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는 570년 倭國에 使節을 보내, 그동안의 적대적인 양국관계를 뒤로 하고 외교관계를 열고자 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외교의 전환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해, 고구려가 당면하고 있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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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2009
Korean
학술저널
53-9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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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高句麗는 570년 倭國에 使節을 보내, 그동안의 적대적인 양국관계를 뒤로 하고 외교관계를 열고자 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외교의 전환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해, 고구려가 당면하고 있던 현...
高句麗는 570년 倭國에 使節을 보내, 그동안의 적대적인 양국관계를 뒤로 하고 외교관계를 열고자 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외교의 전환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해, 고구려가 당면하고 있던 현안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고, 그 대책으로써의 對倭外交는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를 살핀 것이다.
그 결과 이 무렵 고구려가 新羅의 군사적 위협으로 위기에 몰려있었다는 기왕의 이해와 달리, 고구려의 반격으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위기에 직면해서 나온 대책이 아니라 앞서의 경험을 토대로 세워진 대외전략의 일환이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신라와 北齊 간에 冊封朝頁의 관계가 맺어졌다는 사실이 고구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신라와 같은 한반도 내의 적대세력과, 고구려로 보아서 西方의 중국세력이 연계를 도모했다는 점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안의 내용으로 보아 재발의 가능성은 농후하였다. 고구려의 대왜외교가 장차의 변화에 대비하는 전략이 되었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한편 외교의 추진시점으로 보아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陳에의 외교와 짝하였다. 특히 570년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뒤이어 진에 사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양자간의 연관성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로보아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왜외교를 대외전략의 전부인양 이해하여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왜외교의 경과와 성과에 관련하여서는, 고구려가 왜국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과 왜국과의 외교관계 구축이 여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로보아 고구려가 왜국과 연계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왜국의 입장을 돌려놓아야 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 의해 고구려는 595년 승려 慧慈를 聖德太子의 스승으로 보낼 수 있었고, 왜국의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나아가 東海-越-大和로 이어지는 교섭로를 개척하고 이 루트가 양국 간의 공식적인 통로로 자리 잡도록 했다는 것도 570년대 대왜외교가 거둔 성과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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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이력
|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 2028 | 평가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 2022-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 2019-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
| 2016-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 |
| 2014-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 2016 | 1.18 | 1.18 | 1.06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 0.96 | 0.97 | 2.484 | 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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