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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 Balkanpolitik RuBlands und Osterreichs vor dem ersten Weltkrieg = 世界 第1次 大戰前 露墺兩帝國의 Balkan政策에 關할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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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207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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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恒時 「世界의 火藥庫」로 불려졌고 現在도 키프로스問題를 비롯, 여러 가지 紛爭點을 안고있는 Balkan 半島에서 76年初 Balkan 半島 5個國間의 地域協力 可能性을 摸索하는 Balkan 會議가 開催되었다.
      오늘날 Balkan 半島에는 蘇聯圈의 불가리아, 新中共的인 알바니아, 非同盟의 유고, 獨自路線을 걷고있는 루마니아, 西方側의 그리스와 터키가 서로 도사리고있어 「世界의 縮圖」라고도 할만한 地域이다. 이러한 Balkan 地域에 最近 外交的動搖가 눈에 띄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特히 Balkan 諸國의 政治的接近과 結束으로 蘇聯等 外勢로 부터의 影響을 沮止시켜 보자는 Balkan 諸國의 努力이지만 戰後 東西의 政治·軍事블록이 再三再四 交替된 곳인 만큼 難航이 거듭 될 뿐이며, 더욱이 Balkan 諸國의 政治的意義를 읽고 있는 蘇聯은 Balkan 會議 開催初부터 黑海와 가스피海사이에서 陸空機動演習을 實施하여, Balkan 會議를 側面로부터 견제하는 인상을 주었고 蘇聯이 機動訓練에 그리스와 터키를 비롯 이들 5個國의 옵서버를 招請한 것은 Balkan 半島의 自由化 乃至 陣營化를 憂慮 壓力을 加해보자는 속셈을 들어낸 것이었다.
      實로 蘇聯이 Balkan 半島에 憂慮하고 있는 背景에는 歷史的으로 數많은 Balkan 條約等의 先例가 있기 때문에 如何한 反蘇的인 움직임도 용서 할수없다는 强硬策이기도하다. 이러한 蘇聯의 最近 움직임은 「世界의 火藥庫」인 Balkan 半島의 政勢를 더욱 激化시키지나 않을지 憂慮되며, 國際緊張緩和로 因한 政情의 流動化와 未來에 對한 多角的인 選擇을 摸索하려는 Balkan 諸國은 새로운 局面에 부디쳐 事態의 進展이 注目된다. 이에 本稿는 今世紀初 露墺兩諸國의 Balkan 政策을 分析比較하므로서 第1次世界大戰의 火藥庫가 되어버린 Balkan 半島의 政情을 보다 正確하게 史的으로 究明하고저 한다.
      20世紀 前後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의 두차례에 걸친 戰爭에서 勝利한 日本은 極東에서의 地位가 强化되어 그 侵略政策을 더욱 活潑히 推進하게 되었으면 1905年 11月 에는 韓國에 保護條約을 强要하여 그 外交權을 빼앗고 1910年 8月에는 韓國의 全民族的인 反抗을 무릅쓰고 그 倂合을 强行하여 滿洲에의 戰略的 要地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한편 露日戰爭에서 敗北한 露西亞帝國의 外交政策의 一大轉換은 유럽大陸의 國際關係에 對해 새로운 局面을 이룩하게 되었다. 露西亞外交가 極東에 있어서의 全面的인 挫折은 그 方向을 再三 Balkan 半島로 옮기게 했고 그 外交는 1906年以來 Iswolski 外相에 依해 構築되어 진 것이다.
