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70~80년대의 한국고고학 = The Korean Archaeology in the 1970’s and 80’s

      한글로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1970’s and 80’s was very important phase in the history of Korean archaeology.
      During this period,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the field researches and the academic activities had been established and the regional chronological systems of material cultures over the whole period of the Korean archaeology prepared. The procedures of the development-led and the state-dominated excavations, together with the planned excavation of the Korean National Museum and the university as only way of field research until the early 1970’s, were institutionally arranged on the basis of the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law which had been established in the early 1960’s. In 1976, the Society Korean Archaeological Studies was organized and its scholarly journal was published with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the archaeological researchers, institutions and faculties. There were different selections in the ways to enhance the scientific validity and the methodological sophistications of Korean archaeology among the younger generations in 1970’s who had dissatisfactions about the poor theoretical consideration and the old-fashioned research practice. Some of them made an effort to master the sophisticated techniques required in the fieldwork and laboratory analyses and to learn the historical interpretation models of the Japanese archaeology, and the others showed special interest in the Anglo-American theoretical approaches and adopted the neo-evolutionary social typology to describe the developmental stage of the Korean ancient societies. Finally, it is suggested that the most meaningful achievement of the 1970’s and 80’s Korean archaeology should be the considerably detailed regional chronologies based on the systematic compilation, typological classification and seriation of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번역하기

      The 1970’s and 80’s was very important phase in the history of Korean archaeology. During this period,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the field researches and the academic activities had been established and the regional chronological systems o...

      The 1970’s and 80’s was very important phase in the history of Korean archaeology.
      During this period,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the field researches and the academic activities had been established and the regional chronological systems of material cultures over the whole period of the Korean archaeology prepared. The procedures of the development-led and the state-dominated excavations, together with the planned excavation of the Korean National Museum and the university as only way of field research until the early 1970’s, were institutionally arranged on the basis of the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law which had been established in the early 1960’s. In 1976, the Society Korean Archaeological Studies was organized and its scholarly journal was published with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the archaeological researchers, institutions and faculties. There were different selections in the ways to enhance the scientific validity and the methodological sophistications of Korean archaeology among the younger generations in 1970’s who had dissatisfactions about the poor theoretical consideration and the old-fashioned research practice. Some of them made an effort to master the sophisticated techniques required in the fieldwork and laboratory analyses and to learn the historical interpretation models of the Japanese archaeology, and the others showed special interest in the Anglo-American theoretical approaches and adopted the neo-evolutionary social typology to describe the developmental stage of the Korean ancient societies. Finally, it is suggested that the most meaningful achievement of the 1970’s and 80’s Korean archaeology should be the considerably detailed regional chronologies based on the systematic compilation, typological classification and seriation of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1970~80년대는 한국고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동안 고고학의 조사활동과연구의 기반이 조성되고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의 편년이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과는 이후 한국고고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구제, 학술적 기획, 국가기관 주도의 발굴등과 같은 고고학조사의 틀이 생겨나고 발굴조사는 점증하였으며 연구자와 조사연구기관의 수도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고고학 학회가 조직되고 전문학술지가 발간되었으며 80년대 초부터는 전국의주요대학에 고고학 관련학과가 설치되었고 이시기 후반에는 지방학회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필자는이러한 모든 변화의 시작과 토대를 1960년대 전반에 이루어진 문화재 관련법의 제정과 제도의 정비에서 찾았다. 70~80년대의 기간 중에도 학술지의 성격, 학과 설치, 연구자의 글쓰기에서고고학은 역사학, 미술사, 그리고 물질문화사와 넓게 연구영역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점차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면서 ‘야외조사와 그 수집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라는 학문적성격을 제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시기 동안 특히 젊은 연구자들은 한국 고고학의 방법과이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학문적 발전을 위해 서로 다른 방향의 모색을 했다. 구석기연구자의 상당수는 프랑스 고고학의 조사연구법에 관심을 두었고 미국의 신고고학에 수용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역사고고학 분야의 연구자들 중에는 일본고고학의 발굴조사, 도면작성, 형식분류, 역사학적 해석모델에 관심을 보였고 고분의 조사연구에 실천적으로 응용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유적 유물의 자연과학 분석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학계의 분파는 지금까지도 그 색체를 유지하고 있기도 한다. 이시기동안 한국고고학의 연구가 이룩한 성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시대별 물질문화사의 편년이다. 지역별로 유구·유물을 집성하여 형식·분류와 배열을 통해 작성된 편년표는 그것 자체가 당시의 중요한 논쟁거리이기도 했지만 이후 연구주제의 다양화와 학문적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번역하기

      1970~80년대는 한국고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동안 고고학의 조사활동과연구의 기반이 조성되고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의 편년이 체계화되었...

