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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 ‘위성(衛聖)’ 공동체의 등장과 지역 사회 변동 - 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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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의 구심점이었고, 근대에는 식민권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으로 작동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 부흥을 위해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으로 이어져 왔다. 이처럼 향교는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대 변화와 함께 미시적인 지역 사회 변동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전주향교 내에 세워진 존성회(尊聖會)와 위성계(衛聖契)는 같은 목표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 양상이 달랐다. 일제강점기 조직된 존성회는 ‘유학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였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에 흡수되기 쉬웠고, 결국 지배정책의 촌락 전파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위성계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 일어난 유림 사회 내의 균열, 그리고 일반사회에 널리 전파된 유학 혐오 사상의 제어를 위해 설립된 지역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전쟁의 발발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종전 이후 사회가 다소 안정화된 1954년에서야 위성계는 완성될 수 있었다. 동일 기관에서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며 설립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성격은 상이하였다. 두 공동체 사이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전환이 외부 요인으로 개재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구성원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존성회와 위성계는 각기 다른 형태의 성현 보호 운동을 수행하였다. 향교의 정체성은 향교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향교 연구를 위해서는 ‘공간’으로서의 향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집결지’로 위치했던 향교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 이후 향교가 유교 문화의 재현 공간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의견에 따라 소비된 유교문화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탈유교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향교는 향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향교를 공유하고 있던 인간과 공동체의 발견을 통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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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의 구심점이었고, 근대에는 식민권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으로 작동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 부흥을 위해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의 구심점이었고, 근대에는 식민권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으로 작동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 부흥을 위해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으로 이어져 왔다. 이처럼 향교는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대 변화와 함께 미시적인 지역 사회 변동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전주향교 내에 세워진 존성회(尊聖會)와 위성계(衛聖契)는 같은 목표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 양상이 달랐다. 일제강점기 조직된 존성회는 ‘유학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였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에 흡수되기 쉬웠고, 결국 지배정책의 촌락 전파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위성계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 일어난 유림 사회 내의 균열, 그리고 일반사회에 널리 전파된 유학 혐오 사상의 제어를 위해 설립된 지역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전쟁의 발발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종전 이후 사회가 다소 안정화된 1954년에서야 위성계는 완성될 수 있었다. 동일 기관에서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며 설립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성격은 상이하였다. 두 공동체 사이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전환이 외부 요인으로 개재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구성원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존성회와 위성계는 각기 다른 형태의 성현 보호 운동을 수행하였다. 향교의 정체성은 향교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향교 연구를 위해서는 ‘공간’으로서의 향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집결지’로 위치했던 향교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 이후 향교가 유교 문화의 재현 공간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의견에 따라 소비된 유교문화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탈유교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향교는 향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향교를 공유하고 있던 인간과 공동체의 발견을 통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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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December 1924, a movement to form a new community began in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in Jeollabuk-do. Yu-rim (儒林, Confucian scholar) that belonged to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lamented that ‘morality is slowly disappearing in society, and Confucian order declined that the society is becoming disastrous.’ Yu-rims held a meeting to establish Jonseonghoe(尊聖會) in order to eliminate moral laxity and spread Confucian morality in the society. Yu-rims who attended the meeting formed public opinion and established Jonseonghoe the next month, January 1925. Most of these Yu-rims were community leaders who maintained certain social status in the community. Most were in government serv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or in financial business or social organizations and were trusted by both the government and community. Since most of the members of Jonseonghoe were community leaders, Jonseonghoe had naturality with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t the time of organization in January 1925, 270 Yu-rims raised 1,000 won (圓) as Jonseonghoe fund. 3 years later in 1928, this fund doubled to 2,000 won. Yu-rims announced to use this fund for social indoctrination. Since the 1920s, social indoctrination was the main policy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because they had to refine the public sentiment, which was intensified due to March 1st Movement in 1919. Members of JonseongHoe worked for this social indoctrination. Jonseonghoe lasted until Joseon was liberated in 1945. In September 1945, Jonseonghoe member list was re-published. However,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in 1950, Jonseonghoe was naturally disbanded. Later in 1952, when the traces of war still lingered, a movement to preserve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began. It was suggested by Lee Byeong-eun and his son, Lee Do-hyeong, who moved next to the school to protect it. They formed Wiseonggye (衛聖契) to repair ruined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and revive the community activities of the school. They were going to gather the Yu-rims spread throughout Jeonju area through Wiseonggye, and use donation for the repair and operation of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However, public opinion was not formed easily, and this plan failed at the time in 1952. Lee Do-hyeong proposed it again in 1954, and at the end, Wiseonggye was established in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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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December 1924, a movement to form a new community began in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in Jeollabuk-do. Yu-rim (儒林, Confucian scholar) that belonged to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lamented that ‘morality is slowly disappearing in soci...