      그러나 Bulgaria 事件以來 暫定的인 露墺關係의 緩和는 다시 緊張이 高潮되고 當時 Balkan 半島에 있어서 露西亞의 威脅이 되었든 것은 墺國뿐이 아니었고, Bagdad 鐵道建設計劃을 推進中에 있는 獨逸帝國과 兩海峽을 重視하는 露西亞와의 關係도 매우 徵妙한 것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따라서 英國은, 極東地域에서 露西亞勢力이 逐出된 뒤 獨逸과의 緊張化를 露日戰爭後 英國은 對露接近을 懸案으로 삼게 되고 露佛同盟과 英佛協商을 앞서 이룩시킨 佛蘭西 또한 英露接近을 爲해 盡力시킨 나머지 1907年 英露協商을 成立케 한 것이다. 英國이 유럽大陸에 있어서 兩陣營中 그 한陣營에 加擔하게 되었다는 事實은 유럽의 勢力均衡을 어지럽히는 結果가 되었고 그 以後 유럽의 平和는 不安定한 基礎위에 놓여진 것이다.
      當時 獨逸은 唯一無二한 墺地利와의 友好關係를 重視치 않을 수 없게 되고 獨逸外交는 자연히 墺國의 Balkan 政策에 追從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政勢속에 Balkan 半島는 露墺樹立의 樣相이 한層 激化되었고 Balkan의 危機는 유럽大陸의 危機라는 性格을 두텁게 한 것이다.
      實로 20世紀에 들어서자 Balkan에서는 Serbia人, Slowenia人, Kroatia人, Bosnia人 等 南 Slav系 諸民族의 大 Serbia 主義運動이 深刻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 運動의 目的은 土耳其와 墺地利의 支配下에 있는 Serbia人과 그外의 모든 Slav 族을 結合하여 大 Serbia 國을 建設하려는 것이며 1903年 6月 親墺地利的인 Alexander 國王과 그 閣僚의 暗殺을 契機로 이 運動은 反墺地利的인 色彩를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Serbia에는 Peter 1世가 王位에 올랐으며 그는 大 Serbia 主義의 領導者로서 大 Serbia 主義의 旗幟下에 王朝의 運命을 開拓하려고 하였든 것이다. 이리하여 Serbia는 漸次 露西亞에 接近하게 되었고 이에 墺地利는 큰 威脅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08年 1月 墺地利 Aehrenthal 外相이 土耳其로부터 Sandschak 鐵道開設權을 取得하고 이를 列國에 通告하게 되자 Balkan 半島에는 또 다시 큰風波가 일어나게 되고 墺露間에 締結된 1897年 協定은 事實上 깨어지게 되었다. 한편 露西亞外相 Iswolski는 Sandschak 鐵道事件의 憤怒를 抑制하고 英國王 Eduard 7世의 露西亞訪問을 契機로 海峽問題解決이라는 歷史的課題를 實現하려고 努力하며서, 墺露兩國間에도 Bosnia 問題와 海峽問題를 友好的으로 討議할 것을 希望한다고 通告하였다. 때 마침 靑年土耳其黨에 依한 土耳其革命과 Bosnia, Herzegowina 兩州의 法的地位를 明白히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Aehrenthal 外相도 이에 同意하고 歷史的인 Buchlau 秘密會談이 開催되었다.
      그러나 Buchlau 會談은 兩國外相間에 다만 友好的인 態度를 取해 보겠다는 約束이였으나 Aehrenhal 外相의 獨斷的인 兩州倂合宣言이 發表되므로서 Serbia는 激憤하여 戰爭準備에 着手되고 露西亞는 國際會議召集을 通해 再論할 것을 英國과 佛蘭西에 要請하게되었다. 그렇지만 露西亞는 國際會議에 列國이 應해 주지않고 土耳其와 墺地利는 兩州의 國有地에 對한 賠償과 經濟的利權을 約束하고 正式協定에 調印하였기 때문에 事實上 露西亞로서는 兩州倂合을 承認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이리하여 露西亞와 Serbia는 屈辱的인 誠意表示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Bosnia의 危機는 墺地利의 勝利로 끝을 맺었지만 그 勝利는 向後重大한 戰爭의 씨앗을 남겨놓은 表面的인 勝利에 不過했고 墺露兩國間의 決定的인 段階에 이르게 되고 墺國과 Serbia는 宿敵이 되었든 것이다. 그리하여 Balkan 情勢는 露伊의 接近으로 急變되고 伊墺兩國間의 對立은 結局 1909年 露伊間의 Racconigi 協定의 締結로 進展되었다.