      1970~80년대는 한국고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동안 고고학의 조사활동과연구의 기반이 조성되고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의 편년이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과는 이후 한국고고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구제, 학술적 기획, 국가기관 주도의 발굴등과 같은 고고학조사의 틀이 생겨나고 발굴조사는 점증하였으며 연구자와 조사연구기관의 수도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고고학 학회가 조직되고 전문학술지가 발간되었으며 80년대 초부터는 전국의주요대학에 고고학 관련학과가 설치되었고 이시기 후반에는 지방학회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필자는이러한 모든 변화의 시작과 토대를 1960년대 전반에 이루어진 문화재 관련법의 제정과 제도의 정비에서 찾았다. 70~80년대의 기간 중에도 학술지의 성격, 학과 설치, 연구자의 글쓰기에서고고학은 역사학, 미술사, 그리고 물질문화사와 넓게 연구영역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점차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면서 ‘야외조사와 그 수집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라는 학문적성격을 제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시기 동안 특히 젊은 연구자들은 한국 고고학의 방법과이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학문적 발전을 위해 서로 다른 방향의 모색을 했다. 구석기연구자의 상당수는 프랑스 고고학의 조사연구법에 관심을 두었고 미국의 신고고학에 수용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역사고고학 분야의 연구자들 중에는 일본고고학의 발굴조사, 도면작성, 형식분류, 역사학적 해석모델에 관심을 보였고 고분의 조사연구에 실천적으로 응용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유적 유물의 자연과학 분석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학계의 분파는 지금까지도 그 색체를 유지하고 있기도 한다. 이시기동안 한국고고학의 연구가 이룩한 성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시대별 물질문화사의 편년이다. 지역별로 유구·유물을 집성하여 형식·분류와 배열을 통해 작성된 편년표는 그것 자체가 당시의 중요한 논쟁거리이기도 했지만 이후 연구주제의 다양화와 학문적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韓國考古學會, 21 : 1988

      2 申敬澈, "한일고대문화의 제문제" (財)韓日文化交流基金 1986

      3 李隆助, "한국의 선사문화 -그 분석연구-" 探求堂 1981

      4 朴英哲, "한국의 구석기문화 2" 探究堂 1984

      5 韓國上古史學會, "한국의 고고학사Ⅰ" 2015

      6 崔福圭, "한국에 있어서 중석기문화의 존재 가능성" 16 : 1974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Ⅰ, -고대-" 국사편찬위원회 1981

      8 孫寶基, "한국사 1, 고대" 1973

      9 金元龍, "한국사 1 고대" 國史編纂委員會 1973

      10 金元龍, "한국민족문화사대계(Ⅰ) 民族·國家史"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4

      1 韓國考古學會, 21 : 1988

      2 申敬澈, "한일고대문화의 제문제" (財)韓日文化交流基金 1986

      3 李隆助, "한국의 선사문화 -그 분석연구-" 探求堂 1981

      4 朴英哲, "한국의 구석기문화 2" 探究堂 1984

      5 韓國上古史學會, "한국의 고고학사Ⅰ" 2015

      6 崔福圭, "한국에 있어서 중석기문화의 존재 가능성" 16 : 1974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Ⅰ, -고대-" 국사편찬위원회 1981

      8 孫寶基, "한국사 1, 고대" 1973

      9 金元龍, "한국사 1 고대" 國史編纂委員會 1973

      10 金元龍, "한국민족문화사대계(Ⅰ) 民族·國家史"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4

      11 崔福圭, "한국과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문화와의 비교 연구" 14 : 1973

