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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玉垂 趙冕鎬 漢詩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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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세기 중후반 서울 北村 詩壇을 주도하였던 玉垂 趙冕鎬(1804〜1887)는 영⋅정조 시대에 이룩된 ‘朝鮮詩風’의 성과를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서구열강의 침투에 따라 연이어 일어났던 丙寅洋擾⋅辛未洋擾와 같은 대사건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西事雜絶」전후편을 창작한 當代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옥수는 1804년 2월 7일(순조3년 癸亥 12월 26일) 서울 校洞에서 임천 조씨 趙基恒과 안동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수의 집안은 9대조 趙瑗이래로 서울에 세거하였으며, 안동 김씨⋅경주 김씨와 대대로 척분을 맺어온 京華士族이었다. 그래서 朴趾源의 절친한 벗이었던 안동 김씨 金履度가 옥수의 외조부가 되고, 경주 김씨 金正喜는 옥수의 부친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으며, 옥수에게는 妻叔이 된다.
      옥수는 어려서 부친의 벗이었던 金䥧에게서 글을 배워, 1837년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敬陵參奉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이후 평안도 三登縣令, 전라도 淳昌郡守, 平壤庶尹을 역임하는 등 지방관으로서 순탄한 벼슬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50년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평양서윤에서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벼슬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 왔다. 그런데 이때는 마침 김정희가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기에, 옥수는 본격적으로 김정희의 문하에 나아가 글씨와 詩文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이러한 가르침은 이후 옥수가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바탕이 되었다. 특히 이때 김정희를 통해 蘇軾의 문학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 옥수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5년에는 호조 정랑에 제수됨으로써 옥수는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857년에는 경상도 義城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아 평안도 江西 지방으로 유배를 다녀왔다. 1858년 해배되어 파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1860년 이후에는 서울 북촌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옥수는 시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서울 북촌에서 열리는 시사를 주도하며 朴珪壽, 申錫愚 등의 벗들과 활발한 시사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에 따른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에 따라 신미양요가 발발하였을 때는 이 두 사건의 전 과정을 잡절 형식으로 노래한 「서사잡절」 전후편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옥수 시문학의 대표적 성과라 할 수 있다.
      1860년대 후반부터 옥수의 주위에는 金綺秀, 金允植, 金昌熙, 魚允中, 申箕善 등의 후배들이 모여들었는데, 옥수는 북촌 시사의 선배로서 이들을 이끌어 주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혼란스런 시국이 전개되었을 때도 옥수는 그때마다 자신의 견문과 소회를 담은 우국시들을 꾸준히 남겼다.
      만년에 이르도록 옥수는 북촌시사의 ‘主人’으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이다가 1887년 11월 16일(고종24년 음력 10월 2일) 타계하였다.
      󰡔옥수집󰡕에는 5,000題가 넘는 방대한 한시 작품이 남아 있다. 옥수가 이렇게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인으로서의 남다른 기질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는 창작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자신은 의도하지도 않는데 시가 저절로 쓰여진다는 말을 종종 하였으며, ‘詩神’이 와서 자신에게 시를 짓도록 한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또 꿈속에서 시를 짓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옥수에게 있어 시는 선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도구였다. 옥수도 수학기에는 세상을 경륜해 보겠노라는 포부가 자못 컸으나, 환로가 순탄치 못하여 탐장죄인으로 유배까지 다녀오는 등 士로서 좌절을 겪게 되자,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채찍질하며, 위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蘇軾의 시가 옥수에게는 구원의 문학으로 다가왔다. 소식도 유배를 간 일이 있음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기도 하고, 淸貧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소식 시의 매력에 심취하였다. 소식의 시는 옥수가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데 큰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옥수는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시를 추구하였기에,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吾詩’를 쓰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모방과 답습을 싫어한다고 해서 한시문학의 전통을 가볍게 본 것은 아니었다. 옥수는 조선과 중국의 역대 저명 시인의 시를 널리 읽고, 의고시도 다수 창작하였다. 또 조선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詞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창작에 힘을 기울여 사문학에 있어서도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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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후반 서울 北村 詩壇을 주도하였던 玉垂 趙冕鎬(1804〜1887)는 영⋅정조 시대에 이룩된 ‘朝鮮詩風’의 성과를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서구열...

