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1: 思悼世子[=先世子, 莊獻世子, 莊祖]를 伸寃하고 追崇하기 위해서는 영조 38년(1762) ‘壬午禍變’을 일으켰던 세력에 대한 討逆·徵討문제가 선행되어야 했다. 더불어 영조 51년1776) 乙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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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Korean
영조 ; The King Yeongjo(英祖) ; The King Jeongjo(正祖) ; The King Soonjo(純祖) Sado seja(思悼世子-先世子) ; Hyun-Ryoong Won(현륭원) ; Hwaseong(華城) ; Tangpyeong jeongchi(蕩平政治) ; the Party of Principle(Py p'a) ; the Party of Expediency(Sip'a) ; Woo ; Yi ; ; Ha-won ; Pak ; 정조 ; 순조 ; 사도세자 ; 현륭원 ; 화성 ; 탕평정치 ; 벽파 ; 시파 ; 李堣 ; 朴夏源 ; 鄭東浚 ; 鄭好仁 ; 成德雨 ; 政局動向 ; 政治勢力 ; 戚臣勢力 ; 權奸勢力 ; 『頤齋亂藁』 ; 『盧尙樞日記』『孝田散稿』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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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1: 思悼世子[=先世子, 莊獻世子, 莊祖]를 伸寃하고 追崇하기 위해서는 영조 38년(1762) ‘壬午禍變’을 일으켰던 세력에 대한 討逆·徵討문제가 선행되어야 했다. 더불어 영조 51년1776) 乙未年과 영조 52년[=정조 즉위년(1777)] 丙申年의 ‘丙申獄事’를 王世孫 즉 정조의 왕위계승과정 상의 討逆·徵討문제가 아닌 思悼世子가 연루된 ‘壬午禍變’에 대한 처분이었다고 飜案해야 했다.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발생했던 소론 이덕사·조재한세력의 ‘丙申春獄= 先世子伸寃上疏事件’과 남인 이도현·이응원 부자의 ‘先世子伸寃上疏事件’은 김상로·홍계희·홍인한·정후겸을 토죄한 ‘丙申獄事’의 獄案이라 할 수 있는 『明義錄』에 수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先世子伸寃上疏事件’이 정조 후반의 정국에서는 정조 16년(1792) 남인 李堣의 영남만인소 사건과 소론 朴夏源의 南學疏 사건으로 再論되었던 것이다.정조 16년(1792)에는 ‘柳星漢 상소사건’·남인 李堣의 ‘영남만인소’·소론 朴夏源의 ‘南學疏 사건’·‘진산사건’·‘문체반정사건’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柳星漢 상소사건’·‘영남만인소’·‘南學疏 사건’은 노론·남인·소론측의 사도세자 관련 追崇 典禮문제였다.정조 16년(1792) ‘柳星漢 상소사건’은 다음 달인 윤 4월에 영남에 있는 남인들의 ‘영남만인소’가 올라오고, 결국 사도세자에 대한 伸寃이 정국의 懸案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소론 朴夏源의 南學疏 사건이 발생했는데, 외방 유생 朴夏源 등이 柳星漢의 일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정조는 승정원에 명하여 그 상소를 가져다가 없애버리게 하였다.이 때문에 『承政院日記』에는 없고, 『正祖實錄』에는 남아있다. 이를 계기 삼아 정조는 사도세자에게 남아 있던 죄인의 허물을 벗겨내고[先世子辨誣], ‘임오의리’를 ‘天下萬世 公共之大義理’로 절대화하면서 자신과 ‘임오의리’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정치적 진출을 크게 확대시켰다.정조 17년(1793) 8월에 정조와 채제공은 『金縢』을 공개하여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후회하였다는 내용을 공개하였고, 정조 18년(1794) ‘華城城役’을 진행하는 수순을 밟아갔다.Ⅱ-2: 정조 19년(1795)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며, 乙卯園行을 거행하였다. 이즈음 소론 내에서 ‘鄭東浚 사건’이 발생하였다.표면적으로는 정조의 鄭東浚에 대한 寵愛로 그 분수가 넘치고 교만과 사치가 싹트고 비방과 물의가 일어났던 것이고, 남인 정약용 또한 鄭東浚에 대한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는 사료가 확인된다.金鍾秀를 뒤이은 沈煥之 등의 노론 벽파세력은 정조 19년 소론 鄭東浚․ 鄭景淳․ 李祖源[연안인, 영조 11년(1735)∼순조 6년(1806] 등의 소론측 ‘선세자 추숭세력’과, 정조 20년 소론세력 중 鄭象仁·鄭好仁 형제, 정민시집안인 온양 정씨 鄭好仁과 정조 10년 ‘丙午年의 喪變’으로 죽은 의빈 성씨 집안의 成德雨가 관련된 ‘鄭好仁·成德雨 사건’으로 소론세력 일부와 소론계 戚臣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노론 시파세력 중에서는 서유린․서유방형제가 벽파세력의 정치적 공격을 받았고, 반면에 정조는 정약용․이가환을 위시로 한 남인세력들을 등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정조의 정국운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결집은 더욱 가속화하였고, 이후 노론·소론·남인 내의 분기와 이합집산·합종연횡이 이루어지면서 時輩․時論․時派가 공고한 시파·벽파로의 分立으로 나타났던 것이다.이처럼 소론세력에 대한 노론 벽파의 공격은 정조의 즉각적인 처분으로 일단락되었고, 정조는 자신의 뜻에 부합하거나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을 등용시키거나 축출시킴으로써 정국변화를 유도하였고, 정국을 운용해 나갔다. 이후 정조는 동왕 24년(1800) 5월 ‘五晦筵敎’를 통해, ‘大蕩平’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최후통첩을 내놓고, 6월에 그 생을 마감하였다.Ⅲ-1: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인 순조 즉위년과 1년 동안 정조의 측근세력[=노·소론 시파와 남인 信西派] 대부분과 왕실세력인 은언군 인과 노론 척신세력[=홍낙임· 안동 김씨]의 일부가 정국에서 축출되었던 ‘辛酉獄事’‘辛酉迫害’라는 급박한 정치 상황과 정치세력의 교체가 있었다. Ⅲ-2:순조 6년(1806) ‘丙寅更化’로 노론 벽파세력이 정국에서 축출되었다. 이즈음 노론 척신계인 안동 김문 김조순, 노론 남공철·심상규, 소론 이만수·徐榮輔가 ‘天生五太史’로 불렸고, 척신계 반남 박문 박종경 등이 연합했다. 이들은 순조 초년에 발생한 소론세력 다수와 노론 시파계 인물이 피해를 입었던 ‘辛酉獄事’와 남인세력 다수와 노론 시파계 인물이 피해를 입었던 ‘辛酉迫害’에 대한 대대적인 伸救와 伸寃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이후 고종년간 李堣와 朴夏源은 추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