      墺地利에 依한 Bosnia, Herzegowina 兩州의 倂合은 實際 Balkan 事態를 한層 激化시킨 것은 事實이지만 1911年 佛蘭西의 Marokko 政策推進은 直接的인 Balkan 半島의 不安定한 平和를 破壤하였으니 伊太利는 Tripoli 倂合을 爲해 伊土戰爭을 誘發시키고 만 것이다. 佛蘭西의 Marokko 政策, 伊太利의 Tripoli 政策에 依해 土耳其帝國이 崩壞되는 過程에 이르므로서 Balkan 半島는 1912年 드디어 유럽·土耳其의 分解作用으로서 Balkan 戰爭이 開始되었다. Balkan의 1次. 2次戰爭中 諸列强은 戰爭을 局地化시키기 爲해 努力은 했으나 積極的인 改善策이나 根本的인 平和政策을 購究하지 못한 結果 유럽의 不安要素는 增大 되었다.
      當時 露西亞帝國의 兩海峽政策은 活潑하여 兩海峽을 支配해오든 土耳其를 無氣力化시켰으며 露西亞의 海上活動은 好機를 맞았든 것이다. 露西亞帝國의 兩海峽政策은 獨墺關係를 더욱 惡化시키는 것이되어 이와聯關된 情勢變化는 1914年 1月 露西亞와 佛蘭西間에 新融資協定을 締結하게되고 이 協定을 通해 露西亞는 西部國境地帶에 戰略的鐵道資金으로 使用될 수 있는 資力을 支援받게 된 셈이다. 그래서 露西亞의 兩海峽政策强化, 露와 墺獨對立의 惡化, 露佛關係의 結合은 大戰前夜의 유럽情勢를 不安狀態로 增大시킨 結果가 되었다.
      한편 Serbia는 增加된 國力과 精力으로 Slav 民族運動을 强力히 推進하게 되고 事實土耳其는 Balkan 半島에서 無氣力해져 이時期에 벌써 Yugo-Slav 民族의 解放과 獨立運動은 거의 成就段階에 이르고 對墺感情은 極히 高潮된바 墺地利 또한 事態를 注視하여 强硬一邊策이 된 것이다. 따라서 墺地利領內에 殘在된 Slav 民族의 解放運動이 最極盛에 이르자 墺地利의 不安은 深刻化되고 機會를 보아 Serbia께 打擊을 주지 않을 수 없는 段階에 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情勢惡化와 不安에도 不拘하고 諸列强은 國際緊張緩和나 Balkan 半島의 平和定着을 爲한 講究보다 軍備擴充과 自國의 利益確保에 血眼이 되어 Balkan 事態의 局地化나 紛爭解決를 爲한 協調는 不可能한 것이 되었다.
      이는 곧 1914年 6月末 Sarajevo 事件發生으로 墺地利의 强硬策은 對 Serbia 宣戰布告가 이룩되고 이로부터 第1次 世界大戰의 砲門은 全유럽과 全人類의 悲劇을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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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恒時 「世界의 火藥庫」로 불려졌고 現在도 키프로스問題를 비롯, 여러 가지 紛爭點을 안고있는 Balkan 半島에서 76年初 Balkan 半島 5個國間의 地域協力 可能性을 摸索하는 Balkan 會議가 開催되...

      恒時 「世界의 火藥庫」로 불려졌고 現在도 키프로스問題를 비롯, 여러 가지 紛爭點을 안고있는 Balkan 半島에서 76年初 Balkan 半島 5個國間의 地域協力 可能性을 摸索하는 Balkan 會議가 開催되었다.