      19세기 중후반 서울 北村 詩壇을 주도하였던 玉垂 趙冕鎬(1804〜1887)는 영⋅정조 시대에 이룩된 ‘朝鮮詩風’의 성과를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서구열강의 침투에 따라 연이어 일어났던 丙寅洋擾⋅辛未洋擾와 같은 대사건들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西事雜絶」전후편을 창작한 當代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옥수는 1804년 2월 7일(순조3년 癸亥 12월 26일) 서울 校洞에서 임천 조씨 趙基恒과 안동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수의 집안은 9대조 趙瑗이래로 서울에 세거하였으며, 안동 김씨⋅경주 김씨와 대대로 척분을 맺어온 京華士族이었다. 그래서 朴趾源의 절친한 벗이었던 안동 김씨 金履度가 옥수의 외조부가 되고, 경주 김씨 金正喜는 옥수의 부친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으며, 옥수에게는 妻叔이 된다.
      옥수는 어려서 부친의 벗이었던 金䥧에게서 글을 배워, 1837년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敬陵參奉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이후 평안도 三登縣令, 전라도 淳昌郡守, 平壤庶尹을 역임하는 등 지방관으로서 순탄한 벼슬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50년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평양서윤에서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벼슬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 왔다. 그런데 이때는 마침 김정희가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기에, 옥수는 본격적으로 김정희의 문하에 나아가 글씨와 詩文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이러한 가르침은 이후 옥수가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바탕이 되었다. 특히 이때 김정희를 통해 蘇軾의 문학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 옥수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5년에는 호조 정랑에 제수됨으로써 옥수는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857년에는 경상도 義城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아 평안도 江西 지방으로 유배를 다녀왔다. 1858년 해배되어 파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1860년 이후에는 서울 북촌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옥수는 시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서울 북촌에서 열리는 시사를 주도하며 朴珪壽, 申錫愚 등의 벗들과 활발한 시사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에 따른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에 따라 신미양요가 발발하였을 때는 이 두 사건의 전 과정을 잡절 형식으로 노래한 「서사잡절」 전후편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옥수 시문학의 대표적 성과라 할 수 있다.
      1860년대 후반부터 옥수의 주위에는 金綺秀, 金允植, 金昌熙, 魚允中, 申箕善 등의 후배들이 모여들었는데, 옥수는 북촌 시사의 선배로서 이들을 이끌어 주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혼란스런 시국이 전개되었을 때도 옥수는 그때마다 자신의 견문과 소회를 담은 우국시들을 꾸준히 남겼다.
      만년에 이르도록 옥수는 북촌시사의 ‘主人’으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이다가 1887년 11월 16일(고종24년 음력 10월 2일) 타계하였다.
      󰡔옥수집󰡕에는 5,000題가 넘는 방대한 한시 작품이 남아 있다. 옥수가 이렇게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인으로서의 남다른 기질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는 창작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자신은 의도하지도 않는데 시가 저절로 쓰여진다는 말을 종종 하였으며, ‘詩神’이 와서 자신에게 시를 짓도록 한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또 꿈속에서 시를 짓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옥수에게 있어 시는 선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도구였다. 옥수도 수학기에는 세상을 경륜해 보겠노라는 포부가 자못 컸으나, 환로가 순탄치 못하여 탐장죄인으로 유배까지 다녀오는 등 士로서 좌절을 겪게 되자,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채찍질하며, 위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蘇軾의 시가 옥수에게는 구원의 문학으로 다가왔다. 소식도 유배를 간 일이 있음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기도 하고, 淸貧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소식 시의 매력에 심취하였다. 소식의 시는 옥수가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데 큰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옥수는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시를 추구하였기에,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吾詩’를 쓰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모방과 답습을 싫어한다고 해서 한시문학의 전통을 가볍게 본 것은 아니었다. 옥수는 조선과 중국의 역대 저명 시인의 시를 널리 읽고, 의고시도 다수 창작하였다. 또 조선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詞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창작에 힘을 기울여 사문학에 있어서도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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