      12 임상택, "한국고고학의 기원론과 계통론에 대한비판적 검토—신석기・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한국고고학회 (102) : 196-249, 2017

      13 박영철, "한국 선사시대의 자연환경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1973

      14 박선주, "한국 선사시대 인골연구 : 부산 아치섬 인골에 대하여" 연세대학교 대학원 1976

      15 박희현, "한국 구석기시대 생활환경 연구" 연세대학교 1974

      16 李熙濬, "페트리의 繼起年代法(sequence dating)의 編年原理 考察" 1 : 1986

      17 李隆助, "청원 두루봉 구석기문화 중간보고서" 忠北大學校博物館 1981

      18 姜炯台, "중성자 방사화 분석에 의한 한국 고대 토기 및 자기 분류" 한양대학교 대학원 1986

      19 도유호, "조선의 구석기시대 문화인 굴포문화에 관하여" 64 (64): 1964

      20 孫寶基, "제천 점말동굴 발굴 중간보고" 11 : 1975

      21 한상인, "점토대 토기문화 성격의 일고찰" 서울대학교 대학원 1981

      22 조태섭, "점말용굴의 뼈 연모 연구: 특히 잘손질된 연모를 중심으로" 延世大學校 大學院 1987

      23 최삼용, "점말용굴 사슴과 화석의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1984

      24 朴英哲, "점말 용굴의 자연환경, in 점말 용굴 발굴 보고" 연세대학교박물관 1980

      25 한창균, "점말 용굴의 박쥐화석 연구" 연세대학교 1979

      26 한창균, "점말 용굴 퇴적의 제4기 박쥐화석" 33 : 1988

      27 이기길,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연구: 지표 석기를 중심으로" 27 : 1985

      28 이상만, "유적의 지질학적 조사, in 全谷里" 文化財硏究所 1983

      29 金鍾徹, "유적 파괴의 원인과 대책" 12 : 1993

      30 林永珍, "움집의 分類와 變遷" 17 ·18 : 1985

      31 최삼용,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짐승잡이의 예" 檀國大學校博物館 2 : 1986

      32 김성남, "와질토기논쟁고" 진인진 2013

      33 박진욱, "신라 무덤의 편년에 대하여" (4) : 1964

      34 金鍾徹, "서울 岩寺洞 先史聚落址" 2 : 1974

      35 고고학연구소, "상원 검은모루 유적 발굴 중간보고" 1 : 1969

      36 김신규, "상원 검은모루 구석기시대 발굴 보고" 4 : 1974

      37 신숙정, "상노대도 조개더미유적의 토기연구" 28 : 1984

      38 브루스 트리거, "브루스 트리거의 고고학사" 사회평론 2010

      39 김원, "발굴의 시대 - 경주 발굴, 개발 그리고 문화공동체 -" 한국사학회 (116) : 479-542, 2014

      40 嶺南考古學會, "민족문화 관리 및 보존정책에 대한 공개질의서" 13 : 1993

      41 李澈, "미량성분원소의 분석에 의한 한국 토기 및 자기의 분류 연구" 3 (3): 1981

      42 李鮮馥, "매장문화재 관리제도 개선을 위한 제안" 12 : 1993

      43 고고학연구소, "덕천 승리산 유적 발굴 보고" 1978

      44 이기길, "구석기시대 석기에서 관찰된 쓴 자국의 연구" 32 : 1988

      45 金元龍, "교양국사총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46 정찬영, "고구려 적석총에 관하여" 1961 (1961): 1961

      47 李殷昌, "鳩岩洞古墳發掘調査報告書" 嶺南大學校博物館 1979

      48 任孝宰, "鰲山里遺蹟Ⅲ"

      49 金元龍, "鰲山里遺蹟Ⅱ"

      50 東村武信, "鰲山里遺蹟 出土 黑曜石의 螢光分析, in 鰲山里遺蹟" 서울大學校博物館 1984

      51 任孝宰, "鰲山里遺蹟"

      52 서울大學校博物館, "鰲山里"

      53 金鍾徹, "高靈池山洞古墳群"

