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광해군대 불교 정책과 불교 문화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6636699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조선 중기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안으로는 자강(自强) 정책을, 밖으로는 기미(羈靡) 정책을 통해 조선사회의 전후 복구를 위한 최상의 방책을 세웠던 광해군대의 불교 정책과 불교 문화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2013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세종을 제치고 광해군 (1575~1644)이 1위를 차지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400여년 만에 영화 「광해」를 통해 그의 재평가가 시작된 것이다. 광해군의 오명을 벗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수십 년간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한 일을 영화한 편이 단방에 해낸 것이다.
      광해군은 수기치인을 신봉하는 유자들이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대책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것과 달리, 중도 연기를 신행하는 불자들이 전란을 맞아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해결해 가게 하는 모습에 깊은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가 임란 중에 보았던 승려들과 승군들의 모습은 일사분란하고 애국심이 넘쳤다. 그들은 근왕(勤王) 즉 나라(임금)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기 위해 사계(捨戒) 혹은 월계(越戒)를 범하면서도 애국과 애민과 애족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이것을 경험한 광해군의 불교 인식은 우호적이었고 이러한 친연성 아래서 불교 정책은 유연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봉인사의 원찰 지정과 청계사의 재회 시설을 통해 불교와의 소통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광해군의 여유와 자신감 위에서 사원 복원과 불서 간행의 직간접적 지원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처럼 광해군의 불교정책 추진과 불교 문화 지원은 통치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불교에 대한 우호적 인식과 유연한 통치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광해군은 고려 이래 조선의 대왕대비에서 궁중 나인에 이르기까지 궁궐 안 여인들의 신앙의 본산이자 왕실 여인들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던 정업원을 존속시켰다. 이것은 불교에 대한 그의 우호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여타의 왕처럼 정업원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킴으로써 불교와의 소통을 닫아버리지 않았던 왕이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조선 중기에 불교계와 긴밀하게 소통함으로써 통치이념인 유교와 민족문화인 불교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지닌 통치자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번역하기

      이 논문은 조선 중기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안으로는 자강(自强) 정책을, 밖으로는 기미(羈靡) 정책을 통해 조선사회의 전후 복구를 위한 최상의 방책을 세웠던 광해군대의 불교 정책과 ...

      이 논문은 조선 중기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안으로는 자강(自强) 정책을, 밖으로는 기미(羈靡) 정책을 통해 조선사회의 전후 복구를 위한 최상의 방책을 세웠던 광해군대의 불교 정책과 불교 문화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2013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세종을 제치고 광해군 (1575~1644)이 1위를 차지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400여년 만에 영화 「광해」를 통해 그의 재평가가 시작된 것이다. 광해군의 오명을 벗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수십 년간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한 일을 영화한 편이 단방에 해낸 것이다.
      광해군은 수기치인을 신봉하는 유자들이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대책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것과 달리, 중도 연기를 신행하는 불자들이 전란을 맞아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해결해 가게 하는 모습에 깊은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가 임란 중에 보았던 승려들과 승군들의 모습은 일사분란하고 애국심이 넘쳤다. 그들은 근왕(勤王) 즉 나라(임금)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기 위해 사계(捨戒) 혹은 월계(越戒)를 범하면서도 애국과 애민과 애족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이것을 경험한 광해군의 불교 인식은 우호적이었고 이러한 친연성 아래서 불교 정책은 유연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봉인사의 원찰 지정과 청계사의 재회 시설을 통해 불교와의 소통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광해군의 여유와 자신감 위에서 사원 복원과 불서 간행의 직간접적 지원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처럼 광해군의 불교정책 추진과 불교 문화 지원은 통치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불교에 대한 우호적 인식과 유연한 통치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광해군은 고려 이래 조선의 대왕대비에서 궁중 나인에 이르기까지 궁궐 안 여인들의 신앙의 본산이자 왕실 여인들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던 정업원을 존속시켰다. 이것은 불교에 대한 그의 우호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여타의 왕처럼 정업원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킴으로써 불교와의 소통을 닫아버리지 않았던 왕이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조선 중기에 불교계와 긴밀하게 소통함으로써 통치이념인 유교와 민족문화인 불교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지닌 통치자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