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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660년 백제의 방어전략 회의와 방어전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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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52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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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직면하여 의자왕이 주재한 방어전략 회의에서 제시된 백제의 방어 전략을 살펴보고, 실제 전개된 황산벌 전투, 기벌포(웅진강구) 전투, 사비성 남쪽의 전투를 백제의 방어 전략에 맞추어 분석한 것이다. 먼저 백제에서는 기본적인 사비도성 방어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1차 방어선은 탄현과 기벌포, 2차 방어선은 진현성 등의 대전 동부 지역의 산성들과 가림성, 3차 방어선은 사비성의 나성과 부소산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의 방어 전략 회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첫 번째 단계는 나당군의 진격로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의직의 견해와 신라군과 결전하자는 상영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의자왕은 두 사람에 대한 군사적 믿음이 부족하여 어떤 선택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다시 좌평 흥수의 의견을 구하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흥수의 견해와 대신들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여기서 최대 논쟁점은 흥수의 제안대로 중앙군을 탄현과 백강에 파견하여 신라군과 당군을 막으면서 농성을 통한 장기전으로 가느냐, 아니면 대신들의 견해처럼 중앙군을 중심으로 빠른 시일 내에 승부를 결정짓느냐의 문제였다. 당시 백제는 태자 융을 지지하던 세력이 쇠퇴하고 소왕 효를 따르는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양 세력 간의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후자에 속하는 대신들이 흥수의 의견이 채택되어 전자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중앙군을 탄현과 기벌포로 파견하여 장기전을 치루는 것은 정변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논의가 지속되는 과정에 이미 신라군과 당군은 지방군이 방어하던 탄현과 기벌포를 통과해버렸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중앙군 일부를 황산벌로 파견하여 신라군의 진격을 막고 나머지 병력은 사비성을 지키면서 당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실제 신라군과 당군을 막기 위해 펼쳐진 방어 전투를 살펴보면, 황산벌 전투는 1차 방어선인 탄현과 2차 방어선인 대전 지역마저 통과한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중앙군인 계백의 5천 결사대를 파견하여 개태사 일대에서 막고자 한 것이었다. 기벌포(웅진강구) 전투는 해로로 공격한 나당군을 막기 위한 전투였는데, 백제군의 방어선을 교묘히 피해 웅포 일대에 상륙한 나당군이 백제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강경 일대와 군산 방면의 양 쪽으로 진격한 것으로 보았다. 사비성 남쪽에서의 전투에서는 당군이 사비성 남쪽 지역에 이르자 백제군은 신라군이 합류하기 전에 중앙군과 주변 지방군을 총동원하여 당군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으나 1만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사비성 방어 병력이 부족해져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였고, 결국 사비성은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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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직면하여 의자왕이 주재한 방어전략 회의에서 제시된 백제의 방어 전략을 살펴보고, 실제 전개된 황산벌 전투, 기벌포(웅진강구) 전투, 사비성 남쪽의 ...

