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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숙 독립운동의 인적 네트워크 = Kim Seong-sook’s Human Network of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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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article examines the journey of Kim Seong-sook’s national movement and his ideological orientation through character relationships. Influenced by Kim Sa-guk, Kim Seong-sook sympathized with socialist ideology. The Buddhist Yushin movement in which he participated also advocated socialist ideology such as ‘equality’. His socialist ideology deepened and systematized as he worked with those who accepted or propagated the communist ideology in Beijing.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the Heroic Corps into a “political party” in Gwangju, he became close to Kim Won-bong and became distant from Yu Ja-myung.
    In the first half of the 1930s, Kim Won-bong and Yu Ja-myung each increased their power, but when he tried to start the national movement again, there was no one around to join him. So, he formed the Liberation Alliance by forming solidarity with the former comrades of the Heroic Corps such as Park Geon-woong, first centered on the communists, and embracing those who broke away from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However, in the situation of confrontation with the forces who insisted on going to Yanan over the issue of the movement of members of Korean Volunteers Army to North China Region, the Liberation Alliance declared reconstruction and pioneered its own path. At this time, it is presumed that Kim Jae-ho and Shin Jeong-wan joined the Liberation Alliance.
    The Liberation Alliance’s participation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a strategic shift in the national movement line in response to changes in the situation, not an ideological shift. He seems to have consulted in advance about participating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rough Jo So-ang,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So he was able to smoothly enter the Provisional Assembly and government agencies through the Propaganda Committee, and he was able to rise to the position of a member of the State Council.
    Regarding relations with the Chinese, he had a particularly strong relationship with Zhou En-lai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He also worked with left-wing writers in China through his wife Du Jun-hui. Regarding personnel from the Chinese Kuomintang, they distanced themselves from the coercive situation of “white terror”, but their attitude changed after the second collaboration between the Kuomintang and the Communist Party took place. He tried to get support by contacting Zhu Jia-hua, a key figure in the Chinese Kuomintang’s policy toward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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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article examines the journey of Kim Seong-sook’s national movement and his ideological orientation through character relationships. Influenced by Kim Sa-guk, Kim Seong-sook sympathized with socialist ideology. The Buddhist Yushin movement in wh...

