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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인천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의 삶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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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은 재인천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에 대한 인물연구다. 고타니는 1889년 4살 무렵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인천에 건너와 살다가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철수해간 식민1세이다. 그는 고베(神戶) 출신으로, 개항 초기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드문 경우에 속한다. 미장이 신분의 고타니 토메요시가 부친으로 추정되는바, 일본의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고타니의 본격적인 사회 진출은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신자로서 인천 일본 기독교청년회를 통해서였다. 그는 1926년경 기독교청년회 주사로서 당시 새로이 등장한 ‘사회사업’을 결합한 다양한 활동으로 사회에 알려졌다. 그 후 1931년 6월 『인천부사』 편찬자로 위촉되어, 실질적으로 편찬을 주도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에 비해 빠른 기간 내에 완성했다.
      이후 고타니는 인천제2공립보통학교와 인천중학교 설립에 큰돈을 기부함으로써 일본천황의 감수포장을 수여하는 등 인천 사회의 유력자로 부상했다. 1935년 5월 인천부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그의 직업은 대가업자(貸家業者)였다. 1937년 전시체제기에는 정회(町會)의 총대 및 보호관찰소의 촉탁보호사를 겸직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후에는 인천부회 부의장으로서 재인천일본인의 철수작업을 이끌었고, 그 과정을 『인천 인양(철수)지』로 남겼다.
      고타니는 스스로 “조선의 풍토와 자연이 키워준 인천아(仁川兒)”라고 칭했다. 미장이 집안의 하층계급 출신이 식민지 이주 40년 만에 인천 사회의 유력자가 됨으로써 인생역전의 기회를 얻었으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그가 4살 때부터 57년간 살았던, 그래서 꿈에도 그리운 땅 仁川은 인천이 아니라 진센(Jinsen)이었으니, 기실 그는 인천아가 아니라 진센코(Jinsenk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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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재인천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에 대한 인물연구다. 고타니는 1889년 4살 무렵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인천에 건너와 살다가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철수해간 식민1세이...

      본 논문은 재인천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에 대한 인물연구다. 고타니는 1889년 4살 무렵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인천에 건너와 살다가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철수해간 식민1세이다. 그는 고베(神戶) 출신으로, 개항 초기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드문 경우에 속한다. 미장이 신분의 고타니 토메요시가 부친으로 추정되는바, 일본의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고타니의 본격적인 사회 진출은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신자로서 인천 일본 기독교청년회를 통해서였다. 그는 1926년경 기독교청년회 주사로서 당시 새로이 등장한 ‘사회사업’을 결합한 다양한 활동으로 사회에 알려졌다. 그 후 1931년 6월 『인천부사』 편찬자로 위촉되어, 실질적으로 편찬을 주도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에 비해 빠른 기간 내에 완성했다.
      이후 고타니는 인천제2공립보통학교와 인천중학교 설립에 큰돈을 기부함으로써 일본천황의 감수포장을 수여하는 등 인천 사회의 유력자로 부상했다. 1935년 5월 인천부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그의 직업은 대가업자(貸家業者)였다. 1937년 전시체제기에는 정회(町會)의 총대 및 보호관찰소의 촉탁보호사를 겸직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후에는 인천부회 부의장으로서 재인천일본인의 철수작업을 이끌었고, 그 과정을 『인천 인양(철수)지』로 남겼다.
      고타니는 스스로 “조선의 풍토와 자연이 키워준 인천아(仁川兒)”라고 칭했다. 미장이 집안의 하층계급 출신이 식민지 이주 40년 만에 인천 사회의 유력자가 됨으로써 인생역전의 기회를 얻었으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그가 4살 때부터 57년간 살았던, 그래서 꿈에도 그리운 땅 仁川은 인천이 아니라 진센(Jinsen)이었으니, 기실 그는 인천아가 아니라 진센코(Jinsenk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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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is a Study on Kotani Masujiro(小谷益次郞), the Japanese settler in Incheon under the Colonial Period. In 1889, maybe four, he had came to Incheon in his mother’s arms. Ever since he had lived in there till back to Japan after the World War II. He was from Kobe(神戶), his father was a plasterer that was the lower class in Japan. He came to with all of the family members in the Opening Port Era, the case was rare.
      At the age of early forties, he went out the society as a chief manager of the Japanes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He belonged to the Japanese Methodist church. He was known for ‘Choseon social work’, as he had combined the activities of a Christian youth group with the social works, and had done a wide variety of activities. In June 1931, he was requested to publish Incheonbusa(仁川府史, the history of Incheon Prefecture), he led to the publication as a chief compiler, and published it successfully faster than other area’s case.
      And then, he had donated for establishment of High Normal School (普通学校) in the end of 1932, and Incheon Middle School in April 1934. In return for donations, he received an award by the Emperor of Japan in February 1937. In May 1935, he was elected the member of Incheon Provincial Council(仁川府會), and at that time he was a housing lease businessman. Two years later, he was appointed a JungChongdea(町總代, the representative of the neighborhood) and a Part-time Probation Officer(囑託保護司).
      But when Imperial Japan eventually surrendered in August 15 1945, he had to be repatriated. Being a vice chairman of Incheon Provincial Council, he negotiated with U.S. Military Command and had led the phased withdrawal of the Japanese settlers in Incheon. He went away Incheon on March 2, 1946, and settled in Nagasaki(長崎), Japan. Two years later, he wrote the record of the Japanese Pullout from Incheon (仁川引揚誌). He called it the message of condolence for Incheon.
      He called himself “a son of Incheon(仁川兒)”, because of growing up in nature and climate of Incheon since the age of four. During 57 years living there, he moved up a powerful influence away from the lower class in Japan. Because of achieving a chance of life there, he deserved to called himself “a son of Incheon”. However, that was not Incheon but Ji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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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Paper is a Study on Kotani Masujiro(小谷益次郞), the Japanese settler in Incheon under the Colonial Period. In 1889, maybe four, he had came to Incheon in his mother’s arms. Ever since he had lived in there till back to Japan after the Wor...

