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평신도인 한국 측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 중국 측의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1562~1633)를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 실천을 비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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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식 (충북보건과학대학교)
2020
Korean
정약종 ; 서광계 ; 평신도 ; 쥬교요지 ; 축첩 ; 천주교 ; 서광계식 전교방식 ; Jung Yak Jong ; Xu Guang Qi ; layman ; Chu-chiao yoo-chih ; concubinage ; Catholicism ; Xu Guang Qi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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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평신도인 한국 측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 중국 측의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1562~1633)를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 실천을 비교 연...
본 논문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평신도인 한국 측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과 중국 측의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1562~1633)를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 실천을 비교 연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초창기 천주교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 천주교 초기의 주춧돌 역할을 담당하였던 정약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그 스스로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지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깨닫고 찾은 참 진리를 어떻게 전교하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특히 반상관계가 명확하던 조선시대에 어떻게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정약종의 전교 태도를 살펴보는 데 상당히 유의미하였다. 셋째는 문서로 인한 선교에 대한 것이다. 특히 정약종이 『쥬교요지(主敎要旨)』를 언문으로 작성한 이유는 소외된 이들을 선교의 대상자로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식이 있는 양반들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상민과 천민을 대상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넷째로는 정약종이 일기에 궁흉지언(窮凶之言)을 남긴 이유는 자신의 주장과 죽음으로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성리학적 국가질서를 동시에 극복해 낼 수 있기를 바랐던 점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중국 천주교회의 3대 기둥 중 한 명인 서광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당시 사대부들이 천주교에 입교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축첩(畜妾)에 대해서 서광계는 담대하게 천주교 입교를 결정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 등에서 그의 견고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주변 인물에 대한 전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서광계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직접 선교사를 찾아가 종교에 대해 알아본 후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자신의 고향에 천주교 선교사를 모셔와 천주교를 전파하는 서광계식의 전교방식을 활용하였다. 이후 그의 제자들도 이러한 방법을 따라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셋째로는 남경교난과 같은 어려운 때에 호교서(護敎書) 집필을 통해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옹호하고 보호한 서광계의 공헌은 지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를 대표하는 정약종과 중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를 대표하는 서광계를 약 200년이라는 시간 차를 극복하고 비교 언급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으나, 다음과 같은 공통부분을 도출해 내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 첫째로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초기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주교 전파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특히 정약종은 천민과 부녀자들에게, 서광계는 서광계식 전교방식으로 선교사를 모셔와 불모지인 곳에 천주교를 개교하는 식의 서광계식 전교방식을 구축하였다는 점 역시 버려진 대상에 천주교를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다. 또 이들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저술활동을 통한 전교 즉 문서 선교라는 방식을 통해 초기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그들의 인생에 있어 42세의 나이는 이들에게 아주 중대한 시기였음을 ...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aims to compare and study their faith practices, focusing on Jung Yak Jong(丁若鍾, Augustino, 1760~1801) of Korea and Xu Guang Qi(徐光啓, Paulo, 1562~1633) of China. They are the ones who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preaching of ...
This paper aims to compare and study their faith practices, focusing on Jung Yak Jong(丁若鍾, Augustino, 1760~1801) of Korea and Xu Guang Qi(徐光啓, Paulo, 1562~1633) of China. They are the ones who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preaching of Catholicism in the early days.
For a start, focused on the following four aspects of Jung Yak Jong, who played the role of grounds in the early days of Catholicism in Korea. The first is about how he changed himself after accepting the Catholic faith, and the second was how to teach the true truths he realized and found. Especially, status system It was significant to examine the attitudes of Jung Yak Jong’s evangelism by learning how to spread faith to other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when the relationship was clear. The third is about missionary work by documentary.
In particular, We can tell the reason why Chu-chiao yoo-chih(主敎要旨) was written in Hangeul is probably because of his missionary work.
It was found that not only the knowledgeable class members, but also those who had relatively poor understanding of Catholicism and the people who tried to preach the gospel. Fourth, the reason why he left “extremely ugly word”(窮凶之言) in his diary, it was found that this claim was made in that he wished to overcome the existing patriarchal social order and the sacramental national order at the same time through his claim and death.
The Chinese side looked at Xu Guang Qi, one of the three pillars of the Catholic Church in China. First, we looked at the part of accepting Catholic faith. Xu Guang Qi boldly decided to join the Catholic Church and was baptized to confirm his solid beliefs about the concubinage(畜妾), which was the biggest obstacle when the envoys entered the Catholic Church at the time. Secondly, we examined the missionary work. Xu Guang Qi’s acceptance of the Catholic faith was baptized after he went to the missionaries to find out about religion. Later, his disciples were seen following this method. Third, it was confirmed that the official support of Catholic advocacy through the articles in support of Catholicism(護敎書)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the preaching of Catholicism in the traditional era.
There were many difficulties of overcoming and comparing the time lag of about 200 years the comparison between Jung Yak Jong, who represents the early layman of Korean Catholicism and Xu Guang Qi, representing the early layman of Chinese Catholicism. However, I have achieved results that lead to the following common parts. The first is both of them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laying the foundations of early Catholicism in their respective countries. Second, they practiced the preaching of Catholicism regardless of their status. Especially, Jung Yak Jong was similar in that he spread Catholicism by establishing a Xu Guang Qi style communion method in which the Xu Guang Qi enshrines missionaries in the teaching method and opens Catholicism in a barren place. In addition, they were the intellectuals of the time, and they laid the foundation for the early Catholic Church through the method of their mission work, or documentary mission, through writing activities. In addition, it was confirmed that the age of 42 in their life was a very important time for them.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above, it was possible to compare the representative figures of Korea and China who practiced the doctrine and re-examine their contributions to establishing early Catholicism in their respective countries. Particularly, re-examining their faith can be used as an important resource to renew our faith. It is important not to overlook the foundations of Korean-Chinese Catholicism in order to form a relationship with each countries’ Catholics. As a result, this paper will serve as an important resource for the growth of Catholicism in Korea and China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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