      54 文化財管理局, "馬山外洞城山貝塚發掘調査報告" 文化財管理局 1976

      55 鄭永和, "韓國의 舊石器" 19 : 1986

      56 國史編纂委員會, "韓國의 考古學Ⅴ(補遺篇)" 國史編纂委員會 1989

      57 國史編纂委員會, "韓國의 考古學Ⅳ(補遺篇)" 國史編纂委員會 1987

      58 國史編纂委員會, "韓國의 考古學Ⅲ" 國史編纂委員會 1985

      5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의 考古學Ⅱ" 國史編纂委員會 1983

      60 國史編纂委員會, "韓國의 考古學Ⅰ" 國史編纂委員會 1983

      61 尹武炳, "韓國靑銅遺物의 硏究" 白山學會 1972

      62 金廷鶴, "韓國靑銅器文化의 編年" 5 : 1978

      63 全榮來, "韓國靑銅器文化의 系譜와 編年" 全北遺蹟 1977

      64 全榮來, "韓國靑銅器文化의 年代上限問題" 全北遺蹟 1978

      65 金暘玉, "韓國鐵器時代 土器의 硏究" 20 : 1976

      66 任孝宰, "韓國考古學의 硏究動向" 6 : 1979

      67 韓國考古學會, "韓國考古學의 半世紀" 1995

      68 韓國考古學會, "韓國考古學에 있어서 科學的分析의 檢討" 1988

      69 崔盛洛, "韓國考古學에 있어서 型式學的 方法의 檢討" 16 : 1984

      70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78

      71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73

      72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73 金元龍, "韓國考古學年報 10"

