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후 1844년에 설립된 중국 최초의 교회여학교인 영파여숙은 처음에 기독교에 대한 의구심과 여자교육을 무용하다 여기는 전통관념으로 인해 학생을 모집하기가 어려워 설립자인 앨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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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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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1844년에 설립된 중국 최초의 교회여학교인 영파여숙은 처음에 기독교에 대한 의구심과 여자교육을 무용하다 여기는 전통관념으로 인해 학생을 모집하기가 어려워 설립자인 앨더시가 자비를 들여 딸아이의 노동력을 보상하고 학비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5명의 입학생을 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선교사뿐 아니라 정관응, 송서, 장지동, 강유위, 양계초 등 개혁적 입장의 지식인들도 여성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1870년대가 되면 교회여학교는 점차 증가하며 중국인 스스로 설립한 여학교도 등장한다.
선교사들은 처음에 학생을 구하지 못해 여아의 가장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학생을 데려오거나 심지어 고아나 유기된 아이를 학생으로 충당할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빵을 쥐어주며 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선교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목도하면서, 거기에서 양계초 등 지식인이 주장하는 여자교육의 실용성(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빈곤아동이나 걸식아동을 학생으로 충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점차 중산층으로 나아가 상층계층 출신으로 여학생의 변화하게 된다. 다만 학부모가 기독교와 무관한 경우가 더 많아 기독교학교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세속화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 이전의 성경 위주의 수업을 탈피해 외국어, 수학, 과학, 가정, 체육, 음악, 미술 등 다양한 교과목을 개설하게 된다.
이처럼 중국인 학부모의 요구에 따라 전문화와 세속화, 그리고 현지화에 성공하며 몇 개의 교회여학교는 대성공을 거두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송경령 등 이른바 ‘송씨자매’도 입학했던 상해의 중서여숙( McTyeire Home and School for Girls )이었다. 1892년 개교해 1952년 현재의 ‘상해 제3여중‘으로 합병되기까지 60여년간 이 학교는 초기의 선교사 일색의 학교운영에서 점차 중국인 교장으로 바뀌고 교과목도 중국인의 수요에 맞추어 개편되었다.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했지만 명사들이 앞다투어 이 학교에 딸을 보낸 것은 졸업생의 진로 때문이었다. 졸업장 자체가 하나의 ‘혼수’가 되어 좋은 혼처를 찾는 데 유리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실제 입학생수에 비해 졸업생수는 극히 적었다. 하지만 비교적 많은 학생들이 교사나 공무원 등 직업여성이 되었고, 여성직업의 황금시대로 일컬어지는 1920․30년대가 되면 연예사업에까지 진출하는 등 그야말로 여성지위의 바로미터가 된 학교였다. 1892년 개교 당시 5명으로 출발한 중서여숙은 10년 뒤인 1902년에는 76명, 1918년에는 296명으로 학생이 늘어났다.
본 연구는 중국에서의 교회여학교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결실을 이룬 중서여학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1.설립배경
2.관리규칙
3.교과과정
4.중서여숙과 경정여학의 비교
5.중서여숙과 한국, 일본의 미션계 여학교의 비교
6.결론-미션계 여학교와 동아시아 여성의 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