    This article examines the journey of Kim Seong-sook’s national movement and his ideological orientation through character relationships. Influenced by Kim Sa-guk, Kim Seong-sook sympathized with socialist ideology. The Buddhist Yushin movement in which he participated also advocated socialist ideology such as ‘equality’. His socialist ideology deepened and systematized as he worked with those who accepted or propagated the communist ideology in Beijing.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the Heroic Corps into a “political party” in Gwangju, he became close to Kim Won-bong and became distant from Yu Ja-myung.
    In the first half of the 1930s, Kim Won-bong and Yu Ja-myung each increased their power, but when he tried to start the national movement again, there was no one around to join him. So, he formed the Liberation Alliance by forming solidarity with the former comrades of the Heroic Corps such as Park Geon-woong, first centered on the communists, and embracing those who broke away from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However, in the situation of confrontation with the forces who insisted on going to Yanan over the issue of the movement of members of Korean Volunteers Army to North China Region, the Liberation Alliance declared reconstruction and pioneered its own path. At this time, it is presumed that Kim Jae-ho and Shin Jeong-wan joined the Liberation Alliance.
    The Liberation Alliance’s participation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a strategic shift in the national movement line in response to changes in the situation, not an ideological shift. He seems to have consulted in advance about participating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rough Jo So-ang,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So he was able to smoothly enter the Provisional Assembly and government agencies through the Propaganda Committee, and he was able to rise to the position of a member of the State Council.
    Regarding relations with the Chinese, he had a particularly strong relationship with Zhou En-lai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He also worked with left-wing writers in China through his wife Du Jun-hui. Regarding personnel from the Chinese Kuomintang, they distanced themselves from the coercive situation of “white terror”, but their attitude changed after the second collaboration between the Kuomintang and the Communist Party took place. He tried to get support by contacting Zhu Jia-hua, a key figure in the Chinese Kuomintang’s policy toward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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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글은 인물관계를 통해 김성숙의 민족운동의 여정 및 그의 사상적 지향점을 살펴본 것이다. 김성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교 공부 경험이 있는 김사국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공감해 갔다. 한편 김성숙이 참여한 불교계의 유신 운동도 ‘평등’ 등 사회주의 사상을 주창하였으므로, 유신 불교의 입장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베이징에서 장건상, 양명, 김용찬 등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하거나 선전하고 있는 인물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도 더 심화되고 체계회되었다. 그의 사상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기초를 둔 반자본주의적인 평등사회를 지향한 것으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조공과 관련 있는 양명과 김용찬 등과 차이가 있었다. 그는 중국의 국공합작에 의한 혁명성공을 통한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희망을 걸고 광저우를 향했다. 광저우에서 의열단을 ‘정치정당’으로 개편시키는 과정에서 김원봉과 가깝게 지내면서 유자명과 거리가 멀어졌다. 광저우에서 의열단을 통해 드러난 그의 혁명이론과 사상은 국민당 좌파와 유사했고,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중국 1차 국공합작의 방식처럼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광저우봉기 실패 후 저술, 이론 연구 및 번역 등 일에 종사하는 동안 김원봉과 유자명은 각각 세력을 키워 갔지만 김성숙은 다시 민족운동에 나서려고 했을 때 주변에 같이 할 사람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김성숙은 박건웅, 김산 등 옛 의열단 동지들과 우선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민혁당에서 이탈해 나온 이들을 포섭하려는 전략을 폈으며 해방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뤄양에서 조선의용대 대원의 북상 및 임정 참여의 문제를 둘러싸고 옌안행을 주장하는 세력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해방동맹은 재건을 선언해 자기들만의 노선을 개척해나갔다. 이때 김재호, 신정완을 비롯한 옌안행 반대 인사들이 해방동맹에 가담한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동맹의 임정 참여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민족운동 노선의 전략적인 전환이지 사상적인 전환까지는 아니었다. 광복군 총사령부 창립 이후부터 김성숙은 ‘단체주의’적 연합전선 조직론을 고수한 채 임정의 외무부장인 조소앙과 만나 임정참여에 대한 사전협의를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그의 맹원들은 선전위원회를 통해 임시의정원과 정부 기관에 완만하게 진출할 수 있었고 김성숙은 해방동맹을 배경으로 국무위원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들은 임정 속에서 약헌개정 및 정부개조를 통해 자신들이 지향하는 민족해방과 ‘평등’, ‘민중’, ‘민주’ 등 반자본주의의 사회주의적인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중국인과의 관계에 있어 특히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의 관계가 돈독했다. 그리고 부인 두쥔훼이를 통해 중국의 좌익작가들과도 같이 활동했다. 국민당측 인사에 대해서는 광저우봉기 직후 ‘백색테러’의 강압적인 상황에서 거리를 두었지만 중일전쟁 발발 이후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그래서 중국국민당의 대한정책의 핵심인물 주자화와 접촉해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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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인물관계를 통해 김성숙의 민족운동의 여정 및 그의 사상적 지향점을 살펴본 것이다. 김성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교 공부 경험이 있는 김사국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공감...

    이글은 인물관계를 통해 김성숙의 민족운동의 여정 및 그의 사상적 지향점을 살펴본 것이다. 김성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교 공부 경험이 있는 김사국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공감해 갔다. 한편 김성숙이 참여한 불교계의 유신 운동도 ‘평등’ 등 사회주의 사상을 주창하였으므로, 유신 불교의 입장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베이징에서 장건상, 양명, 김용찬 등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하거나 선전하고 있는 인물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도 더 심화되고 체계회되었다. 그의 사상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기초를 둔 반자본주의적인 평등사회를 지향한 것으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조공과 관련 있는 양명과 김용찬 등과 차이가 있었다. 그는 중국의 국공합작에 의한 혁명성공을 통한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희망을 걸고 광저우를 향했다. 광저우에서 의열단을 ‘정치정당’으로 개편시키는 과정에서 김원봉과 가깝게 지내면서 유자명과 거리가 멀어졌다. 광저우에서 의열단을 통해 드러난 그의 혁명이론과 사상은 국민당 좌파와 유사했고,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중국 1차 국공합작의 방식처럼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광저우봉기 실패 후 저술, 이론 연구 및 번역 등 일에 종사하는 동안 김원봉과 유자명은 각각 세력을 키워 갔지만 김성숙은 다시 민족운동에 나서려고 했을 때 주변에 같이 할 사람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김성숙은 박건웅, 김산 등 옛 의열단 동지들과 우선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민혁당에서 이탈해 나온 이들을 포섭하려는 전략을 폈으며 해방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뤄양에서 조선의용대 대원의 북상 및 임정 참여의 문제를 둘러싸고 옌안행을 주장하는 세력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해방동맹은 재건을 선언해 자기들만의 노선을 개척해나갔다. 이때 김재호, 신정완을 비롯한 옌안행 반대 인사들이 해방동맹에 가담한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동맹의 임정 참여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민족운동 노선의 전략적인 전환이지 사상적인 전환까지는 아니었다. 광복군 총사령부 창립 이후부터 김성숙은 ‘단체주의’적 연합전선 조직론을 고수한 채 임정의 외무부장인 조소앙과 만나 임정참여에 대한 사전협의를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그의 맹원들은 선전위원회를 통해 임시의정원과 정부 기관에 완만하게 진출할 수 있었고 김성숙은 해방동맹을 배경으로 국무위원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들은 임정 속에서 약헌개정 및 정부개조를 통해 자신들이 지향하는 민족해방과 ‘평등’, ‘민중’, ‘민주’ 등 반자본주의의 사회주의적인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중국인과의 관계에 있어 특히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의 관계가 돈독했다. 그리고 부인 두쥔훼이를 통해 중국의 좌익작가들과도 같이 활동했다. 국민당측 인사에 대해서는 광저우봉기 직후 ‘백색테러’의 강압적인 상황에서 거리를 두었지만 중일전쟁 발발 이후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그래서 중국국민당의 대한정책의 핵심인물 주자화와 접촉해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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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최기영, "金學武의 在中獨立運動과 좌파청년그룹"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6) : 287-325, 2010