      오늘날 Balkan 半島에는 蘇聯圈의 불가리아, 新中共的인 알바니아, 非同盟의 유고, 獨自路線을 걷고있는 루마니아, 西方側의 그리스와 터키가 서로 도사리고있어 「世界의 縮圖」라고도 할만한 地域이다. 이러한 Balkan 地域에 最近 外交的動搖가 눈에 띄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特히 Balkan 諸國의 政治的接近과 結束으로 蘇聯等 外勢로 부터의 影響을 沮止시켜 보자는 Balkan 諸國의 努力이지만 戰後 東西의 政治·軍事블록이 再三再四 交替된 곳인 만큼 難航이 거듭 될 뿐이며, 더욱이 Balkan 諸國의 政治的意義를 읽고 있는 蘇聯은 Balkan 會議 開催初부터 黑海와 가스피海사이에서 陸空機動演習을 實施하여, Balkan 會議를 側面로부터 견제하는 인상을 주었고 蘇聯이 機動訓練에 그리스와 터키를 비롯 이들 5個國의 옵서버를 招請한 것은 Balkan 半島의 自由化 乃至 陣營化를 憂慮 壓力을 加해보자는 속셈을 들어낸 것이었다.
      實로 蘇聯이 Balkan 半島에 憂慮하고 있는 背景에는 歷史的으로 數많은 Balkan 條約等의 先例가 있기 때문에 如何한 反蘇的인 움직임도 용서 할수없다는 强硬策이기도하다. 이러한 蘇聯의 最近 움직임은 「世界의 火藥庫」인 Balkan 半島의 政勢를 더욱 激化시키지나 않을지 憂慮되며, 國際緊張緩和로 因한 政情의 流動化와 未來에 對한 多角的인 選擇을 摸索하려는 Balkan 諸國은 새로운 局面에 부디쳐 事態의 進展이 注目된다. 이에 本稿는 今世紀初 露墺兩諸國의 Balkan 政策을 分析比較하므로서 第1次世界大戰의 火藥庫가 되어버린 Balkan 半島의 政情을 보다 正確하게 史的으로 究明하고저 한다.
      20世紀 前後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의 두차례에 걸친 戰爭에서 勝利한 日本은 極東에서의 地位가 强化되어 그 侵略政策을 더욱 活潑히 推進하게 되었으면 1905年 11月 에는 韓國에 保護條約을 强要하여 그 外交權을 빼앗고 1910年 8月에는 韓國의 全民族的인 反抗을 무릅쓰고 그 倂合을 强行하여 滿洲에의 戰略的 要地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한편 露日戰爭에서 敗北한 露西亞帝國의 外交政策의 一大轉換은 유럽大陸의 國際關係에 對해 새로운 局面을 이룩하게 되었다. 露西亞外交가 極東에 있어서의 全面的인 挫折은 그 方向을 再三 Balkan 半島로 옮기게 했고 그 外交는 1906年以來 Iswolski 外相에 依해 構築되어 진 것이다.
      그러나 Bulgaria 事件以來 暫定的인 露墺關係의 緩和는 다시 緊張이 高潮되고 當時 Balkan 半島에 있어서 露西亞의 威脅이 되었든 것은 墺國뿐이 아니었고, Bagdad 鐵道建設計劃을 推進中에 있는 獨逸帝國과 兩海峽을 重視하는 露西亞와의 關係도 매우 徵妙한 것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따라서 英國은, 極東地域에서 露西亞勢力이 逐出된 뒤 獨逸과의 緊張化를 露日戰爭後 英國은 對露接近을 懸案으로 삼게 되고 露佛同盟과 英佛協商을 앞서 이룩시킨 佛蘭西 또한 英露接近을 爲해 盡力시킨 나머지 1907年 英露協商을 成立케 한 것이다. 英國이 유럽大陸에 있어서 兩陣營中 그 한陣營에 加擔하게 되었다는 事實은 유럽의 勢力均衡을 어지럽히는 結果가 되었고 그 以後 유럽의 平和는 不安定한 基礎위에 놓여진 것이다.
