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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조선시대 國喪의 ‘告祔’ 생략에 대한 一考 = A Study on the Exclusion of 'Gobu' from the State Funeral of the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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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99537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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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n the Joseon period, the funeral rites of the royal court had no 'Bu' procedure following 'Jolgok'. This was a big difference between the funeral manners of the royal and the noble families at that time. Here, 'B' refers to 'Gobu', not 'Yeongbu'. Often called 'Bumyo', Yeongbu was a procedure that the ancestral tablet is enshrined after mourning finished. While, Gobu was a procedure that the ancestral tablet is temporarily placed by another tablet, which was already enshrined, after Jolgok finished to inform the former tablet is expected to be put inside the shrine. Gobu is mentioned in 'Garye'. But no description of Gobu is found in 'Gukjo Oryeeui' and 'Sangrye Bopyeon', compiled respectively in the early and late periods of Joseon, both of which mention only Yeongbu. This means that the Joseon dynasty did never implement the Gobu procedure till its collapse. The Joseon dynasty had no observance of Gobu in funeral rites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there was a custom to shorten the mourning period, that is, Dansangje. Second, the fundamental value of Gobu deteoriated since Dongdang Yisi had been the structure of the building for enshrinement, or Jongmyo since the Chinese Han period. And third, Yeongbu was supposed to be conducted at last after the mourning period ended. This suggests some overlaps between Yeongbu and Gobu, accordingly, a possible room for excluding the l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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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Joseon period, the funeral rites of the royal court had no 'Bu' procedure following 'Jolgok'. This was a big difference between the funeral manners of the royal and the noble families at that time. Here, 'B' refers to 'Gobu', not 'Yeongbu'. Oft...

      In the Joseon period, the funeral rites of the royal court had no 'Bu' procedure following 'Jolgok'. This was a big difference between the funeral manners of the royal and the noble families at that time. Here, 'B' refers to 'Gobu', not 'Yeongbu'. Often called 'Bumyo', Yeongbu was a procedure that the ancestral tablet is enshrined after mourning finished. While, Gobu was a procedure that the ancestral tablet is temporarily placed by another tablet, which was already enshrined, after Jolgok finished to inform the former tablet is expected to be put inside the shrine. Gobu is mentioned in 'Garye'. But no description of Gobu is found in 'Gukjo Oryeeui' and 'Sangrye Bopyeon', compiled respectively in the early and late periods of Joseon, both of which mention only Yeongbu. This means that the Joseon dynasty did never implement the Gobu procedure till its collapse. The Joseon dynasty had no observance of Gobu in funeral rites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there was a custom to shorten the mourning period, that is, Dansangje. Second, the fundamental value of Gobu deteoriated since Dongdang Yisi had been the structure of the building for enshrinement, or Jongmyo since the Chinese Han period. And third, Yeongbu was supposed to be conducted at last after the mourning period ended. This suggests some overlaps between Yeongbu and Gobu, accordingly, a possible room for excluding the l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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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조선시대 왕실의 상례가 사대부 집안의 상례와 다른 큰 차이점은 卒哭 이후 ‘祔’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祔’는 ‘永祔’가 아니라 ‘告祔’를 뜻한다. 永祔는 초상을 마친 뒤 神主를 사당에 봉안하여 代數가 허락하는 한 영구히 廟食하는 이른바 祔廟 절차를 가리킨다. 告祔는 葬事 이후 返魂한 새 신주를 졸곡 다음날 昭穆에 따라 祖廟에 班祔하여, 祖廟의 신주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 앞으로 새 신주가 들어올 것임을 미리 알리는 절차이다. '家禮'에는 졸곡 이후에 ‘告祔’가 존재하지만, 조선전기 '國朝五禮儀'나 조선후기 '喪禮補編'을 비롯한 국가전례서에는 告祔 절차가 생략되어, 조선 왕실은 亡國때까지 한 번도 고부 절차를 거행하지 못했다. 조선 왕실에서 고부가 거행되지 못한 이유는 첫째, 唐ㆍ宋이나 고려가 흔히 短喪制으로 상례를 거행하여 이미 고부 절차가 민멸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묘제가 後漢 때부터 同堂異室制로 바뀌어, 昭穆에 따라 운영된 古禮의 고부가 그 본래 의미를 퇴색했기 때문이다, 셋째, 초상이 끝나면 영부하니 고부는 영부와 일정정도 중복된다고 인식되어 그 절차 생략에 비교적 아쉬움이 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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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왕실의 상례가 사대부 집안의 상례와 다른 큰 차이점은 卒哭 이후 ‘祔’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祔’는 ‘永祔’가 아니라 ‘告祔’를 뜻한다. 永祔...

