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30년(1754) 8월부터 동왕 35년 6월까지 약 5년간 익산군수로 재직하였던 남태보는 그가 익산 재임 중에 편찬한<금마지>에서, 이 지방은 향망이 엄격하여 양반이 살기에 아주 좋은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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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영조 30년(1754) 8월부터 동왕 35년 6월까지 약 5년간 익산군수로 재직하였던 남태보는 그가 익산 재임 중에 편찬한<금마지>에서, 이 지방은 향망이 엄격하여 양반이 살기에 아주 좋은 곳이...
영조 30년(1754) 8월부터 동왕 35년 6월까지 약 5년간 익산군수로 재직하였던 남태보는 그가 익산 재임 중에 편찬한<금마지>에서, 이 지방은 향망이 엄격하여 양반이 살기에 아주 좋은 곳이며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못살게 된 빈한한 양반들까지도 모여들여 군내의 양반호가 타지방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익산군내 총 호수 약 3,700호 중 양반호가 1,500여호나 되었으며 특히 구문삼면 검지리 같은 곳은 총 90포 중 79호가 양반호였다는 것이다.
군수 남태보가 말하는 익산지방의 1,700여 양반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가문들이었으며 또 그들을 양반으로 간주하게 된 기준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그에 관한 남태보 자신의 설명이 없어 정확하게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들 양반 중의 대부분이 지극히 가난하여 살고 있는 집이 움막과 같고 먹고 사는 꼴이 걸인을 방불케하는 형편에 놓여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도 그들이 양반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이나 일반 사람들에 대하여 행세를 부리고 또 그들로부터 깍듯이 대접을 받았으며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못살게 된 양반들까지도 모여들게 된 것이라고 남태보는 말하고 있다. 남태보는, 비록 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사회현상에 대하여, 그것은 익산지방이 갖는 하나의 자랑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와 같은 사회풍토를 낳게한 근본 원인을 동 지방의 “향망이 최엄”하였던 사실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 “향망이 최엄”하게 된 이유는 또 어디에 있었던가, 이에 대하여 남태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소양곡이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 근 20년 동안이나 거주하면서 이 지방의 사회기강을 엄격히 세우고 지방풍속을 순화한 결과”라고. 소양곡이라면 저 중종대의 명신 소세양(1486 성종17~1562 명종17)을 말한다.
이제 남태보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