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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 The Donghak Peasant War and Chinese-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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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89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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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동학농민전쟁’은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기존의 경우 ‘청일전쟁’의 동기나 원인에 대해서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으면서 정작 전쟁과정이나 결과를 논함에 있어서는 ‘동학농민전쟁’과의 관계를 거의 논하지 않고 마치 별개인 것처럼 처리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는 승자 중심의 역사관, 일본 중심의 역사관이 깊이 투영된 결과이다. 이 논문은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논문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은, 특히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청과 일본이 주축국이 아니고 조선민중과 청, 그리고 일본의 ‘삼국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의 원인은 조선의 부패나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라 조선의 일관된 파병중지 요청과 철군 요청을 무시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다. 일본은 조선 출병과 주둔에 대해 시종 조선의 자주와 개혁을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정문제로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타국의 최고 주권자가 있는 경복궁을 무단 군사점령 하고, 무력협박 상태에서 각종 친일중심의 개혁논리를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조선이 공식 원조를 요청한 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자국과 공수동맹조약(攻守同盟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淸)이 전쟁에서 패하고 떠나자 조선민중들은 조국의 주권을 수호하고자 ‘동학농민전쟁’, 곧 ‘또 하나의 청일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정부와 화약(和約)을 맺고 집강소의 협치까지 했던 동학농민(東學農民)들이 다시 농민군(農民軍)이 되어서 소위 ‘근대 문명국’ 일본의 신식 무기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문명 일본’은 사실상 양민을 상대로 학살을 하였고, 게다가 조선정부와 농민군을 강제로 상호 적으로 만드는 반인륜을 저질렀다.
      결론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은 결코 ‘청일전쟁’의 원인이 아니고, 오히려 ‘청일전쟁’으로 인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즉 1차 기포는 내정개혁을 위해 일어난 혁명으로서 내정 문제였고, 2차 기포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벌인 조선의 주권을 침탈 만행에 저항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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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전쟁’은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기존의 경우 ‘청일전쟁’의 동기나 원인에 대해서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으면서 정작 전쟁과정이나 결...

      ‘동학농민전쟁’은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기존의 경우 ‘청일전쟁’의 동기나 원인에 대해서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으면서 정작 전쟁과정이나 결과를 논함에 있어서는 ‘동학농민전쟁’과의 관계를 거의 논하지 않고 마치 별개인 것처럼 처리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는 승자 중심의 역사관, 일본 중심의 역사관이 깊이 투영된 결과이다. 이 논문은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논문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은, 특히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청과 일본이 주축국이 아니고 조선민중과 청, 그리고 일본의 ‘삼국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의 원인은 조선의 부패나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라 조선의 일관된 파병중지 요청과 철군 요청을 무시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다. 일본은 조선 출병과 주둔에 대해 시종 조선의 자주와 개혁을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정문제로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타국의 최고 주권자가 있는 경복궁을 무단 군사점령 하고, 무력협박 상태에서 각종 친일중심의 개혁논리를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조선이 공식 원조를 요청한 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자국과 공수동맹조약(攻守同盟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淸)이 전쟁에서 패하고 떠나자 조선민중들은 조국의 주권을 수호하고자 ‘동학농민전쟁’, 곧 ‘또 하나의 청일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정부와 화약(和約)을 맺고 집강소의 협치까지 했던 동학농민(東學農民)들이 다시 농민군(農民軍)이 되어서 소위 ‘근대 문명국’ 일본의 신식 무기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문명 일본’은 사실상 양민을 상대로 학살을 하였고, 게다가 조선정부와 농민군을 강제로 상호 적으로 만드는 반인륜을 저질렀다.
      결론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은 결코 ‘청일전쟁’의 원인이 아니고, 오히려 ‘청일전쟁’으로 인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즉 1차 기포는 내정개혁을 위해 일어난 혁명으로서 내정 문제였고, 2차 기포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벌인 조선의 주권을 침탈 만행에 저항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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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Chinese-Japanese War’ developed on the Korean Peninsula and particularly its early part cannot be separated from our Donghak Peasant War. Nevertheless, awareness about ‘Chinese-Japanese War’ tends to be very much unfair. In other words, Donghak Peasant Revolution is monotonously mentioned as the cause,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accused and held responsible while the relationship with Donghak Peasant War has usually been ignored as to the war’s development and damage.
      After the battleground was moved to China, Donghak peasant army had a fierce battle against Japanese army on the Korean Peninsula, playing a role to support Qing at the rear. ‘Outbreak of the Chinese- Japanese War’ was not incurred by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 Donghak peasant army but rather the fruit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at they concluded the peace treaty Joseon government and were deprived of progress to experiment Jipgangso (autonomous reform institution established by Donghak peasant army) politics, serving as an opportunity to move forward to Donghak Peasan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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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hinese-Japanese War’ developed on the Korean Peninsula and particularly its early part cannot be separated from our Donghak Peasant War. Nevertheless, awareness about ‘Chinese-Japanese War’ tends to be very much unfair. In other words, D...