      This Paper is a Study on Kotani Masujiro(小谷益次郞), the Japanese settler in Incheon under the Colonial Period. In 1889, maybe four, he had came to Incheon in his mother’s arms. Ever since he had lived in there till back to Japan after the World War II. He was from Kobe(神戶), his father was a plasterer that was the lower class in Japan. He came to with all of the family members in the Opening Port Era, the case was rare.
      At the age of early forties, he went out the society as a chief manager of the Japanes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He belonged to the Japanese Methodist church. He was known for ‘Choseon social work’, as he had combined the activities of a Christian youth group with the social works, and had done a wide variety of activities. In June 1931, he was requested to publish Incheonbusa(仁川府史, the history of Incheon Prefecture), he led to the publication as a chief compiler, and published it successfully faster than other area’s case.
      And then, he had donated for establishment of High Normal School (普通学校) in the end of 1932, and Incheon Middle School in April 1934. In return for donations, he received an award by the Emperor of Japan in February 1937. In May 1935, he was elected the member of Incheon Provincial Council(仁川府會), and at that time he was a housing lease businessman. Two years later, he was appointed a JungChongdea(町總代, the representative of the neighborhood) and a Part-time Probation Officer(囑託保護司).
      But when Imperial Japan eventually surrendered in August 15 1945, he had to be repatriated. Being a vice chairman of Incheon Provincial Council, he negotiated with U.S. Military Command and had led the phased withdrawal of the Japanese settlers in Incheon. He went away Incheon on March 2, 1946, and settled in Nagasaki(長崎), Japan. Two years later, he wrote the record of the Japanese Pullout from Incheon (仁川引揚誌). He called it the message of condolence for Incheon.
      He called himself “a son of Incheon(仁川兒)”, because of growing up in nature and climate of Incheon since the age of four. During 57 years living there, he moved up a powerful influence away from the lower class in Japan. Because of achieving a chance of life there, he deserved to called himself “a son of Incheon”. However, that was not Incheon but Ji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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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개항과 고타니의 조선 이주
      • Ⅲ. 고타니의 사회 진출과 인천부사 편찬
      • Ⅳ. 인천의 주요인사로 부상
      • V. 맺음말
      • Ⅰ. 머리말
      • Ⅱ. 개항과 고타니의 조선 이주
      • Ⅲ. 고타니의 사회 진출과 인천부사 편찬
      • Ⅳ. 인천의 주요인사로 부상
      • V. 맺음말
      • 참고문헌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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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許 錫, "해외이주 일본인들의 디아스포라적 특성에 대한 연구-이주지에서의 일본어신문 발행과 국민적 아이덴티티 유지를 중심으로-" 한국일본어문학회 (31) : 555-578, 2006

      2 최영호,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귀환과정에서 나타난 식민지 지배에 관한 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1) : 263-303, 2008

      3 장신, "한말·일제초 재인천 일본인의 신문 발행과 조선신문" (6) : 2007

      4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5 추교찬, "제2기(1908.10~1910.12) 인천 일본인 거류민단의 운영과 활동" 한국학연구소 (37) : 75-130, 2015

      6 황민호, "전시통제기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문제에 대한 인식과 통제" 한국사학회 (79) : 207-245, 2005

