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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前里刻石 癸巳年銘과 大兄加 = Cheonjeon-ri Petroglyphs Gyesanyeon-myeong and Daeh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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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58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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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은 천전리각석의 신라시대 銘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되는 계사년명의 내용을 검토한 것이다. 종래 계사년명의 연대는 513년과 453년설이 제기되어 있었는데, 후반부의 인명이 大兄加를 칭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일찍이 이것이 고구려의 官等인 대형일 가능성을 지적한 연구가 있었고, 본고 역시 그에 동의하여 신라의 수도 인근인 천전리에 나타나게 된 배경을 추적하였다.
      명문은 신라 6부를 구성하는 沙啄部 소속 인물을 비롯한 다수의 인원이 계사년 6월 22일 천전리에 왔다 갔음을 전하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런데 인명 표기 방식 등이 신라 中古期 금석문에 보이는 것과 동일하여 그를 전후한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 속 대형이 고구려의 관등이라고 할 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우호적이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양국이 전쟁국면으로 들어간 5세기 중반 이후는 비정되기 어려운 시기이므로, 계사년 명문은 453년 6월 22일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4세기 후반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양국 관계 초반부터 왕족 출신 質子를 보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고구려 역시 이를 이용하여 신라에 대한 우위에 서서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기의 질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일종의 외교사절 역할을 하였다. 인질을 보낸 쪽은 상대국의 문물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인질을 받은 쪽은 상대국에게 자국의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계사년 명문의 대형 소지자는 인명의 표기 방식 등으로 보아 신라 중앙의 6부인이 아니라 지방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였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서 접경지대의 재지 수장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고려할 때, 󰡔삼국사기󰡕 지리지에 본래 고구려 소속 郡縣으로 전해지는 지역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구려 관등을 신라인이 받게 된 계기로는 󰡔충주고구려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고구려왕이 신라의 지배층에게 의복을 사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의복은 官服으로서 착용자의 신분과 서열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의복의 수여와 함께 관등의 수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속조치가 이루어진 于伐城은 양국의 접경지대에 속했으므로, 해당 지역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재지 수장층을 우대하는 차원에서 고구려의 대형이 내려졌을 것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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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천전리각석의 신라시대 銘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되는 계사년명의 내용을 검토한 것이다. 종래 계사년명의 연대는 513년과 453년설이 제기되어 있었는데, 후반부의 인...

      본 논문은 천전리각석의 신라시대 銘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되는 계사년명의 내용을 검토한 것이다. 종래 계사년명의 연대는 513년과 453년설이 제기되어 있었는데, 후반부의 인명이 大兄加를 칭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일찍이 이것이 고구려의 官等인 대형일 가능성을 지적한 연구가 있었고, 본고 역시 그에 동의하여 신라의 수도 인근인 천전리에 나타나게 된 배경을 추적하였다.
      명문은 신라 6부를 구성하는 沙啄部 소속 인물을 비롯한 다수의 인원이 계사년 6월 22일 천전리에 왔다 갔음을 전하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런데 인명 표기 방식 등이 신라 中古期 금석문에 보이는 것과 동일하여 그를 전후한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 속 대형이 고구려의 관등이라고 할 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우호적이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양국이 전쟁국면으로 들어간 5세기 중반 이후는 비정되기 어려운 시기이므로, 계사년 명문은 453년 6월 22일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4세기 후반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양국 관계 초반부터 왕족 출신 質子를 보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고구려 역시 이를 이용하여 신라에 대한 우위에 서서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기의 질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일종의 외교사절 역할을 하였다. 인질을 보낸 쪽은 상대국의 문물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인질을 받은 쪽은 상대국에게 자국의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계사년 명문의 대형 소지자는 인명의 표기 방식 등으로 보아 신라 중앙의 6부인이 아니라 지방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였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서 접경지대의 재지 수장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고려할 때, 󰡔삼국사기󰡕 지리지에 본래 고구려 소속 郡縣으로 전해지는 지역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구려 관등을 신라인이 받게 된 계기로는 󰡔충주고구려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고구려왕이 신라의 지배층에게 의복을 사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의복은 官服으로서 착용자의 신분과 서열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의복의 수여와 함께 관등의 수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속조치가 이루어진 于伐城은 양국의 접경지대에 속했으므로, 해당 지역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재지 수장층을 우대하는 차원에서 고구려의 대형이 내려졌을 것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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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용성, "호우총의 구조 복원과 피장자 검토" 한국고대학회 (24) : 445-469, 2006

      2 여호규,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학회 (98) : 97-140, 2020

      3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전리각석"

      4 하일식, "천전리 서석 명문과 생활사의 실마리" 신라문화연구소 60 : 91-120, 2022

      5 전호태, "천전리 각석 명문 연구" 한국고대사학회 (91) : 209-242, 2018

      6 김정배, "중원고구려비의 몇 가지 문제점" 13 : 1979

      7 박찬흥,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과 신라의 위상" 고려사학회 (51) : 145-165, 2013

      8 이도학,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 10 : 2000

      9 이도학,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 10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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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전리각석"

      4 하일식, "천전리 서석 명문과 생활사의 실마리" 신라문화연구소 60 : 91-120, 2022

      5 전호태, "천전리 각석 명문 연구" 한국고대사학회 (91) : 209-242, 2018

      6 김정배, "중원고구려비의 몇 가지 문제점" 13 : 1979

      7 박찬흥,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과 신라의 위상" 고려사학회 (51) : 145-165, 2013

      8 이도학,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 10 : 2000

      9 이도학,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 10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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