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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을 향한 꿈 - "생존공간"과 민족 정체성의 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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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수많은 사상자와 전격전의 기원이 된 첫 세계대전이후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분위기였으나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200만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패전의 책임을 전쟁을 지휘했던 군부와 정치가들이 아니라 사회민주당원과 공산당원, 등에게 지우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의도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의식은 일반 국민들 뿐 아니라 지식인과 정치가들에게도 폭넓게 퍼져나간다. 패전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서 찾아낸 “내부의 적들“에 대한 반감은 이후 지속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적 동원과 선동의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한다.
      많은 국민들이 베르사이유 체제 자체를 국민적 거부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아야 할 승전국에 의한 부당한 강제로 받아들이면서, 보수적 집권 엘리트들은 1914년 8월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전 국민적 기대감과 환호의 분위기를 지속시키고자 하였다. 전쟁의 경험과 전쟁의 희생은 국민적 칭송의 대상이 된다. 아울러 영토의 상실은 새로운 제국의 창출을 위한 계기로 이어진다. 사실 바이마르 체제는 공화국 (Republik)이라는 정체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제국 (Reich)이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공화국 헌법이 아니라 “제국헌법” (Reichsverfassung)이었고, 의회는 공화국 의회가 아니라 “제국의회“ (Reichsparlament)로 불리웠다.
      물론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인원과 자원이 동원되어 진행되었지만 본 연구에서 특히 주목하는 바는 공간과 영토의 문제이다.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독일이 이처럼 전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호전적 사고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1) 패전의 책임이 어떠한 방식으로 “내부의 적들”에게 전가되며, 2) 영토의 상실은 어떻게 국민적 일체감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며, 3)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제국에 대한 이념의 내용은 무엇이고 담론의 주된 생산자자들은 어떠한 논리로서 이러한 사고를 생산해 내는가에 대한 탐구에 중점이 놓이게 된다.

      19 세기 이후, 독일에서 Friedrich Ratzel (1844-1904)과 Rudolf Kjellen (1864-1922)의 지리학적 전통을 이어받아 형성되는 <“중부유럽(Mitteleuropa)“ 담론>과 그 구체적 구상, 이들 이론이 도달하게 되는 논리적 귀결성 등이 그 주된 연구대상이다. 이는 지리학의 영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역사지리학과 지정학의 부분이기도 하지만, 본 연구는 이러한 지리학적 관심을 넘어 지리적 열망이 어떻게 독일민족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미 중세부터 이루어져 왔던 대대적인 동부유럽으로의 식민의 기억이 어떻게 국민적 기억으로 형상화 시키는가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역사학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독일의 정체성과 관련 서유럽도 동유럽도 아닌 자신만의 위치로 새로이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업은 이미 19세기부터 시도되어 왔다. (이병철, 2008. 255쪽). 그것은 러시아의 대륙적 패권에 대한 서유럽의 방어선이라는 기존의 역할에 대한 거부였고, 진정한 의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유산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바이마르의 지리학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공간적 운명(Raumschicksal)에 따라 독일은 유럽의 중심부이며 심장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주어졌다고 믿었으며, 이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국을 중/동부 유럽에 건설해야 했다.중부유럽 개념은 이처럼 독일의 동부지배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전개되어졌으며, 다가올 새로운 제국은 인위적 국경선을 제거하고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발견했던 동유럽의 동족들이 포함된 거대한 게르만 민족의 “생존공간“을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 담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새로운 국가” 개념이다. 이러한 담론은 주로 베를린의 시사잡지인 “Tat" 지의 편집자인 (Hans Zehrer)과 그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새로운 제국은 경제적으로는 동부유럽이 편입된 범게르만권의 자급자족 경제를 지향하였으며, 지배형태로는 왕정으로의 복귀부터 독재적 귀족정까지 다양한 논의들이 이루어졌지만 의회민주주의의 지양은 이들의 최소한의 공통분모였다. 특히 독일민족의 유럽 내에서의 새로운 공간구축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정치적, 법적 정당성 구축에 진력한 학자로서 Carl Schmitt를 빼놓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의회주의적 민주정도 전체주의적 히틀러체제도 아닌, 제 3의 길을 찾고자 했던 바이마르의 보수주의자들의 시도와 실패는 역설적으로 보수주의의 허약함이 히틀러의 집권을 불러왔던 주된 요인임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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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사상자와 전격전의 기원이 된 첫 세계대전이후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분위기였으나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200만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패전의 책임을 ...

