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아메리카대륙 유람을 기점으로 량치차오의 사상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자각적 국민의 형성’이라는 계몽주의가 유보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통한 국가의 통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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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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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아메리카대륙 유람을 기점으로 량치차오의 사상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자각적 국민의 형성’이라는 계몽주의가 유보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통한 국가의 통합이 전면으로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사상전변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량치차오 개인의 사상뿐 아니라 중국 근대성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기존의 연구들은 개인의 자각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에서 집단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전변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량치차오의 근대사상이 서구 근대로부터의 일탈/미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기형적 근대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연구경향을 형성해 왔다.
본고는 신대륙유기에 나타난 미국에 대한 언술 분석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기 사상전변을 둘러싼 원인 및 그 의미와 한계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대륙유기에 나타난 량치차오의 미국 인식은 여러 층위로 분열되어 있다. 한편으로 그는 미국의 건국을 가능케 한 ‘미국의 정신’에 경외를 보내고 그것이 제국주의적 흐름 속에서 퇴색되어가는 것을 비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국 정신의 퇴색을 전지구적 대세 즉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중국 개혁의 방향을 재조정한다. 즉, 1902년까지 ‘근대적 주체의 형성’이라는 계몽주의적 과제에 전념했던 그는, 1903년의 미국행에서 두 가지 사실 ― 하나는 세계의 대세가 미국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 둘째는 ‘다수의 통치’의 실험장이었던 신세계 미국이 유럽에 이어 제국주의의 선두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 ― 을 발견하고 계몽주의를 유보하게 된다.
그가 미국 유람을 통해 얻은 첫 실감은 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미국이 세계무대에 부상한 사실이었다. 문명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세계의 패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량치차오가 일본 망명 기간 동안 근대국가의 모델로 삼아왔던 ‘서양’의 상 또한 유럽 중심에서 미국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했다. 1902년 즈음 근대 유럽 부르주아계몽주의 철학사조에 대한 연구노트를 집필하고 있었던 그는 유럽의 계몽주의와 중국의 전통적 철학체계를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주체형성의 사상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즉, 1902년까지 그에게 서양은 유럽이었던 것인데, 미국으로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근대 서양은 량치차오로 하여금 세계인식의 지도를 다시 그릴 것을 요청했고 그에 따라 중국의 개혁 역시 노선 수정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먼로주의를 왜곡하고 스페인전쟁(1898)으로 필리핀, 괌, 하와이 등을 합병하는 미국의 행태에서 보이듯, 태평양시대의 도래는 동방 나아가 중국에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시대 제국주의의 선두로 부상한 미국이 ‘현실로서의 미국’이라면, 다른 한편에서 미국의 건국을 가능케 했던 독립과 자유의 정신으로 대표되는 ‘가치로서의 미국’에 대해 량치차오는 지극한 경외심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민주주의를 보는 그의 견해는 당시 미국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국인 정치학자 제임스 브라이스(James Bryce)의 미국의 공화정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정신이 영국 연방주의와 뿌리를 공유한다고 보았던 브라이스의 영향 아래, 량치차오는 미국 민주주의에서 지방자치와 정당정치로 대표되는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찾기보다 강력한 중앙집권화의 경향을 읽어냈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중국의 개혁 방향 역시 강력한 계몽군주에 의한 ‘개명전제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끌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개명전제(enlightened absolutism)'라는 것이 근대 유럽 계몽주의의 한 형태이고 또 계몽주의가 사실상 그 이면에 전제주의를 내포하는 ‘양날의 칼’임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량치차오의 변화는 계몽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기보다 계몽주의가 도달하게 된 하나의 기착지로 보는 편이 옳다. 따라서 1903년을 전후한 량치차오의 변화는 근대 중국 계몽주의가 봉착한 아포리아라는 시각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귀결은 그의 사유 속 아시아 인식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국가를 모색하는 그의 사유의 항로는 서구 대 중국이라는 이항구조에 제약되어 있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자신이 믿는 가치와 어긋나더라도 현실로서의 미국을 모방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