      이 논문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직면하여 의자왕이 주재한 방어전략 회의에서 제시된 백제의 방어 전략을 살펴보고, 실제 전개된 황산벌 전투, 기벌포(웅진강구) 전투, 사비성 남쪽의 전투를 백제의 방어 전략에 맞추어 분석한 것이다. 먼저 백제에서는 기본적인 사비도성 방어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1차 방어선은 탄현과 기벌포, 2차 방어선은 진현성 등의 대전 동부 지역의 산성들과 가림성, 3차 방어선은 사비성의 나성과 부소산성으로 파악하였다. 백제의 방어 전략 회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첫 번째 단계는 나당군의 진격로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의직의 견해와 신라군과 결전하자는 상영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의자왕은 두 사람에 대한 군사적 믿음이 부족하여 어떤 선택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다시 좌평 흥수의 의견을 구하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흥수의 견해와 대신들의 견해가 대립하였다. 여기서 최대 논쟁점은 흥수의 제안대로 중앙군을 탄현과 백강에 파견하여 신라군과 당군을 막으면서 농성을 통한 장기전으로 가느냐, 아니면 대신들의 견해처럼 중앙군을 중심으로 빠른 시일 내에 승부를 결정짓느냐의 문제였다. 당시 백제는 태자 융을 지지하던 세력이 쇠퇴하고 소왕 효를 따르는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양 세력 간의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후자에 속하는 대신들이 흥수의 의견이 채택되어 전자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중앙군을 탄현과 기벌포로 파견하여 장기전을 치루는 것은 정변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논의가 지속되는 과정에 이미 신라군과 당군은 지방군이 방어하던 탄현과 기벌포를 통과해버렸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중앙군 일부를 황산벌로 파견하여 신라군의 진격을 막고 나머지 병력은 사비성을 지키면서 당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실제 신라군과 당군을 막기 위해 펼쳐진 방어 전투를 살펴보면, 황산벌 전투는 1차 방어선인 탄현과 2차 방어선인 대전 지역마저 통과한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중앙군인 계백의 5천 결사대를 파견하여 개태사 일대에서 막고자 한 것이었다. 기벌포(웅진강구) 전투는 해로로 공격한 나당군을 막기 위한 전투였는데, 백제군의 방어선을 교묘히 피해 웅포 일대에 상륙한 나당군이 백제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강경 일대와 군산 방면의 양 쪽으로 진격한 것으로 보았다. 사비성 남쪽에서의 전투에서는 당군이 사비성 남쪽 지역에 이르자 백제군은 신라군이 합류하기 전에 중앙군과 주변 지방군을 총동원하여 당군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으나 1만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사비성 방어 병력이 부족해져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였고, 결국 사비성은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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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shows Baekjae’s defense strategy under the attack of the Silla-Tang Allied forces in 660, and focuses on the battle of Hwangsanbeol, Gibeolpo (an estuary of Eungjin river), and southern Sabi Castle. It is thought that the essential defense system of Sabi Castle must have been well equipped with. Tanhyeon and Gibeolpo belongs to the first line of defense, mountain fortress in eastern region of Daejeon, such as Jinhyeon Castle, and Galim Castle to the second, and Na Castle, which is outer castle of Sabi Castle, and Buso mountain fortress belongs to the third line of defense. This study divided the defense strategy of Baekjae into 3 stages. The first phase was the conflict between Uijik and Sangyeong: Uijik proposed that they have to attack Tang force first because they don’t know where Tang started to attack, while Sangyeong suggested that they have to fight Silla first. King Euija’s trust in their military decision was not established, so the king asked Jwapyeong Heungsu for advice. Then comes the second phase of the defense strategy: the conflict between Heungsu’s view and other subjects’ view. Heungsu demanded that the central forces have to be dispatched to Tanhyeon and Baek river and protect Silla-Tang Allied forces, making the war delayed through the protesting. Other subjects argued ending the war quickly with the central forces. The critical problem here was whether to follow Hengsu’s or other subjects’ view. Those days, Baekjae got in trouble. the subjects who followed crown prince Jung lost their power, while the subjects who followed SoWang(小王) Hyo got their power. The latter didn’t want Hengsu’s suggestion to be adopted because it could make the former’s power extended. Also, the rebellion could occur in the absence of central forces when the extended war happened. Therefore, Heungsu’s assertion was hard to be supported. During this dispute in Baekjae, Silla-Tang force already passed Tanhyeon and Gibeolpo where the regional forces had protected. The third phase was that Baekjae couldn’t help sending some central forces to Hwangsanbeol and preventing Silla’s advance, and the rest of forces protected Sabi Castle prepared with the attack of Tang force. Looking closely at the defense war against Silla-Tang allied force, The Battle of Hwangsanbeol was sending Gyebaek’s 5000 troops to block Silla forces around Gaetae temple which advanced over Tanhyeon, the first line of defense and Daejeon, the second line of defense. The battle of Gibeolpo (an estuary of Eungjin river) was to defense Silla-Tang allied force which attacked in seaway. In the battle, Silla-Tang allied force, which skillfully avoided the defense line of Baekjae and landed in Eungpo, won Baekjae and marched around Gangyeong and Gunsan. During the war at southern Sabi Castle, the regional forces and central forces of Baekjae assembled and struggled. However, Tang force defeated Baekjae even in the absence of Silla force killing and enslaving 10000 Baekjae forces. At last, troops defending Sabi Castle were so deficient that King Euija escaped to Eungjin Castle, and Sabi Castle collapsed helples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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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shows Baekjae’s defense strategy under the attack of the Silla-Tang Allied forces in 660, and focuses on the battle of Hwangsanbeol, Gibeolpo (an estuary of Eungjin river), and southern Sabi Castle. It is thought that the essential defens...