      In December 1924, a movement to form a new community began in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in Jeollabuk-do. Yu-rim (儒林, Confucian scholar) that belonged to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lamented that ‘morality is slowly disappearing in society, and Confucian order declined that the society is becoming disastrous.’ Yu-rims held a meeting to establish Jonseonghoe(尊聖會) in order to eliminate moral laxity and spread Confucian morality in the society. Yu-rims who attended the meeting formed public opinion and established Jonseonghoe the next month, January 1925. Most of these Yu-rims were community leaders who maintained certain social status in the community. Most were in government serv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or in financial business or social organizations and were trusted by both the government and community. Since most of the members of Jonseonghoe were community leaders, Jonseonghoe had naturality with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t the time of organization in January 1925, 270 Yu-rims raised 1,000 won (圓) as Jonseonghoe fund. 3 years later in 1928, this fund doubled to 2,000 won. Yu-rims announced to use this fund for social indoctrination. Since the 1920s, social indoctrination was the main policy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because they had to refine the public sentiment, which was intensified due to March 1st Movement in 1919. Members of JonseongHoe worked for this social indoctrination. Jonseonghoe lasted until Joseon was liberated in 1945. In September 1945, Jonseonghoe member list was re-published. However,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in 1950, Jonseonghoe was naturally disbanded. Later in 1952, when the traces of war still lingered, a movement to preserve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began. It was suggested by Lee Byeong-eun and his son, Lee Do-hyeong, who moved next to the school to protect it. They formed Wiseonggye (衛聖契) to repair ruined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and revive the community activities of the school. They were going to gather the Yu-rims spread throughout Jeonju area through Wiseonggye, and use donation for the repair and operation of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However, public opinion was not formed easily, and this plan failed at the time in 1952. Lee Do-hyeong proposed it again in 1954, and at the end, Wiseonggye was established in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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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전주향교 존성회(尊聖會)와 ‘교화(敎化)’
      • 3. 유림 사회 균열과 위성계(衛聖契) 설립
      • 4. 맺음말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전주향교 존성회(尊聖會)와 ‘교화(敎化)’
      • 3. 유림 사회 균열과 위성계(衛聖契) 설립
      • 4.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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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박민희, "해방 후 위패매안과 전주향교의 대응" 전주대학교 대학원 2013

      2 "중외일보"

      3 "조선일보"

      4 김경남, "일제하 식민도시 개발과 조선인 자본가형성의 특징 - 전북지역 박기순ㆍ박영철 일가를 중심으로 -" 영남문화연구원 (30) : 199-242, 2016

      5 김명우, "일제강점기 향교 直員과 掌議"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5 : 2007

      6 설주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회교화사업연구" 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7 김순석, "일제강점기 「향교재산관리규칙」 연구" 태동고전연구소 33 : 35-59, 2014

      8 서동일, "식민지기 유림대회의 출현과 지방의 유교권력" 역사학회 (241) : 199-241, 2019

      9 류미나, "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 經學院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6) : 157-191, 2005

      10 "매일신보"

      1 박민희, "해방 후 위패매안과 전주향교의 대응" 전주대학교 대학원 2013

      2 "중외일보"

      3 "조선일보"

      4 김경남, "일제하 식민도시 개발과 조선인 자본가형성의 특징 - 전북지역 박기순ㆍ박영철 일가를 중심으로 -" 영남문화연구원 (30) : 199-242, 2016

      5 김명우, "일제강점기 향교 直員과 掌議"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5 : 2007

      6 설주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회교화사업연구" 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7 김순석, "일제강점기 「향교재산관리규칙」 연구" 태동고전연구소 33 : 35-59, 2014

      8 서동일, "식민지기 유림대회의 출현과 지방의 유교권력" 역사학회 (241) : 199-241, 2019

      9 류미나, "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 經學院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6) : 157-191, 2005

      10 "매일신보"

      11 "동아일보"

      12 "남조선민보"

      13 심산사상연구회, "김창숙문존"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7

      14 김덕진, "高興 鄕校의 尊聖契" 호남사학회 (67) : 67-96, 2017

      15 金允植, "雲養集 卷10" 1917

      16 金允植, "雲養續集 卷2" 1930

      17 尹錫熙, "誠菴文集" 파평윤씨 화양문중 2014

      18 李道衡, "華嶋淵源錄" 南安齋 1962

      19 박학래, "艮齋學派의 學統과 사상적 특징" 한국유교학회 (28) : 2007

      20 朝鮮總督府, "職員錄" 朝鮮總督府 1920

      21 李道衡, "癸巳三月衛聖案" 1953

      22 田中正剛, "朝鮮紳士寶鑑" 朝鮮文友會 1914

      23 大垣丈夫, "朝鮮紳士大同譜" 朝鮮紳士大同譜發行事務所 1913

      24 朝鮮新聞社, "朝鮮人事興信錄" 朝鮮人事興信錄編纂部 1935

      25 安圭容, "晦峰遺稿" 竹谷精舍 1963

      26 朝鮮總督府 內務局 社會課, "大正10年度 鄕校財産 歲出入豫算 其他"

      27 全州鄕校, "全州鄕校誌" 全州鄕校誌編纂委員會 2004

      28 朴榮喆, "五十年の回顧" 大阪屋號書店 1929

      29 茂長鄕校, "1932년 6월에 무장향교에서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30 咸興鄕校, "1931년 2월에 함흥향교에서 귀군의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31 臨陂鄕校, "1930년 12월에 나주향교에서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32 泰仁鄕校, "1928년 3월에 태인향교에서 선사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33 鎭安鄕校, "1928년 3월에 진안향교에서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34 李道衡, "(重刊)全州衛聖案" 全州衛聖案重刊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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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7-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0-08-31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태동고전연구 제24집 -> 태동고전연구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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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2 0.52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1 0.66 1.7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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