    2 이정식,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5

    3 전명혁, "해광 김사국의 삶과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학회 23 : 2002

    4 장석흥, "해공 신익희의 망명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학연구소 37 : 491-511, 2012

    5 신정완, "해공 그리고 아버지 : 令愛 申貞婉 手記" 성진사 1981

    6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7 "한국독립운동: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비망록"

    8 김준엽,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5권"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86

    9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10 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지성사 1995

    1 최기영, "金學武의 在中獨立運動과 좌파청년그룹"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6) : 287-325, 2010

    2 이정식,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5

    3 전명혁, "해광 김사국의 삶과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학회 23 : 2002

    4 장석흥, "해공 신익희의 망명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한국학연구소 37 : 491-511, 2012

    5 신정완, "해공 그리고 아버지 : 令愛 申貞婉 手記" 성진사 1981

    6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성사 1994

    7 "한국독립운동: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비망록"

    8 김준엽,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5권"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86

    9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10 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지성사 1995

    11 김봉춘, "중산대학과 1920년대 조선인의 혁명운동" 한국사학회 1994

    12 金光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결성과 변천" 21 : 1999

    13 "조선일보"

    14 양영석,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노선과 활동" 독립운동사연구소 4 : 1990

    15 "제38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대한 보고(2급 비밀)"

    16 秋憲樹, "자료 한국독립운동 2" 연세대출판부 1972

    17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 나의 회고록" 자유문고 1982

    1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유자명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

    19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선인 2013

    20 김산, "아리랑" 동녘 1984

    21 "북경에서의 조선인의 赤化 및 독립운동, 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부-在支那各地』 3"

    22 "동아일보"

    23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24 金喜坤, "韩國唯一獨立黨促成會에 대한 一考察" 일지사 33 : 1983

    25 국가보훈처, "韓國獨立運動史料" 1999

    26 楊昭栓 편, "關內地區朝鮮人反日運動資料匯編, 하" 遼寧民族出版社 1987

    27 禹尙烈, "郭沫若與朝鮮人" (봄) : 2002

    28 秦立海, "郭沫若的党籍真相" (7) : 2010

    29 鮑學謙, "朱家驊其人其事" (2) : 1999

    30 裴 植, "朱家驊先生與韓國革命團體關係考" (20) : 2012

    31 陈予欢, "周恩来與黄埔军校" 黄埔军校同学会 (2) : 2018

    32 "周恩来与黄埔军校的政治工作" 26 (26): 1997

    33 力平, "周恩來一生" 中央文獻出版社 2001

    34 "北京에서의 鮮人 學生團體의 狀況에 관한 件,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4"

    35 木藤克己, "北京 天津附近在住 朝鮮人의 狀況 報告書 進達의 件,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4"

    36 조규태, "1920년대 재북경 한인 革命社의 『革命』 발간과 혁명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6) : 249-28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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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5-20 학술지등록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KCI등재후보
    2005-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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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9 0.59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4 0.62 1.442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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