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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후반기 城隍神 신앙과 江南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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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의 연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안사난 이후 성황신 신앙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荊州·洪州·吳郡·鄂州·黃州·處州·袁州·潮州·成都·睦州·桂州·宣州 등 주로 長江 유역 각 지역의 사회경제적 동향과 발전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華北지역 전란에 따른 인구이동과 戶口의 증가, 장강 유역의 漑田에 따른 墾田의 증대, 상공업의 발달, 당조의 재정중심지로서의 부상 등의 검토를 통해, 안사난 이후 장강 유역 각 지역의 사회경제적 변모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강남개발의 추세 하에 그 곳 지방관의 성황신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지방관이 성황신에 올린 祭文의 내용을 통해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즉 제문의 형식, 기원의 내용, 기원의 구체적 대상, 성황신에 대한 태도 등에 관한 각각의 내용을 검토하고 시기적 추이를 확인하여, 이를 장강 유역의 사회경제적 발전 추세와 비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지방관과 성황신의 관계는 비교적 대등한 듯 한데, 지방관은 점차 성황신을 공경하는 자세로 변화되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전술했던 장강 유역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제고임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자 한다.
      한편 지방관의 성황신에 대한 인식 자체도 장강 유역 토착민들과 크게 달랐다. 지방관은 성황신을 그 지역의 '自然神'으로 통칭하여 인식했던 반면, 토착민은 성황신을 주로 구체적으로 그 지역에 연고가 있었던 秦末漢初의 紀信·灌영·周苛·英布·范曾·蕭何라든가 隋末唐初의 龐玉·焦明·屈坦·應智項·游茂洪·白季康 등 '人格神'으로 간주하였다. 성황신을 자연신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지방관의 사고는 바로 당조의 성황신에 대한 태도와 깊이 연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지방관은 당조가 지향했던 禮的 질서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다양한 민간신앙을 성황신으로 통칭하여 인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조가 성황신을 淫祀로서 간주하던 태도는 결국 장강 유역이 재정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모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체제 내에 포섭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과 그 구체적 실례를 검토하고자 한다. 당조는 결국 기존의 禮的秩序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토착민의 요구를 수용하여 다양한 민간신앙을 모두 성황신으로 일원화시키려 했고, 각종 封號, 廟額의 하사는 성황신을 당조의 체제 내에 흡수하려 했던 의도였던 점이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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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의 연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안사난 이후 성황신 신앙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荊州·洪州·吳郡·鄂州·黃州·處州·袁州·潮州·成都·睦州·桂州·宣州 등 주로 長江 유역 각 지역의...

      본고의 연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안사난 이후 성황신 신앙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荊州·洪州·吳郡·鄂州·黃州·處州·袁州·潮州·成都·睦州·桂州·宣州 등 주로 長江 유역 각 지역의 사회경제적 동향과 발전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華北지역 전란에 따른 인구이동과 戶口의 증가, 장강 유역의 漑田에 따른 墾田의 증대, 상공업의 발달, 당조의 재정중심지로서의 부상 등의 검토를 통해, 안사난 이후 장강 유역 각 지역의 사회경제적 변모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강남개발의 추세 하에 그 곳 지방관의 성황신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지방관이 성황신에 올린 祭文의 내용을 통해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즉 제문의 형식, 기원의 내용, 기원의 구체적 대상, 성황신에 대한 태도 등에 관한 각각의 내용을 검토하고 시기적 추이를 확인하여, 이를 장강 유역의 사회경제적 발전 추세와 비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지방관과 성황신의 관계는 비교적 대등한 듯 한데, 지방관은 점차 성황신을 공경하는 자세로 변화되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전술했던 장강 유역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제고임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자 한다.
      한편 지방관의 성황신에 대한 인식 자체도 장강 유역 토착민들과 크게 달랐다. 지방관은 성황신을 그 지역의 '自然神'으로 통칭하여 인식했던 반면, 토착민은 성황신을 주로 구체적으로 그 지역에 연고가 있었던 秦末漢初의 紀信·灌영·周苛·英布·范曾·蕭何라든가 隋末唐初의 龐玉·焦明·屈坦·應智項·游茂洪·白季康 등 '人格神'으로 간주하였다. 성황신을 자연신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지방관의 사고는 바로 당조의 성황신에 대한 태도와 깊이 연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지방관은 당조가 지향했던 禮的 질서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다양한 민간신앙을 성황신으로 통칭하여 인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조가 성황신을 淫祀로서 간주하던 태도는 결국 장강 유역이 재정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모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체제 내에 포섭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과 그 구체적 실례를 검토하고자 한다. 당조는 결국 기존의 禮的秩序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토착민의 요구를 수용하여 다양한 민간신앙을 모두 성황신으로 일원화시키려 했고, 각종 封號, 廟額의 하사는 성황신을 당조의 체제 내에 흡수하려 했던 의도였던 점이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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