, "일제하·미군정기 한승인의 정치활동과 경제인식" 8 (8): 2001

      16 오진석,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 118 : 2002

      17 이윤미, "일제하 미국 유학생으로서의 오천석: 유학생회 활동과 박사학위 논문을 중심으로" 39 (39): 2017

      18 김태영, "일제강점기 영어교육의 사회교육적 양상 분석 : 조선·동아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21 (21): 2016

      19 이경숙, "일제강점기 숭실전문학교 교수진의 구성과 네트워크" 130 : 2021

      20 정선이,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졸업자의 사회적 진출 양상과 특성" 77 : 2008

      21 김인호, "일제 말 조선의 남방 교역과 조선인의 남방 활동" 48 : 2006

      22 강명숙, "일제 강점기 연희전문학교의 학칙을 통해 본 교육 운영" 28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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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신동아"

      28 "신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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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보전학회논집"

      33 "보성전문학교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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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유영미, "백 년 전의 꿈-다시 읽는 장리욱"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36 정준영, "민주주의로 식민지교육 비판하기-교육행정가 오천석을 해명하는 식민지적 단서들" 133 : 2022

      37 염복규, "민족과 욕망의 랜드마크-박홍식과 화신백화점-" 6 : 2011

      38 조건, "미군정기 오천석의 교육정책 수립과 역사교육" 21 : 2015

      39 한승인, "미국유학시절의 회고" 방인도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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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김인호, "1940년대 조선공업의 대외적 성격과 조선인 자본가의 중국 ‘침략’" 15 : 2000

      51 윤경로, "105인 사건 피의자들의 사건 이후 행적에 관한 소고" 36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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