      當時 獨逸은 唯一無二한 墺地利와의 友好關係를 重視치 않을 수 없게 되고 獨逸外交는 자연히 墺國의 Balkan 政策에 追從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政勢속에 Balkan 半島는 露墺樹立의 樣相이 한層 激化되었고 Balkan의 危機는 유럽大陸의 危機라는 性格을 두텁게 한 것이다.
      實로 20世紀에 들어서자 Balkan에서는 Serbia人, Slowenia人, Kroatia人, Bosnia人 等 南 Slav系 諸民族의 大 Serbia 主義運動이 深刻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 運動의 目的은 土耳其와 墺地利의 支配下에 있는 Serbia人과 그外의 모든 Slav 族을 結合하여 大 Serbia 國을 建設하려는 것이며 1903年 6月 親墺地利的인 Alexander 國王과 그 閣僚의 暗殺을 契機로 이 運動은 反墺地利的인 色彩를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Serbia에는 Peter 1世가 王位에 올랐으며 그는 大 Serbia 主義의 領導者로서 大 Serbia 主義의 旗幟下에 王朝의 運命을 開拓하려고 하였든 것이다. 이리하여 Serbia는 漸次 露西亞에 接近하게 되었고 이에 墺地利는 큰 威脅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08年 1月 墺地利 Aehrenthal 外相이 土耳其로부터 Sandschak 鐵道開設權을 取得하고 이를 列國에 通告하게 되자 Balkan 半島에는 또 다시 큰風波가 일어나게 되고 墺露間에 締結된 1897年 協定은 事實上 깨어지게 되었다. 한편 露西亞外相 Iswolski는 Sandschak 鐵道事件의 憤怒를 抑制하고 英國王 Eduard 7世의 露西亞訪問을 契機로 海峽問題解決이라는 歷史的課題를 實現하려고 努力하며서, 墺露兩國間에도 Bosnia 問題와 海峽問題를 友好的으로 討議할 것을 希望한다고 通告하였다. 때 마침 靑年土耳其黨에 依한 土耳其革命과 Bosnia, Herzegowina 兩州의 法的地位를 明白히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Aehrenthal 外相도 이에 同意하고 歷史的인 Buchlau 秘密會談이 開催되었다.
      그러나 Buchlau 會談은 兩國外相間에 다만 友好的인 態度를 取해 보겠다는 約束이였으나 Aehrenhal 外相의 獨斷的인 兩州倂合宣言이 發表되므로서 Serbia는 激憤하여 戰爭準備에 着手되고 露西亞는 國際會議召集을 通해 再論할 것을 英國과 佛蘭西에 要請하게되었다. 그렇지만 露西亞는 國際會議에 列國이 應해 주지않고 土耳其와 墺地利는 兩州의 國有地에 對한 賠償과 經濟的利權을 約束하고 正式協定에 調印하였기 때문에 事實上 露西亞로서는 兩州倂合을 承認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이리하여 露西亞와 Serbia는 屈辱的인 誠意表示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Bosnia의 危機는 墺地利의 勝利로 끝을 맺었지만 그 勝利는 向後重大한 戰爭의 씨앗을 남겨놓은 表面的인 勝利에 不過했고 墺露兩國間의 決定的인 段階에 이르게 되고 墺國과 Serbia는 宿敵이 되었든 것이다. 그리하여 Balkan 情勢는 露伊의 接近으로 急變되고 伊墺兩國間의 對立은 結局 1909年 露伊間의 Racconigi 協定의 締結로 進展되었다.
