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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圓嶠 李匡師의 중화의식과 역사인식 一考  :  「東國樂府」의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about Notion on History and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of Yi Gwa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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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은 李匡師의 역사인식을 「東國樂府」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이광사는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중의 하나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광사를 주목한 연구들은 대개의 경우 이광사의 사변적인 철학, 아니면 한시·서예와 같은 문예적 측면에 보다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광사의 「동국악부」에 대해서도 일정한 연구가 축적되었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요소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이광사에게서 드러나는 중화의식은 그 의미가 제한적으로 언급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한계로서 지적되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동국악부」에 드러나는 이광사의 역사인식을 조선후기 중화의식의 전개 속에서 새롭게 파악해 보았다. 17세기 중엽 명청교체 이래 조선의 중화의식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하였는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당색과 학파에 따라 다양한 학문적 모색을 하면서도 조선을 '중화의 계승자'로 인식하는 중화의 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중화의식은 고구려를 새롭게 평가하고 기억하는 역사인식으로도 광범위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광사에게서도 이런 중화의식이 바로 「동국악부」에서, 특히 고구려와 관련 된 역사를 옳은 '朝天石', '薩水捷', '城上拜' 등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조천석'에서는 고구려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순박하고 사납지 않은 것이 마치 伏羲나 黃帝 같았다”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풍속에 대해 유교적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살수첩'과 '성상배'에서는 유교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중국의 황제를 온전한 유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고구려의 장수가 특별히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으로서 묘사하였다. 이는 황제의 정벌에 대한 陪臣의 저항이라는 유교적 명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는데, 특히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이 백성을 피폐하게 짓밟아 버린, 낭비로 가득한 잘못된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 위해 『孟子』에서 맹자가 양혜왕을 비난할 때 사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밝은 덕을 돌이켜서 중국을 다스려 사방에 도달하게 하라는 유교적 훈계를 내리고 있었다. 이런 해석은 아들 이영익에게서도 동일하게 관철되었는데 결국 이광사에게 있어서 을지문덕과 안시성주는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킨 민족의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陪臣으로서 황제의 잘못을 깨우쳐준 유교적 가치의 상징적 존재로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광사를 비롯한 조선후기의 지배층들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자처한 조선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현실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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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李匡師의 역사인식을 「東國樂府」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이광사는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중의 하나...

      본 논문은 李匡師의 역사인식을 「東國樂府」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이광사는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중의 하나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광사를 주목한 연구들은 대개의 경우 이광사의 사변적인 철학, 아니면 한시·서예와 같은 문예적 측면에 보다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광사의 「동국악부」에 대해서도 일정한 연구가 축적되었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요소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이광사에게서 드러나는 중화의식은 그 의미가 제한적으로 언급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한계로서 지적되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동국악부」에 드러나는 이광사의 역사인식을 조선후기 중화의식의 전개 속에서 새롭게 파악해 보았다. 17세기 중엽 명청교체 이래 조선의 중화의식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하였는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당색과 학파에 따라 다양한 학문적 모색을 하면서도 조선을 '중화의 계승자'로 인식하는 중화의 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중화의식은 고구려를 새롭게 평가하고 기억하는 역사인식으로도 광범위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광사에게서도 이런 중화의식이 바로 「동국악부」에서, 특히 고구려와 관련 된 역사를 옳은 '朝天石', '薩水捷', '城上拜' 등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조천석'에서는 고구려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순박하고 사납지 않은 것이 마치 伏羲나 黃帝 같았다”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풍속에 대해 유교적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살수첩'과 '성상배'에서는 유교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중국의 황제를 온전한 유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고구려의 장수가 특별히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으로서 묘사하였다. 이는 황제의 정벌에 대한 陪臣의 저항이라는 유교적 명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는데, 특히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이 백성을 피폐하게 짓밟아 버린, 낭비로 가득한 잘못된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 위해 『孟子』에서 맹자가 양혜왕을 비난할 때 사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밝은 덕을 돌이켜서 중국을 다스려 사방에 도달하게 하라는 유교적 훈계를 내리고 있었다. 이런 해석은 아들 이영익에게서도 동일하게 관철되었는데 결국 이광사에게 있어서 을지문덕과 안시성주는 고구려의 자주성을 지킨 민족의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陪臣으로서 황제의 잘못을 깨우쳐준 유교적 가치의 상징적 존재로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광사를 비롯한 조선후기의 지배층들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자처한 조선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현실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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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Yi Gwangsa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to reveal various aspects of Joseon dynasty in 18th Century. He was a member of 'Ganghwa School' that had formed some kind of unique thought around Jeong Jedu in 18th century. Meanwhile, Yi Gwangsa held traditional notion on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in common with other ruling class of Joseon dynasty. This point is revealed in his chinese poetry 'Donggukakbu' which described Korean history from Dan-gun to loyal retainer of Goryeo dynasty.
      In Donggukakbu, he emphasized on the victory of Goguryeo against Sui or Tang Chinese forces not because he had some kind of proto-nationalism against Chinese centered world order, but because he regarded Goguryeo as a protector of confucian virtue that made Sui or Tang realize her misconduct to give pain on people or her improper invasion to neighboring small state which had no any confucian wrong. Namely, he interpreted Goguryeo's defeating to Chinese force in terms of confucian value.
      Especially, he thought Tang Taizong's invasion to Goguryeo was serious wrong movement, because Taizong gave great pain on his people to carry out war against Goguryeo. He used a special term that had been used by Mencius to blame a King Yanghye who had given great pain on people to carry out war. In other word, he metaphorically regarded Tang Taizong as King Yanghye who had been blamed by Mencius.
      In sum, many contemporary korean scholars have regarded Yi Gwangsa as one of progressive intellectual different from conservative neo-confucianists. But Yi Gwangsa also held traditional notion on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in common with other ruling class of Joseon dynasty, and he interpreted korean history in terms of traditional confucian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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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i Gwangsa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to reveal various aspects of Joseon dynasty in 18th Century. He was a member of 'Ganghwa School' that had formed some kind of unique thought around Jeong Jedu in 18th century. Meanwhile, Yi Gwangsa held...