      This study shows Baekjae’s defense strategy under the attack of the Silla-Tang Allied forces in 660, and focuses on the battle of Hwangsanbeol, Gibeolpo (an estuary of Eungjin river), and southern Sabi Castle. It is thought that the essential defense system of Sabi Castle must have been well equipped with. Tanhyeon and Gibeolpo belongs to the first line of defense, mountain fortress in eastern region of Daejeon, such as Jinhyeon Castle, and Galim Castle to the second, and Na Castle, which is outer castle of Sabi Castle, and Buso mountain fortress belongs to the third line of defense. This study divided the defense strategy of Baekjae into 3 stages. The first phase was the conflict between Uijik and Sangyeong: Uijik proposed that they have to attack Tang force first because they don’t know where Tang started to attack, while Sangyeong suggested that they have to fight Silla first. King Euija’s trust in their military decision was not established, so the king asked Jwapyeong Heungsu for advice. Then comes the second phase of the defense strategy: the conflict between Heungsu’s view and other subjects’ view. Heungsu demanded that the central forces have to be dispatched to Tanhyeon and Baek river and protect Silla-Tang Allied forces, making the war delayed through the protesting. Other subjects argued ending the war quickly with the central forces. The critical problem here was whether to follow Hengsu’s or other subjects’ view. Those days, Baekjae got in trouble. the subjects who followed crown prince Jung lost their power, while the subjects who followed SoWang(小王) Hyo got their power. The latter didn’t want Hengsu’s suggestion to be adopted because it could make the former’s power extended. Also, the rebellion could occur in the absence of central forces when the extended war happened. Therefore, Heungsu’s assertion was hard to be supported. During this dispute in Baekjae, Silla-Tang force already passed Tanhyeon and Gibeolpo where the regional forces had protected. The third phase was that Baekjae couldn’t help sending some central forces to Hwangsanbeol and preventing Silla’s advance, and the rest of forces protected Sabi Castle prepared with the attack of Tang force. Looking closely at the defense war against Silla-Tang allied force, The Battle of Hwangsanbeol was sending Gyebaek’s 5000 troops to block Silla forces around Gaetae temple which advanced over Tanhyeon, the first line of defense and Daejeon, the second line of defense. The battle of Gibeolpo (an estuary of Eungjin river) was to defense Silla-Tang allied force which attacked in seaway. In the battle, Silla-Tang allied force, which skillfully avoided the defense line of Baekjae and landed in Eungpo, won Baekjae and marched around Gangyeong and Gunsan. During the war at southern Sabi Castle, the regional forces and central forces of Baekjae assembled and struggled. However, Tang force defeated Baekjae even in the absence of Silla force killing and enslaving 10000 Baekjae forces. At last, troops defending Sabi Castle were so deficient that King Euija escaped to Eungjin Castle, and Sabi Castle collapsed helples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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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백제의 방어전략 회의
      • 1. 선행 연구 검토
      • 2. 방어전략 회의의 논쟁점
      • Ⅲ. 백제의 방어전
      • Ⅰ. 머리말
      • Ⅱ. 백제의 방어전략 회의
      • 1. 선행 연구 검토
      • 2. 방어전략 회의의 논쟁점
      • Ⅲ. 백제의 방어전
      • 1. 황산벌 전투
      • 2. 기벌포(웅진강구) 전투
      • 3. 사비성 남쪽 1사(舍) 지점에서의 전투
      •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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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金榮官, "羅唐聯合軍의 百濟侵攻戰略과 百濟의 防禦戰略" 2 (2): 1999

      2 金榮官, "황산벌 출정에서 백강구 전투까지, in 백제실록 의자왕"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2008

      3 임기환, "한국군사사2 고대Ⅱ" 육군본부 2012

      4 임용한, "한국고대전쟁사 2" 혜안 2012

      5 朴淳發, "종합고찰, in 論山 黃山벌 戰蹟地"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論山市 2000

      6 서정석, "의자왕의 전략과 황산벌전투의 실상"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76) : 1-28, 2010