      74 金正基, "韓國竪穴住居址考(二)" 3 : 1974

      75 金正基, "韓國竪穴住居址考(一)" 1 : 1968

      76 沈奉謹, "韓國稻作農耕의 起源에 관한 硏究" 6 : 1982

      77 李鍾宣, "韓國石棺墓의 硏究" 1 : 1976

      78 金元龍, "韓國無文土器 地域分類試論" 1 : 1968

      79 金貞培,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學校 出版部 1973

      80 金光億, "韓國文化人類學 17" 1985

      81 金載元, "韓國支石墓硏究" 國立中央博物館 1967

      82 定森秀夫, "韓國慶尙南道釜山·金海地域出土陶質土器の檢討" 7 : 1982

      83 定森秀夫, "韓國慶尙北道 星州地域出土 陶質土器에 대하여" 17 : 1988

      84 金英夏, "韓國式銅劍 分類再論" 20 : 1978

      85 金秉模, "韓國巨石文化源流에 관한 硏究Ⅰ" 10·11 : 1981

      86 秦弘燮, "韓國大學博物館의 回顧와 展望" 21 : 1982

      87 崔夢龍, "韓國土器의 科學分析檢討" 1 : 1988

      88 박희현, "韓國史論 12, 韓國의 考古學Ⅰ" 國史編纂委員會 1983

      89 沈奉謹, "韓國史論" 國史編纂委員 1986

      90 金光億, "韓國史市民講座 2, -古朝鮮의 諸問題-" 一潮閣 1988

      91 千寬宇, "韓國史大系" 三珍社 1983

      92 朱甫暾, "韓國古代國家의 形成" 民音社 1990

      93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古代史의 諸問題" 國史編纂委員會 1984

      94 崔夢龍, "韓國先史考古學史: 연구현황과 전망" 도서출판 까치 1991

      95 崔夢龍, "韓國上古史" 민음사 1988

      96 李泳南, "韓國上古史" 민음사 1988

      97 金廷鶴, "韓國の考古學" 河出書房 1972

      98 金元龍, "韓國の考古學" 講錟社 1989

      99 鄭永和, "韓國 舊石器文化의 硏究" 1 : 1980

      100 池健吉, "韓國 考古學 百年史: 연대기로 본 발굴의 역사 1880-1980" 열화당 2016

      101 池健吉, "韓國 考古學 百年史" 悅話堂 2016

      102 崔盛洛, "韓國 磨製石鏃의 考察" 12 : 1982

      103 全榮來, "韓國 磨製石劍·石鏃에 關한 硏究" 4·5 : 1982

      104 李隆助, "韓國 洪績世의 自然環境 硏究" 38 : 1982

      105 崔恩珠, "韓國 曲玉의 연구" 4 : 1986

      106 崔淑卿, "韓國 摘穗石刀의 硏究" 13 : 1960

      107 박희현, "韓國 後期 舊石器時代의 生活과 環境" 18 : 1975

      108 尹東錫, "韓國 古代鐵器의 CMA와 EPMA에 의한 硏究" 17·18 : 1985

      109 李基東, "韓國 古代國家 起源論의 現段階, in 韓國上古史의 諸問題" 1987

      110 尹東錫, "韓國 初期鐵器遺物의 金屬學的 硏究" 高麗大學校出版部 1984

      111 尹東錫, "韓國 初期鐵器時代에 土壙墓에서 出土된 鐵器遺物의 金屬學的 考察" 13 : 1982

      112 裵基同, "韓半島 洪積世 環境과 舊石器文化" 2 : 1989

      113 韓永熙, "韓半島 中西部地方의 新石器文化" 5 : 1978

      114 沈奉謹, "韓·日支石墓의 關係" 10·11 : 1981

      115 崔鍾圭, "陶質土器 成立前夜와 展開" 12 : 1982

      116 沈奉謹, "陜川三嘉古墳群"

      117 崔夢龍, "閔錫泓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118 李浩官, "長城댐水沒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 in 榮山江水沒地區發掘調査報告書" 全羅南道 1976

      119 金廷鶴, "釜山華明洞古墳群"

      120 釜山大學校博物館, "釜山老圃洞遺蹟"

      121 申敬澈, "釜山·慶南出土 瓦質系土器" 12 : 1982

      122 吳建煥, "金海平野에 대한 考古學的 硏究(Ⅰ)" 2 : 1989

      123 任孝宰, "金哲埈博士華甲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3

      124 崔夢龍, "金哲埈博士回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125 李康承, "遼寜地方의 靑銅器文化" 6 : 1979

      126 李鮮馥, "遺蹟 지질고고적 성격, in 全谷里" 文化財硏究所 1983

      127 定森秀夫, "角田文衛博士古稀記念古代學叢論" 1983

      128 韓永熙, "角形土器考" 14·15 : 1983

      129 任孝宰, "西海岸地域의 櫛文土器文化: 編年을 中心으로" 14.15 : 1983

      130 李南珪, "西北韓 土壙墓의 性格" 20 : 1987

      131 金貞培, "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 (21·22) : 1977

      132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團,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報告(1976)" 4 : 1978

      133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團,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報告(1975)" 3 : 1977

      134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團,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報告(1974)" 蠶室地區遺蹟址發掘調査團 1975

