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이 60년대에 '참여 대 순수'의 논쟁에서 '참여'의 입장에 섰던 사실은 그의 詩世界를 상상하는 한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본고의 처음 목적도 김수영의 참여문학적 성격이 진정한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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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 全州又石大學校, 1992
학위논문(석사) -- 全州又石大學校 大學院 , 國語國文學科 現代文學專攻 , 1992. 2
1992
한국어
811.609 판사항(3)
895.714 판사항(19)
전북특별자치도
iii, 69 p. ; 2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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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이 60년대에 '참여 대 순수'의 논쟁에서 '참여'의 입장에 섰던 사실은 그의 詩世界를 상상하는 한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본고의 처음 목적도 김수영의 참여문학적 성격이 진정한 민족문학(민중문학)을 확립하는 데 어떻게 관여했는가를 밝혀 보고자함이 있었다. 백락청의 말처럼 그가 문단과 사회의 온갖 억압과 몽매주의에 대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이러한 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와 산문들, 그리고 그의 시를 논한 평론들을 살펴본 후 위와 같은 방향으로 그의 시를 정리하기에는 본 연구자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다만, 진정한 민족문학의 한 방향이 예술지상주의(형식주의)에서 탈피만도 아니고 지나친 내용의 중심의 획일화된 소재주의의 극복만도 아닌 이 양자를 포용하는 선상에 있을 것이라는 평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부응해서 그러한 결과론적인 한 단면을 김수영 詩에서 발견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특히, 김영무의 지적대로 김소월이 '진달래꽃'을 발견한 것에 못지 않게 김수영의 '풀'의 발견은 한국 시문학사에 중대한 사실이라는 점을 중시하고<풀>의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김수영의 시세계에 대한 가치체계를 세워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첫째, <풀>은 한국 전통적 정서의 새로운 표출이라는 점과 둘째, <풀>은 김수영 자신이 내세운 時論인 '詩의 완성'에 다다른 작품이라는 견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먼저, 전통적 정서에 접맥되어 있다는 근거는 <풀>의 의미 구조가 현실의 슬픔을 '달관'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내용이라는 점과, 시상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운율과 심상의 연결이 悲壯한 美的 감동을 형성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풀'이 비를 몰아 오는 동풍의 허리를 굽혀 기꺼이 눕은 것을 바람뒤에 내릴 '비'의 존재를 깨닫기 때문이다. '비'는 풀의 생명을 왕성하게 하는 구원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풀'은 바람에 맞서 꺽이는 小我的 차원에서 벗어나 유연한 자세로 바람에 나부낀다. 오히려 바람이 주는 시련까지도 사랑으로 포용하여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 나는 울음과 웃음의 교체를 터득케 된다. 이렇게 풀잎의 누움이 비를 맞이하기 위한 뿌리의 '펌'으로 발전하는 <풀>의 의미 구조는 삶의 외형적 누움의 삶의 본질을 터득하는 누움으로 승화되는 상징체계이다. 이는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다. 운명적 시련까지도 사랑하는 '달관'이며, 유한적 존재로서 무한 세계인 大覺的 次元에의 도달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 구조의 바탕 위에서 연약한 풀이 모진 바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고 또 눕고 일어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반복 리듬은 인간 현실의 비장한 모습을 美的으로 상상하기에 충분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 비애를 영원성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한국 전통적 정서이고 이러한 전통적 정서가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시에 흔히 나타나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한용운의 <나룻배와 行人>을 <풀>과 비교 분석하여 <풀>의 전통계승 체계를 세우는 노력을 해 보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러한 안목으로 풀의 의미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체로 '풀'과 '바람'의 대립적 관계로만 이해하였기 때문에 민중의 생명의지라든가 저항의식이라는 일차적 의미에 머물렀다고 생각된다. <풀>의 의미 분석에서는 '비'의 상징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바람과 비와 풀의 상징성은 이미 송간 정철의 '關東別曲'에서부터 시도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김수영의 문학이 서구적 취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런 전통 운운함에 대하여 회의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사용한 언어의 취향은 서구적인 것이 사실이나 그밖의 모든 형태적 측면을 주의하여 살펴보면 오히려 새로운 전통적 시도를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런 고찰은 별도로 자세히 연구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다만 그가 뿌리내린 토양이 비록 서구적인 것이었을지라도 그가 흡수한 지양분을 전통적인 것으로 창조해낸 결과만을 고찰하였다. 