      7 정구복, "역주 삼국사기 2"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8 兪元載, "사비도성의 방비체제에 대하여-주변의 산성배치를 중심으로-" 24 : 1988

      9 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10 이희진, "백제의 멸망과정에 나타난 군사상황의 재검토" 64 : 2001

      1 金榮官, "羅唐聯合軍의 百濟侵攻戰略과 百濟의 防禦戰略" 2 (2): 1999

      2 金榮官, "황산벌 출정에서 백강구 전투까지, in 백제실록 의자왕"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2008

      3 임기환, "한국군사사2 고대Ⅱ" 육군본부 2012

      4 임용한, "한국고대전쟁사 2" 혜안 2012

      5 朴淳發, "종합고찰, in 論山 黃山벌 戰蹟地"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論山市 2000

      6 서정석, "의자왕의 전략과 황산벌전투의 실상"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76) : 1-28, 2010

      7 정구복, "역주 삼국사기 2"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8 兪元載, "사비도성의 방비체제에 대하여-주변의 산성배치를 중심으로-" 24 : 1988

      9 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10 이희진, "백제의 멸망과정에 나타난 군사상황의 재검토" 64 : 2001

      11 金榮官,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2007

      12 徐程錫,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2007

      13 노중국,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14 이상훈, "백제멸망기 신라 수군의 성격과 역할"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7) : 215-244, 2017

      15 이재준, "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 景仁文化社 2017

      16 박노석, "백제 황산벌 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 인문과학연구소 (27) : 355-376, 2010

      17 남정호, "백제 사비시대 후기의 정국 변화" 학연문화사 2016

      18 강종원, "백제 사비기 군사 운용체계의 변화와 황산벌전투" 백제학회 (22) : 79-105, 2017

      19 김종수, "백제 軍制의 성립과 정비" 역사교육연구회 (103) : 175-209, 2007

      20 徐程錫, "백제 白江의 위치" 69 : 2004

      21 沈正輔, "백강구전투, in 百濟의 滅亡과 復興運動"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22 金榮官, "나당연합군의 침공과 백제의 멸망 in 百濟의 滅亡과 復興運動"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23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실학회 (59) : 43-74, 2016

      24 金周成, "義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과 百濟滅亡" 19 : 1988

      25 남정호, "義慈王 後期 支配層의 分裂과 百濟의 滅亡" 4 : 2010

      26 金榮官, "百濟流民 禰寔進 墓誌 소개" 10 : 2007

      27 徐程錫, "百濟의 城郭" 學硏文化社 2002

      28 成周鐸, "百濟炭峴小考" 2 : 1990

      29 朴賢淑, "百濟地方統治體制硏究" 高麗大 1996

      30 강종원, "百濟 階伯의 身分과 政治的 性格" 28 : 2000

      31 金壽泰,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變動" 5 : 1992

      32 沈正輔, "百濟 復興軍의 主要 據點에 關한 硏究" 14 : 1983

      33 서정석, "百濟 山城을 통해 본 황산벌전투의 현장" 역사교육연구회 (91) : 127-155, 2004

      34 兪元載, "百濟 加林城 硏究" 百濟文化開發硏究院 5 : 1996

      35 沈正輔, "白江의 位置에 대하여" 2 : 1989

      36 徐程錫, "炭峴에 대한 小考" 7 : 2003

      37 洪思俊, "炭峴考-階伯의 三營과 金庾信의 三道" 35·36 : 1967

      38 李文基, "沙沘時代 百濟의 軍事組織과 그 運用" 28 : 1998

      39 徐程錫, "忠南地域의 百濟山城에 關한 一硏究" 22 : 1992

      40 金英心, "忠南地域의 百濟城郭 硏究" 30 : 1999

      41 金壽泰, "7세기대 동아시아사상의 황산벌 전투, in 論山 黃山벌 戰蹟地"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論山市 2000

      42 김주성, "7세기 삼국 고대 전투모습의 재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81) : 43-74, 2011

      43 김종수, "660년 백강 전투와 오성산 전설" 전북사학회 (33) : 5-34, 2008

      44 문동석, "660년 7월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전투" 신라사학회 (38) : 39-63, 2016

      45 김주성, "660년 7월 8일간의 전투 재구성" 백제문화연구소 56 (56): 349-36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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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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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4 0.4 0.4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5 0.43 1.181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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