      Yi Gwangsa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to reveal various aspects of Joseon dynasty in 18th Century. He was a member of 'Ganghwa School' that had formed some kind of unique thought around Jeong Jedu in 18th century. Meanwhile, Yi Gwangsa held traditional notion on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in common with other ruling class of Joseon dynasty. This point is revealed in his chinese poetry 'Donggukakbu' which described Korean history from Dan-gun to loyal retainer of Goryeo dynasty.
      In Donggukakbu, he emphasized on the victory of Goguryeo against Sui or Tang Chinese forces not because he had some kind of proto-nationalism against Chinese centered world order, but because he regarded Goguryeo as a protector of confucian virtue that made Sui or Tang realize her misconduct to give pain on people or her improper invasion to neighboring small state which had no any confucian wrong. Namely, he interpreted Goguryeo's defeating to Chinese force in terms of confucian value.
      Especially, he thought Tang Taizong's invasion to Goguryeo was serious wrong movement, because Taizong gave great pain on his people to carry out war against Goguryeo. He used a special term that had been used by Mencius to blame a King Yanghye who had given great pain on people to carry out war. In other word, he metaphorically regarded Tang Taizong as King Yanghye who had been blamed by Mencius.
      In sum, many contemporary korean scholars have regarded Yi Gwangsa as one of progressive intellectual different from conservative neo-confucianists. But Yi Gwangsa also held traditional notion on Confucian-Cultural Succession in common with other ruling class of Joseon dynasty, and he interpreted korean history in terms of traditional confucian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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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조선후기 고구려사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
      • Ⅲ. 이광사의 중화의식과 안시성 전투의 유교적 해석
      • Ⅳ. 맺음말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조선후기 고구려사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
      • Ⅲ. 이광사의 중화의식과 안시성 전투의 유교적 해석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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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李匡呂, "李參奉集"

      2 김종진, "해동악부를 통해 본 성호의 역사 및 현실인식" 17 : 1983

      3 김영숙, "한국영사악부연구" 慶山大學校出版部 1998

      4 최두식, "한국영사문학연구" 太學社 1987

      5 이혜순, "한국악부연구Ⅱ" 12 : 1982

      6 이혜순, "한국악부연구Ⅰ" 39 : 1981

      7 심경호, "조선후기 한시의 자의식적 경향과 해동악부체" 2 : 1981

      8 허태용, "임진왜란의 경험과 고구려사 인식의 강화" 190 : 2006

      9 장유승, "이종휘(李種徽)의 자국사 인식과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민족문학사학회 35 (35): 40-82, 2007

      10 박철승, "이광사의 동국악부 연구" 배재대 1996

      1 李匡呂, "李參奉集"

      2 김종진, "해동악부를 통해 본 성호의 역사 및 현실인식" 17 : 1983

      3 김영숙, "한국영사악부연구" 慶山大學校出版部 1998

      4 최두식, "한국영사문학연구" 太學社 1987

      5 이혜순, "한국악부연구Ⅱ" 12 : 1982

      6 이혜순, "한국악부연구Ⅰ" 39 : 1981

      7 심경호, "조선후기 한시의 자의식적 경향과 해동악부체" 2 : 1981

      8 허태용, "임진왜란의 경험과 고구려사 인식의 강화" 190 : 2006

      9 장유승, "이종휘(李種徽)의 자국사 인식과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민족문학사학회 35 (35): 40-82, 2007

      10 박철승, "이광사의 동국악부 연구" 배재대 1996

      11 윤종배, "영사악부<성상배>에 나타난 역사의식" 8 : 1997

      12 정만조, "연려실기술의 편찬시기와 편찬자 문제검토" 16 : 1993

      13 우경섭, "송시열의 세도정치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2005

      14 김문식, "서명응 저술의 종류와 특징" 太學社

      15 김남기, "김창흡의 <送大有隨伯氏赴燕>에 대하여" 20 : 1997

      16 심경호,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17 정양완,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18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燕行錄選集補遺"

      19 林基中編, "燕行錄全集1∼100" 東國大學校出版部 2001

      20 심경호, "新編圓嶠李匡師文集" 시간의 물레 2005

      21 李匡師, "圓嶠集選"

      22 李種徽, "修山集"

      23 李令翊, "信齋集"

      24 신장섭, "<동국악부>를 통한 원교와 신재의 역사인식 고찰" 22 : 2007

      25 허태용, "17세기 말∼18세기 초 중화계승의식의 형성과 정통론의 강화" 103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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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8-25 학회명변경 한글명 : (사)한국인물사연구소 -> (사)한국인물사연구회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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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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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3 0.83 0.8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3 0.64 1.883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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