      The ‘Chinese-Japanese War’ developed on the Korean Peninsula and particularly its early part cannot be separated from our Donghak Peasant War. Nevertheless, awareness about ‘Chinese-Japanese War’ tends to be very much unfair. In other words, Donghak Peasant Revolution is monotonously mentioned as the cause,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accused and held responsible while the relationship with Donghak Peasant War has usually been ignored as to the war’s development and damage.
      After the battleground was moved to China, Donghak peasant army had a fierce battle against Japanese army on the Korean Peninsula, playing a role to support Qing at the rear. ‘Outbreak of the Chinese- Japanese War’ was not incurred by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 Donghak peasant army but rather the fruit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at they concluded the peace treaty Joseon government and were deprived of progress to experiment Jipgangso (autonomous reform institution established by Donghak peasant army) politics, serving as an opportunity to move forward to Donghak Peasan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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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李文忠公全集"

      2 구선희, "청일전쟁의 의미 - 조·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학회 (37) : 92-125, 2006

      3 조재곤, "청일전쟁의 새로운 이해 - 한국 내에서 전개된 상황을 중심으로 -" 한국근현대사학회 (74) : 38-65, 2015

      4 은정태,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5 오비나타 스미오,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6 동북아역사재단,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7 다이둥양(戴东阳),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8 강효숙,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조선병참부 —황해‧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학회 (51) : 139-168, 2009

      9 김경록,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에 관한 군사사적 검토"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93) : 233-273, 2014

      10 藤村道生, "청일전쟁" 도서출판 小花 1997

      1 "李文忠公全集"

      2 구선희, "청일전쟁의 의미 - 조·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학회 (37) : 92-125, 2006

      3 조재곤, "청일전쟁의 새로운 이해 - 한국 내에서 전개된 상황을 중심으로 -" 한국근현대사학회 (74) : 38-65, 2015

      4 은정태,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5 오비나타 스미오,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6 동북아역사재단,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7 다이둥양(戴东阳),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8 강효숙,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조선병참부 —황해‧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학회 (51) : 139-168, 2009

      9 김경록,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에 관한 군사사적 검토"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93) : 233-273, 2014

      10 藤村道生, "청일전쟁" 도서출판 小花 1997

      11 사카이 히로미(酒井裕美), "일본 역사교육 속의 청일전쟁과 조선 -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0) : 243-278, 2015

      12 박맹수, "이단의 민중반란" 역사비평사 2008

      13 杉村濬, "서울에 남겨둔 꿈(在韓苦心錄)" 건국대학교출판부 1993

      14 나카스카 아키라, "또 하나의 청일전쟁 :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모시는 사람들 2014

      15 동학학회,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 보은 장내리 동학집회의 종합연구와 전망 학술발표집"

      16 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선인 2006

      17 안외순, "동학농민혁명과 전쟁 사이, 집강소(執綱所)의 관민(官民) 협치(協治)" 동학학회 (51) : 171-203, 2019

      18 무츠 무네미츠, "건건록" 범우사 1993

      19 성강현, "강원도 원주 동학농민혁명" 모시는사람들 2019

      20 박종성, "갑오동학농민혁명의 爭點" 집문당 1994

      21 "高宗時代史 卷3"

      22 "駐韓日本公使館記錄 卷1・3"

      23 "駐韓日本公使館記錄 卷1・2・3"

      24 "養籌園戰稿 卷3"

      25 "舊韓國外交文書 卷2・3"

      26 金允植, "續陰晴史 上"

      27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28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학회 (25) : 285-318, 2006

      29 朴宗根, "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 抗" 一潮閣 1989

      30 김경록, "淸日戰爭 初期 朝日盟約의 강제 체결과 일본의 군사침략" 한일관계사학회 (51) : 281-326, 2015

      31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卷13"

      32 "東學亂記錄 上卷"

      33 신용하, "東學과 甲午農民戰爭硏究" 일조각 1993

      34 董德模, "朝鮮朝의 國際關係" 박영사 1990

      35 "日本外交文書 卷5"

      36 鄭喬, "大韓季年史 上"

      37 王信忠, "中日甲午戰爭之外交背景" 國立淸華大學 1937

      38 박맹수, "19세기 말 동아시아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왜곡된’ 기억-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 한국역사연구회 (51) : 37-66, 2004

      39 中塚明,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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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7-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06-25 학회명변경 영문명 : Tongyang Kojon yonguso of HANSEO UNIVERSITY -> INSTITUTE FOR EASTERN CLASSIC STUDIES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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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4 0.54 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4 0.52 1.407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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