다음으로, <풀>의 의미 구조가 위와 같이 일차적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복합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과 예술적 美感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詩의 완성'을 논할 수 있는 근거이다. 먼저, '詩의 완성'을 예술성과 현실성이 융합된 형태라고 했다. 여기서 예술성이란 사상과 감정이 조화된 美感을 뜻하며, 현실성이란 개인의 수양을 위한 관념적 思考가 아닌 현실에 대처하는 지성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하늘을 날아 다니는 페가서스처럼 시인은 地上(현실)的 속성인 말(馬)과 하늘(美)적 속성인 날개의 양극에 서서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꿈을 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결국, 詩는 꿈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꿈이야말로 무한대의 가능성과 무한대의 의미를 가진 것이므로 '완성된 詩'란 무한대의 의미와 상상을 내포했을 때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時論에 <풀>을 조명해 보면, '풀'이 초연하게 바람을 극복하는 과정은 운명에 대처하는 현실성이겠으며, 동시에 悲壯한 美的 감흥으로 꿈결같은 풀밭은 연상케 함은 예술성의 형성이라 하겠다. 다시말하면, 풀과 바람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는 모습의 언어적 구조 속에는 풀이 눕는 것인지 바람이 눕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무한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무한대의 꿈과 연결되는 '詩의 완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처럼 詩의 완성된 형태를 창출하는 것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그만큼 예술적이고 진지한 시정신의 바탕위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김수영의 詩意識의 본질을 찾고 그것이 어떠한 양태로 변모 발전하여 '詩의 완성'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김수영의 詩意識은 우선 그 본질이 '自由'에 있었다. 모든 현실적 구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식은 그의 詩<풍뎅이> <헬리콥터> <달나라의 장난> <레이판 彈>등에서 飛翔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飛翔은 원천적으로 추락을 선고 받은 비극적 운명으로 인식되어 있다. 김수영은 이 비극성을 극복함과 아울러 추상적 자유의 완전한 구현을 스스로의 내적 에너지로 이룩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팽이'가 스스로 도는 힘이나 '돌팔매'가 물을 차고 가볍게 날아가는 원동력은 현실을 차고 날아갈 수 있는 자체의 충실한 무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여기에서 현실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힘(김수영 자신은 이를 '경박성'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했지만)을 얻는 방편으로 현실에 대한 사랑의 눈을 뜨게 된다. 그가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살피지 못한 데서 그의 詩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현실에 대한 애정-그것은 혹은 분노로 혹은 반항으로 혹은 풍자로 다양하게 표출되어 있다. 김수영의 이와같은 현실의 인식의 양태야말로 그의 詩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겠는데 이는 차후 별도의 연구로 다루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본고에서는 <풀>과 관계되는 부분만을 고찰했음을 밝히는 바이다. 아무튼 그의 현실에 대한 애정은 결국 4.19의 정치적 상황을 <혁명>으로 규정할만큼 흥분했으나 곧 그는<新歸去來> 9편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의 본질이 정치나 이데올로기까지도 포괄하는 더 높은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누이야 장하고나 !>, <누이의 방>등에서 하찮은 주변의 사물에 깊은 진리가 스며 있음을 깨닫는다. 나아가 이러한 사랑의 의식을 인류의 미래에 대한 理性的 사랑으로 확산시키고 있음을<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작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풀'을 발견하게 된 잠재력이었고, 비애에 가득찬 현실을 극복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자기 확산의식을 갖게 된 것이<풀>의 의미 구조와 美感을 창조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풀>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48세로 타계한 김수영의 생애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즉, 문헌상 그의 두 번째 작품인 <孔子의 生活難>이 마치 그의 이같은 삶을 미리 예견했던 듯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동안 정확한 해석이 유보 된 채 다양한 추측으로만 이해되던<孔子의 生活難>이 지금껏 살핀 김수영의 시적 노력을 대입하면 쉽게 해석이 도는 것이다. 즉, 어려운 한국적 상황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진리를 찾아 道에 이를 것이며 道를 깨치면 죽어도 좋다는 풀이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한 시인이 道에 이르는 최고의 경지란 '詩의 완성'을 이룬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孔子의 生活難>은 자신의 삶을 예언한 영감적인 작품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확실히 김수영이 쓴 이 최초의 작품<孔子의 生活難>이 마지막 작품<풀>에 의해서 해석되는 기이한 현상은 김수영의 삶에 대하여 '詩의 완성'을 위한 '詩의 노래' 였다는 찬사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 된다. 따라서 김수영이야말로 시의 노예가 됨으로서 현실의 자유를 구가한 '詩的 自由人'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