      135 藤井和夫, "落東江中流域古墳出土陶質土器の編年(Ⅰ)" 13 : 1982

      136 金秉模, "芳荑洞 古墳群" 4 : 1977

      137 鄭永和, "舊石器時代 穴居 遺蹟에 대하여" 6 : 1974

      138 伊藤秋男, "耳飾の形式學的硏究に基つく韓國古新羅古墳の編年に關する一試案" 64 : 1972

      139 金元龍, "考古學的 資料의 解釋: 카터 랜치 遺蹟의 경우" 3 : 1977

      140 鄭澄元, "終末期無文土器에 관한 硏究" 20 : 1987

      141 李淸圭, "細形銅劍의 型式分類 및 그 變遷에 對하여" 13 : 1982

      142 金世基, "竪穴式墓制의 硏究" 17·18 : 1985

      143 朴普鉉, "積石木槨墳時代Ⅰ期의 性格" 12 : 1988

      144 孫寶基, "石壯里의 자갈돌·찍개 文化層" 1 : 1968

      145 孫寶基, "石壯里의 새기개·밀개 文化層" 5 : 1970

      146 孫寶基, "石壯里의 後期 舊石器時代 집자리" 9 : 1973

      147 孫寶基, "石壯里의 前期·中期 舊石器 文化層" 7 : 1972

      148 孫寶基, "石壯里 이외의 舊石器文化의 分布 可能性" 7 : 1969

      149 李熙濬, "相對年代決定法의 綜合考察" 2 : 1986

      150 李殷昌, "皇南洞發掘調査報告書" 嶺南大學校博物館 1975

      151 姜仁求, "百濟古墳硏究" 一志社 1977

      152 金基雄, "百濟の古墳" 學生社 1976

      153 金載元, "發刊辭" 1 : 1968

      154 李賢惠, "現代韓國史學과 史觀" 一潮閣 1991

      155 申敬澈, "熊川文化期 紀元前上限說 再考" 4 : 1980

      156 尹武炳, "無文土器型式分類試攷" 39 : 1975

      157 李淸圭, "濟州島地方의 初期鐵器性格과 無文土器文化의 展開" 17·18 : 1985

      158 任孝宰, "漢江流域櫛文土器의 容量抽出과 文化的意味" 1 : 1976

      159 朴淳發, "漢江流域 原三國時代 土器의 樣相과 變遷" 23 : 1989

      160 裵基同, "深堂 趙由典博士 古稀紀念論叢" 주류성 2011

      161 崔盛洛, "海南郡谷里貝塚 Ⅰ"

      162 林孝澤, "洛東江 下流 禮安里 石棺墓" 3 : 1979

      163 林孝澤, "洛東江 下流 伽耶土壙墓의 硏究" 4 : 1978

      164 鄭澄元, "水佳里貝塚"

      165 文化財管理局, "武寧王陵" 文化財管理局 1973

      166 서울大學校博物館, "欣岩里住居址 4"

      167 金元龍, "欣岩里住居址"

      168 朴普鉉, "樹枝形立華飾冠의 系統" 4 : 1987

      169 朴普鉉, "樹枝形立華飾冠 型式分類 試論" 9 : 1986

      170 金鍾徹, "梁山郡西生面新岩里遺蹟" 2 : 1974

      171 藤井和夫, "梁山夫婦塚出土陶質土器の編年に就いて" 3 : 1978

      172 姜仁求, "松菊里"

      173 釜山大學校博物館, "東萊福泉洞古墳群 Ⅰ"

      174 鄭澄元, "東萊福泉洞古墳群 Ⅰ"

      175 池健吉, "東北아시아 支石墓의 型式學的 考察" 12 : 1982

      176 李鮮馥, "東北 아시아 舊石器文化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89

      177 定森秀夫, "東アシアの考古と歷史 上" 1987

      178 定森秀夫, "東アシアの考古と歷史 上" 1987

      179 金元龍, "李瑄根博士古稀紀念 韓國學論叢" 1974

      180 韓炳三, "朝島貝塚"

      181 盧爀眞, "有溝石斧에 대한 一考察" 89 : 1981

      182 崔秉鉉, "昌山金正基博士華甲紀念論叢" 550-583, 1990

      183 慶尙南道, "昌寧桂城古墳群發掘調査報告" 慶尙南道 1977

      184 藤井和夫, "昌寧地方古墳出土陶質土器の編年に就いて" 12 : 1981

      185 定森秀夫, "日本民族文化の生成 1, -永井昌文敎授退官記念論文集-" 六興出版 1988

      186 武末純一, "日本民族文化の生成 -永井昌文敎授退官記念論文集-" 1988

      187 全京秀, "新進化論과 국가형성론" 19 : 1988

      188 李殷昌, "新羅金屬工藝의 原流的인 中央亞細亞 古代文化: 아프가니스탄의 시바르간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一志社 8 : 1982