      수많은 사상자와 전격전의 기원이 된 첫 세계대전이후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분위기였으나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200만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패전의 책임을 전쟁을 지휘했던 군부와 정치가들이 아니라 사회민주당원과 공산당원, 등에게 지우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의도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의식은 일반 국민들 뿐 아니라 지식인과 정치가들에게도 폭넓게 퍼져나간다. 패전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서 찾아낸 “내부의 적들“에 대한 반감은 이후 지속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면서 정치적 동원과 선동의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한다.
      많은 국민들이 베르사이유 체제 자체를 국민적 거부를 통하여 인정하지 않아야 할 승전국에 의한 부당한 강제로 받아들이면서, 보수적 집권 엘리트들은 1914년 8월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전 국민적 기대감과 환호의 분위기를 지속시키고자 하였다. 전쟁의 경험과 전쟁의 희생은 국민적 칭송의 대상이 된다. 아울러 영토의 상실은 새로운 제국의 창출을 위한 계기로 이어진다. 사실 바이마르 체제는 공화국 (Republik)이라는 정체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제국 (Reich)이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공화국 헌법이 아니라 “제국헌법” (Reichsverfassung)이었고, 의회는 공화국 의회가 아니라 “제국의회“ (Reichsparlament)로 불리웠다.
      물론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인원과 자원이 동원되어 진행되었지만 본 연구에서 특히 주목하는 바는 공간과 영토의 문제이다.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독일이 이처럼 전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호전적 사고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1) 패전의 책임이 어떠한 방식으로 “내부의 적들”에게 전가되며, 2) 영토의 상실은 어떻게 국민적 일체감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며, 3)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제국에 대한 이념의 내용은 무엇이고 담론의 주된 생산자자들은 어떠한 논리로서 이러한 사고를 생산해 내는가에 대한 탐구에 중점이 놓이게 된다.

      19 세기 이후, 독일에서 Friedrich Ratzel (1844-1904)과 Rudolf Kjellen (1864-1922)의 지리학적 전통을 이어받아 형성되는 <“중부유럽(Mitteleuropa)“ 담론>과 그 구체적 구상, 이들 이론이 도달하게 되는 논리적 귀결성 등이 그 주된 연구대상이다. 이는 지리학의 영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역사지리학과 지정학의 부분이기도 하지만, 본 연구는 이러한 지리학적 관심을 넘어 지리적 열망이 어떻게 독일민족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미 중세부터 이루어져 왔던 대대적인 동부유럽으로의 식민의 기억이 어떻게 국민적 기억으로 형상화 시키는가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역사학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독일의 정체성과 관련 서유럽도 동유럽도 아닌 자신만의 위치로 새로이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업은 이미 19세기부터 시도되어 왔다. (이병철, 2008. 255쪽). 그것은 러시아의 대륙적 패권에 대한 서유럽의 방어선이라는 기존의 역할에 대한 거부였고, 진정한 의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유산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바이마르의 지리학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공간적 운명(Raumschicksal)에 따라 독일은 유럽의 중심부이며 심장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주어졌다고 믿었으며, 이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국을 중/동부 유럽에 건설해야 했다.중부유럽 개념은 이처럼 독일의 동부지배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전개되어졌으며, 다가올 새로운 제국은 인위적 국경선을 제거하고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발견했던 동유럽의 동족들이 포함된 거대한 게르만 민족의 “생존공간“을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 담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새로운 국가” 개념이다. 이러한 담론은 주로 베를린의 시사잡지인 “Tat" 지의 편집자인 (Hans Zehrer)과 그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새로운 제국은 경제적으로는 동부유럽이 편입된 범게르만권의 자급자족 경제를 지향하였으며, 지배형태로는 왕정으로의 복귀부터 독재적 귀족정까지 다양한 논의들이 이루어졌지만 의회민주주의의 지양은 이들의 최소한의 공통분모였다. 특히 독일민족의 유럽 내에서의 새로운 공간구축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정치적, 법적 정당성 구축에 진력한 학자로서 Carl Schmitt를 빼놓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의회주의적 민주정도 전체주의적 히틀러체제도 아닌, 제 3의 길을 찾고자 했던 바이마르의 보수주의자들의 시도와 실패는 역설적으로 보수주의의 허약함이 히틀러의 집권을 불러왔던 주된 요인임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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