      7 이형식, "재조일본인 연구의 현황과 과제" 일본학연구소 37 : 245-283, 2013

      8 이수열, "재조일본인 2세의 식민지 경험-식민 2세 출신 작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연구소 (50) : 99-122, 2014

      9 송치호, "일제시기 조선사회사업협회의 성격에 대한 실증분석 : '식민지배 도구적 성격'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7

      10 최혜주,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의 지방사 편찬활동과 조선인식" 한국사학회 (103) : 161-207, 2011

      1 許 錫, "해외이주 일본인들의 디아스포라적 특성에 대한 연구-이주지에서의 일본어신문 발행과 국민적 아이덴티티 유지를 중심으로-" 한국일본어문학회 (31) : 555-578, 2006

      2 최영호,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귀환과정에서 나타난 식민지 지배에 관한 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1) : 263-303, 2008

      3 장신, "한말·일제초 재인천 일본인의 신문 발행과 조선신문" (6) : 2007

      4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5 추교찬, "제2기(1908.10~1910.12) 인천 일본인 거류민단의 운영과 활동" 한국학연구소 (37) : 75-130, 2015

      6 황민호, "전시통제기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문제에 대한 인식과 통제" 한국사학회 (79) : 207-245, 2005

      7 이형식, "재조일본인 연구의 현황과 과제" 일본학연구소 37 : 245-283, 2013

      8 이수열, "재조일본인 2세의 식민지 경험-식민 2세 출신 작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연구소 (50) : 99-122, 2014

      9 송치호, "일제시기 조선사회사업협회의 성격에 대한 실증분석 : '식민지배 도구적 성격'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7

      10 최혜주,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의 지방사 편찬활동과 조선인식" 한국사학회 (103) : 161-207, 2011

      11 정상우, "일제강점 말기관찬 지방사에서의 지방 구현- 『대구부사(大邱府史)』(1943)를 중심으로 -" 동북아역사재단 (45) : 291-336, 2014

      12 최영호, "일본인 세화회-식민지조선 일본인의 전후" 논형 2013

      13 김남일, "일본의 보호관찰제도, 교정 제174호"

      14 "인천향토자료조사사항 (상하, 今井猪之助, 1915)"

      15 小谷益次郞, "인천철수지 상하" 황해문화 2001

      16 "인천의 긴요문제 (古川文道, 1932)"

      17 고일, "인천석금" 선민출판사 1955

      18 "인천부사 (인천부, 1933)"

      19 "인천번창기 (小川雄三, 1903)"

      20 "인천 중앙동과 송학동 귀속재산 불하문서"

      21 추교찬, "인천 일본인 거류민단의 형성과 갈등" 인천학연구원 1 (1): 93-146, 2014

      22 "역주 최근의 인천 (平井斌夫, 1912)"

      23 "역주 인천향토사 (인천교육회, 1932)"

      24 "역주 인천항 (인천상공회의소, 1931)"

      25 "역주 인천항 (岡本保誠, 1931)"

      26 "역주 인천의 사화와 사적 (小谷益次郞, 1933)"

      27 "역주 인천사정 (靑山好惠, 1892)"

      28 "역주 인천과 인천항 (인천항만협회협찬회, 1925)"

      29 "역주 인천개항25년사 (加瀨和三郞, 1908)"

      30 "역주 인천개항25년사 (信夫淳平, 1908)"

      31 "역주 병합 후의 인천 (桑原秀雄, 1911)"

      32 "신찬 인천사정 (小川雄三, 1898)"

      33 다카사키 소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역사비평사 2006

      34 전성현, "식민자와 식민지민 사이, ‘재조일본인’ 연구의 동향과 쟁점" 효원사학회 48 : 33-72, 2015

      35 코우즈키 이치로우, "부산에서의 일본인 교회의 기원과 발전 1876-1945 : 구 일본기독교회 부산교회를 중심으로" 고신대학교 대학원 2013

      36 "동아일보"

      37 서현주, "경성부의 정총대와 정회" (16) : 2001

      38 이규수, "개항장 인천과 재조일본인" 보고사 2015

      39 가지무라 히데키, "韓國史와 日本人" 백산출판사 1999

      40 朴貞蘭, "韓國における社會事業の成立と展開に關する硏究" 日本女子大學 1997

      41 "每日新報"

      42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자료편 제2권)" 巖南堂書店 1980

      43 "朝鮮社会事業 (조선사회사업연구회 발간)"

      44 김동명, "1931년 경성부회 선거연구"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6 (26): 193-218, 2005

      45 권숙인, "'도한(渡韓)의 권유' - 1900년대 초두 한국이민론 속의 한국과 일본" 한국사회사학회 (69) : 183-2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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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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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3 0.63 0.5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8 0.53 1.059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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