      189 양정석, "新羅王京硏究와 慶州의 開發" 27 : 2006

      190 金元龍, "新羅土器의 硏究" 乙酉文化社 1960

      191 李種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1982

      192 崔秉鉉, "新羅古墳硏究" 일지社 1992

      193 崔秉鉉, "新羅古墳 編年의 諸問題" 30 : 1993

      194 金基雄, "新羅の古墳" 學生社 1976

      195 姜炯台, "新羅·伽耶土器 産地推定 硏究, in 韓國考古學에 있어서 科學的分析의 檢討" 1988

      196 李殷昌, "新羅 伽耶 土器 編年에 관한硏究" 23 : 1981

      197 鄭在鑂, "文化財保護管理의 實績과 그 展望" 文化財管理局 (創刊) : 1965

      198 吳世卓, "文化財保護法과 그 問題點" 30 : 1997

      199 吳世卓, "文化財保護法原論" 주류성 2005

      200 嶺南考古學會, "文化財保護法 改正案에 대한 意見" 12 : 1993

      201 鄭基永, "文化財 補修 3個年 事業 推進現況(槪報)" 13 : 1980

      202 崔盛洛, "放射性炭素測定年代 問題의 檢討" 13 : 1982

      203 金永培, "扶餘松菊里 遼寧式銅劍出土石棺墓" 7·8 : 1975

      204 李健茂, "扶餘 松菊里遺蹟 發掘調査槪報" 5 : 1978

      205 金元龍, "所謂 ‘瓦質土器’에 對하여" 99·100 : 1983

      206 穴澤和光, "慶州金鈴塚考: 古新羅王族墓の編年的序列" 24 (24): 1972

      207 姜仁求, "慶州芳內里古墳群"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1997

      208 崔鍾圭, "慶州市朝陽洞遺蹟發掘調査槪要とその成果" 35 : 1983

      209 鄭在鑂, "慶州地區의 文化財 淨化計劃" 5 : 1971

      210 穴澤和光, "慶州古新羅古墳の編年" 18 (18): 1972

      211 藤井和夫, "慶州 古新羅古墳編年試案" 6 : 1979

      212 武末純一, "慶尙道の瓦質土器と古式陶質土器" 15 : 1985

      213 忠北大學校博物館,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 忠北大學校博物館 1984

      214 李熙濬, "形式學的 方法의 問題點과 順序配列法(seriation)의 檢討" 14.15 : 1983

      215 全玉年, "嶺南地域에 있어서 後期瓦質土器의 硏究: 墳墓出土資料를 中心으로" 慶北大學校 大學院 1989

      216 李白圭, "岩寺洞 新石器時代 住居址 調査"

      217 孫寶基, "層位를 이룬 石壯里 舊石器文化" 35·36 : 1967

      218 崔秉鉉,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通川文化社 1984

      219 鄭澄元,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通川文化社 1984

      220 池健吉, "安溪里古墳群" 國立文化財硏究所 1981

      221 李浩官, "安東水沒地區遺蹟發掘報告" 文化公報部 1974

      222 崔夢龍, "大草·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 in 榮山江水沒地區發掘調査報告書" 全羅南道 1976

      223 忠南大學校博物館, "大淸댐水沒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書, 忠南篇" 忠南大學校博物館 1978

      224 忠北大學校博物館, "大淸댐水沒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書, 忠北 篇" 忠北 篇, 忠北大學校博物館 1979

      225 濱田耕作, "大正九年度古蹟調査報告 第1冊 -金海貝塚發掘調査報告-" 朝鮮總督府 1923

      226 金貞培, "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 12 : 1979

      227 崔秉鉉, "古新羅積石木槨墳硏究: 墓型과 그 性格을 中心으로" 31 : 1980

      228 李仁淑, "古新羅期 裝身具에 대한 一考察" 62 : 1974

      229 崔秉鉉, "古新羅 積石木槨墳의 變遷과 編年" 10 ·11 : 1981

      230 尹世英, "古新羅 伽耶古墳의 編年에 관하여: 古墳出土 冠帽를 中心으로" 17 : 1975

      231 安在皓, "古式陶質土器에 관한 약간의 考察" 1 : 1986

      232 "古式鐙子考" 9 : 1985

      233 國史編纂委員會, "古代韓·日關係史" 國史編纂委員會 1986

      234 崔鍾圭, "古代を考える 34, -古代伽倻の檢討-" 1983

      235 崔盛洛, "原三國期 土器의 變遷과 問題點" 5 : 1988

      236 李盛周, "原三國時代 土器의 類型, 系譜, 編年, 生産體制" 2 : 1991

      237 이성주, "原三國時代 土器에 대한 理論的 論議의 方向 -영남지방의 토기자료를 중심으로-" 한국고대학회 (26) : 5-40, 2007

      238 李淸圭, "南韓地方 無文土器文化의 展開와 孔列土器文化의 位置" 1 : 1988

      239 李南珪, "南韓 初期鐵器 文化의 一考察: 特히 鐵器의 金屬學的 分析을 중심으로" 3 : 1-, 1982

      240 鄭澄元, "南海岸地方 隆起文土器에 대한 硏究" 9 : 1985

      241 國立中央博物館, "南城里石棺墓" 國立中央博物館 10-, 1977

      242 半月地區發掘調査團, "半月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 文化財管理局 1978

