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러시아 프리메이슨 연구를 위한 전제들 첫째, 러시아 프리메이슨의 형성과 실체에 대한 오늘날까지의 학문적 탐색의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으며, 러시아 프리메이슨의 연구 성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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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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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러시아 프리메이슨 연구를 위한 전제들
첫째, 러시아 프리메이슨의 형성과 실체에 대한 오늘날까지의 학문적 탐색의 결과물이 그리 많지 않으며, 러시아 프리메이슨의 연구 성과가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라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둘째, 프리메이슨이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수직적 계급체계를 가지는 어떤 ‘단일한’ 조직이라는 오해이다. ‘근대적’ 의미의 프리메이슨은 1717년 영국에서 단일조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유럽 및 북미의 대륙으로 퍼지면서 각국의 정치적-문화적 맥락에서 ‘현지화’되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한다. 이는 러시아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셋째, 프리메이슨의 ‘비밀주의’는 사회와 국가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스스로 설정해 놓은 자기 정체성 확립이라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전제하여야 한다. 그들의 비밀이란, 이를테면 그들이 비밀이라 주장한 ‘철학의 돌’, ‘연금술’ 등은 그것에 대한 비밀이 결코 밝혀지지 않는 한에서만(혹은 밝혀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의미와 제 역할을 지니는 것이다.
“두 국가” - 프리메이슨과 예카테리나 2세
1770년대까지 프리메이슨들과 국가(예카테리나2세)의 관계는 ‘암묵적’ 협력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의 경우에 국가를 통하여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었고, 국가의 경우에도 프리메이슨을 통하여 “국가의 통치와 사회적 안정성”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교육의 이념과 여러 다양한 이유로 그들 사이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더 정확히는 프리메이슨 내에서 친정부적 성향과 반정부적 성향으로 양분되면서 친정부적 성격의 프리메이슨(주로 페테르부르그 프리메이슨들)은 국가체제로 흡수되었고, 모스크바의 프리메이슨은 반정부적 성격이 더욱 짙어졌다. 이는 한편으로 프리메이슨 내부의 문제(프리메이슨 내에서 합리주의의 쇠퇴)이기도 하면서 역사적-사회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데, 푸가쵸프의 난을 거치고 앞으로 닥칠 프랑스의 혁명의 기운과 미국의 독립운동을 예카테리나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우 프리메이슨의 등장과 함께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의 연구를 통해 주장 혹은 증명되고 있는데, 이들의 연구는 18세기 러시아 프리메이슨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해석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기대어 보면, 예카테리나의 정치/통치와 프리메이슨의 사회활동은 그 계몽적 성격은 공유하고 있으나, 러시아를 국가로 보느냐, 사회로 보느냐의 차이로 인해 근본으로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Либан의 비유적 표현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는 예카테리나의 러시아와 노비코프의 모스크바라는 ‘두 국가’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계몽의 무기, 문학.
노비코프와 예카테리나 2세간의 갈등관계는 무엇보다도 문학활동을 통해 첨예하게 드러난다. 우선 예카테리나의 저널 “별의 별것들”과 노비코프의 “수펄” 사이에는 풍자Сатира의 성격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존재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소위 ‘안티-프리메이슨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예카테리나 2세의 희곡 작품들 - “Обманщик”(1785), “Шаман Сибирский”(1786), “Обольщенный”(1786) - 이다. 그녀는 이 희곡의 도움으로 프리메이슨에 반대하는 사회적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프리메이슨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가 자신의 국가에 대한 통치권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녀의 작품에서 프리메이슨들을 “사기꾼”, “협잡꾼”, “주술사” 등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봉쇄하고자 했다. 반면 프리메이슨의 입장에서는 계몽주의, 선행, 사회적 유용성, 인류애적 구호활동 등을 내세우면서 ‘좋은 시민’의 이념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그들을 통해 “사회적 여론”이 탄생했고, ‘계몽사회’를 출현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몽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여론전에서 무엇보다도 문학을 무기로 삼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