      조선시대 왕실의 상례가 사대부 집안의 상례와 다른 큰 차이점은 卒哭 이후 ‘祔’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祔’는 ‘永祔’가 아니라 ‘告祔’를 뜻한다. 永祔는 초상을 마친 뒤 神主를 사당에 봉안하여 代數가 허락하는 한 영구히 廟食하는 이른바 祔廟 절차를 가리킨다. 告祔는 葬事 이후 返魂한 새 신주를 졸곡 다음날 昭穆에 따라 祖廟에 班祔하여, 祖廟의 신주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 앞으로 새 신주가 들어올 것임을 미리 알리는 절차이다. '家禮'에는 졸곡 이후에 ‘告祔’가 존재하지만, 조선전기 '國朝五禮儀'나 조선후기 '喪禮補編'을 비롯한 국가전례서에는 告祔 절차가 생략되어, 조선 왕실은 亡國때까지 한 번도 고부 절차를 거행하지 못했다. 조선 왕실에서 고부가 거행되지 못한 이유는 첫째, 唐ㆍ宋이나 고려가 흔히 短喪制으로 상례를 거행하여 이미 고부 절차가 민멸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묘제가 後漢 때부터 同堂異室制로 바뀌어, 昭穆에 따라 운영된 古禮의 고부가 그 본래 의미를 퇴색했기 때문이다, 셋째, 초상이 끝나면 영부하니 고부는 영부와 일정정도 중복된다고 인식되어 그 절차 생략에 비교적 아쉬움이 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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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禮記集說"

      2 "禮記正義"

      3 "禮記"

      4 "論語"

      5 김미영, "조선후기 상례의 미시적 연구-정재 류치명의 상례일기 『考終錄』을 중심으로-" 실천민속학회 12 : 237-257, 2008

      6 안희재, "조선후기 發靷班次의 변화와 의미" 한국학연구소 34 : 821-856, 2010

      7 鄭鍾秀, "조선초기 상장의례 연구" 中央大學校 大學院 1994

      8 이현진,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 서울학연구소 (43) : 55-102, 2011

      9 박례경, "조선시대 國葬에서 朝祖儀 설행 논의와 결과"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31 : 2007

      10 이현진, "정조대 文孝世子의 喪葬 의례와 그 특징"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0) : 103-143, 2012

      1 "禮記集說"

      2 "禮記正義"

      3 "禮記"

      4 "論語"

      5 김미영, "조선후기 상례의 미시적 연구-정재 류치명의 상례일기 『考終錄』을 중심으로-" 실천민속학회 12 : 237-257, 2008

      6 안희재, "조선후기 發靷班次의 변화와 의미" 한국학연구소 34 : 821-856, 2010

      7 鄭鍾秀, "조선초기 상장의례 연구" 中央大學校 大學院 1994

      8 이현진,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 서울학연구소 (43) : 55-102, 2011

      9 박례경, "조선시대 國葬에서 朝祖儀 설행 논의와 결과"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31 : 2007

      10 이현진, "정조대 文孝世子의 喪葬 의례와 그 특징"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0) : 103-143, 2012

      11 이현진, "영조대 왕실 喪葬禮의 정비와 『國朝喪禮補編』" 한국사상사학회 37 (37): 113-155, 2011

      12 李弼相, "高麗時代 廟制의 硏究" 서울대학교 2 : 1975

      13 "退溪集"

      14 "英祖實錄"

      15 "肅宗實錄"

      16 유영옥, "禘의 의미와 고려 종묘의 禘祭" 인문학연구원 95 : 149-181, 2012

      17 "白軒集"

      18 池斗煥, "朝鮮前期 儀禮硏究" 서울大學校 出版部 1994

      19 "春秋左氏傳"

      20 "旅軒集"

      21 "愼獨齋遺稿"

      22 "常變通攷"

      23 "小山集"

      24 "家禮輯覽"

      25 "家禮增解"

      26 "家禮"

      27 "定齋集"

      28 유영옥, "學峯 金誠一의 父親喪 行禮 儀節" 동양한문학회 21 : 2005

      29 "太宗實錄"

      30 "士儀"

      31 "國朝喪禮補編"

      32 李範稷, "國朝五禮儀의 成立에 대한 一考察" 역사학회 122 : 1989

      33 "國朝五禮儀"

      34 "四禮便覽"

      35 "古今喪禮異同議"

      36 "儀禮"

      37 "仁祖實錄"

      38 "五禮"

      39 "世宗實錄"

      40 "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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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4-04-0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Journal of Koreanology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5-26 학회명변경 영문명 : Center for Korean Studies Pusan National University -> Korean Studies Institute, Pusan National University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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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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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91 0.91 0.8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3 0.83 1.368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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