      243 金元龍, "十二臺營子의 靑銅短劍墓" 16 : 1961

      244 穴澤和光, "北燕·馮素弗墓の提起する問題" 85 : 1973

      245 釜山大學校博物館, "勒島住居址"

      246 文化財管理局, "八堂·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綜合調査報告" 文化財管理局 1974

      247 金元龍, "全谷里 아슐리안 兩面核石器 文化 豫報" (46·47) : 1979

      248 裵基同, "全谷里 舊石器文化와 東北 아시아 洪績世 古人類의 生存活動" 28 : 1989

      249 裵基同, "全谷里 出土 주먹도끼류 石器의 性格에 대하여" 22 : 1983

      250 金元龍, "全谷里"

      251 國立文化財硏究所, "全國文化遺蹟發掘調査年表, -增補版Ⅱ-"

      252 崔夢龍,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와 階級의 發生" 31 : 1981

      253 尹武炳, "光復三0年 韓國考古學界의 反省과 方向" 126 : 1975

      254 權鶴洙, "伽耶諸國의 成長과 環境" 30·31 : 1985

      255 全吉姬, "伽耶墓制의 硏究" 3 : 1961

      256 李殷昌, "伽耶地域 土器의 硏究" 2 : 1970

      257 李殷昌, "伽耶古墳의 編年硏究" 12 : 1982

      258 李白圭, "京畿道 出土 無文土器 磨製石器" 3 : 1974

      259 金廷鶴, "亞細亞硏究 Ⅹ-4"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260 忠北大學校博物館, "中部高速道路 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 忠北大學校博物館 1986

      261 崔鍾圭, "中期 古墳 性格에 관한 약간의 考察" 7 : 1983

      262 李健茂, "中島: 진전보고Ⅰ" 國立中央博物館 1980

      263 尹東錫, "中國封建社會 前期鋼鐵冶鍊技術發展의 硏究" 10·11 : 1981

      264 張浩洙, "上老大島 조개더미 遺蹟의 石器硏究" 延世大學校 1981

      265 姜仁求, "三國時代墳丘墓硏究" 嶺南大學校出版部 1984

      266 李盛周, "三國時代 前期 土器의 硏究" 1 : 1988

      267 裵基同,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叢Ⅰ" 一志社 1987

      268 禹枝南,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一志社 1987

      269 金元龍,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一志社 1987

      270 林永珍,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一志社 1987

      271 崔秉鉉,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一志社 1987

      272 李盛周, "‘북방문화론’에 대하여, in 신화의 역사화: 반성과 비판을 위한 새로운 진전" 2014

      273 李鮮馥, "Quaternary geology and paleoecology of hominid occupation of Imjin basin" 2 (2): 1988

      274 Yi Seonbok, "Observations on the Lower Paleolithic of Northeast Asia" 24 (24): 1983

      275 Willey, G. R., "History of American Archaeology" Thames and Hudson 1980

      276 Choi Monglyong, "Analysis of ‘plain Coarse Pottery’ from Cholla province, and the implication for ceramic technology and so-called ‘Yeongsan River Valley Culture Area’" 10·11 : 1981

      277 崔夢龍, "A Study of the Yŏngsan River Valley Culture; The rise of Chiefdom Society and State in Ancient Korea" 東星社 1984

      278 李康承, "3. 靑銅器時代"

      279 전덕재, "1973년 천마총 발굴과 박정희 정권의 문화재 정책" 역사문제연구소 (112) : 186-205, 2015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 0.7 0.7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2 0.89 1.572 0.2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