      墺地利에 依한 Bosnia, Herzegowina 兩州의 倂合은 實際 Balkan 事態를 한層 激化시킨 것은 事實이지만 1911年 佛蘭西의 Marokko 政策推進은 直接的인 Balkan 半島의 不安定한 平和를 破壤하였으니 伊太利는 Tripoli 倂合을 爲해 伊土戰爭을 誘發시키고 만 것이다. 佛蘭西의 Marokko 政策, 伊太利의 Tripoli 政策에 依해 土耳其帝國이 崩壞되는 過程에 이르므로서 Balkan 半島는 1912年 드디어 유럽·土耳其의 分解作用으로서 Balkan 戰爭이 開始되었다. Balkan의 1次. 2次戰爭中 諸列强은 戰爭을 局地化시키기 爲해 努力은 했으나 積極的인 改善策이나 根本的인 平和政策을 購究하지 못한 結果 유럽의 不安要素는 增大 되었다.
      當時 露西亞帝國의 兩海峽政策은 活潑하여 兩海峽을 支配해오든 土耳其를 無氣力化시켰으며 露西亞의 海上活動은 好機를 맞았든 것이다. 露西亞帝國의 兩海峽政策은 獨墺關係를 더욱 惡化시키는 것이되어 이와聯關된 情勢變化는 1914年 1月 露西亞와 佛蘭西間에 新融資協定을 締結하게되고 이 協定을 通해 露西亞는 西部國境地帶에 戰略的鐵道資金으로 使用될 수 있는 資力을 支援받게 된 셈이다. 그래서 露西亞의 兩海峽政策强化, 露와 墺獨對立의 惡化, 露佛關係의 結合은 大戰前夜의 유럽情勢를 不安狀態로 增大시킨 結果가 되었다.
      한편 Serbia는 增加된 國力과 精力으로 Slav 民族運動을 强力히 推進하게 되고 事實土耳其는 Balkan 半島에서 無氣力해져 이時期에 벌써 Yugo-Slav 民族의 解放과 獨立運動은 거의 成就段階에 이르고 對墺感情은 極히 高潮된바 墺地利 또한 事態를 注視하여 强硬一邊策이 된 것이다. 따라서 墺地利領內에 殘在된 Slav 民族의 解放運動이 最極盛에 이르자 墺地利의 不安은 深刻化되고 機會를 보아 Serbia께 打擊을 주지 않을 수 없는 段階에 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情勢惡化와 不安에도 不拘하고 諸列强은 國際緊張緩和나 Balkan 半島의 平和定着을 爲한 講究보다 軍備擴充과 自國의 利益確保에 血眼이 되어 Balkan 事態의 局地化나 紛爭解決를 爲한 協調는 不可能한 것이 되었다.
      이는 곧 1914年 6月末 Sarajevo 事件發生으로 墺地利의 强硬策은 對 Serbia 宣戰布告가 이룩되고 이로부터 第1次 世界大戰의 砲門은 全유럽과 全人類의 悲劇을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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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Vorwort
      • Ⅰ. Die Entwicklung zur Tripleetente in Europa
      • 1. Die Umstellung der russischen Aubenpolitik.
      • 2. Die Annexionspoltik Osterreichs am Balkan.
      • Vorwort
      • Ⅰ. Die Entwicklung zur Tripleetente in Europa
      • 1. Die Umstellung der russischen Aubenpolitik.
      • 2. Die Annexionspoltik Osterreichs am Balkan.
      • Ⅱ. Die Bosnische Krise zwischen RuBland und Osterreich.
      • 1. Die Politik Iswolskis und Aehrenthals.
      • 2. Die Besprechung von SchloB Buchl며.
      • 3. Die Wirkung der bosnischen Krise.
      • Ⅲ. Die Balkankriege
      • 1. Die Politik Sasonows.
      • 2. Die russische Politik zur Schaffung eines Balkanblocks.
      • 3. Der Ⅰ. und Ⅱ. Balkankrieg.
      • Ⅳ. Die Wirkung auf den ersten Weltkrieg.
      • 1. Die Situation Balkans.
      • 2. Die Entwicklung in Osterreich vor dem Ersten Weltk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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