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의 성경 해석은 현대적 상황에 지배를 받은 해석이다. 상황의 중요성이나 복음의 현실적인 적용의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한 점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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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학위논문(석사) --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 신학과 , 2005. 2
2004
한국어
231.93 판사항(4)
경기도
74p. ; 26cm.
참고문헌: p. 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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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의 성경 해석은 현대적 상황에 지배를 받은 해석이다. 상황의 중요성이나 복음의 현실적인 적용의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한 점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상황에 따른 본문의 해체로 기울어진 성경의 상대주의적 이해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올바른 신학으로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작금의 여러 가지 사회의 환경이 성경해석에 반영되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나, 성경의 해석이 시대의 요구를 따라 가야 한다는 이유로 또는 일부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인해서 상대화되는 것은 옳은 성경해석이 아니다.
여성 안수의 문제를 사회적인 또는 구조적인 부분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다. 사회가 발전함으로 많은 여성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교인의 수가 증가하고, 그 증가된 여성의 비율이 높아짐으로 여성에 대한 배려로 구조적인 직급의 사다리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거나 사회참여나 교회 안에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사회적으로 보아서 나름대로의 좋은 대안이다. 또한 사회의 발전으로 많은 남성들이 교회의 여러 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남으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이러한 가운데 여전히 여성의 성직을 금하는 것은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의 차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주장은 상대주의적 접근에 근거한 입장으로서 성경의 성직에 대한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기독교는 유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성우월주의적인 구조에서 지속적으로 남성중심의 교회 직분을 유지하여 왔다는 주장을 한다. 이 또한 성경의 신적권위를 침해하는 견해로서 결코 기독교의 계시적 정통성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그 근본에서부터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결국 성경에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계시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성경의 계시적 진정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여성의 성직 금지가 풀렸다는 것은 교회 구조의 지각 변동을 가져올 것을 예견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관련된 교회 구조의 극적인 변동이 기대된다며 남녀 간의 정의롭지 못한 교회 구조가 정의로운 평등한 구조로 바뀌어 갈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교회의 역사는 온전한 교회의 역사가 아니며, 하나님의 공의를 왜곡시킨 경우가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심에 대한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모순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경이 제시한 직분의 제도가 사회의 발전이나 구성원의 비율이나, 지위나 역할에 의해서 변경되어지는 것이 가능 하다면 여성 안수를 정당화하는 이러한 주장도 언젠가는 변화의 대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교회의 성직은 시대와 문화적 변전에 따른 상대적 가치의 실현이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절대진리성에 대한 믿음도 필연적으로 위협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제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를 기억하지 않는 입장은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상실케 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으로 본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목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큰 이슈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명시하는 금기도 시대에 비추어 허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히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단언하건데, 여자 목사 제도는 비성경적이다.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학도 또한 그것을 용인하는 교회도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렇게 여성 안수 문제에서의 논쟁의 요지는 성경의 권위와 가장 먼저 관련되어 있다. 많은 여성 안수 찬성자들의 주장을 보면 성경의 권위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여성 안수의 문제는 성경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정당하게 지지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성경주석을 보면 앞에서 언급한 성경의 주석에서 여성 안수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혹은 그 이유에 관하여 그 당시에는 여성안수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여성안수의 문제가 성경에서 논쟁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해당 이슈에 대한 논쟁이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시대적 제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바르지 않다. 성경 주석자들이 여성안수와 관련된 특정 본문에서 그 이슈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 안수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경이 여성안수의 문제로 아무런 서로 다른 본문들 사이에 긴장이나 의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여성안수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거론의 여지가 없음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주석가들이 성경의 주석을 할 때 논쟁의 여지가 없는 부분을 언급하면서 설명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성경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여성안수에 대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말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바른 성경이해이다.
성경의 침묵이 성경의 무오성을 무의미하게 하지 않는다.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것은 성경의 침묵에 대하여 함께 따르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화될 수 있는 인간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사회의 구조와 문화 속에서 언제나 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온전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여성 안수의 문제를 성경의 무오성과 무관한 문제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기본의 자세는 성경에 대한 바른 자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경의 무오성 위에 세워진 신학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삶도 이러한 신학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다.
끝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재 문제들이 교회의 성직이나 직분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어서는 안된다. 즉 여성안수의 문제가 여성의 억압으로부터 풀려나게 하는 해방이나, 상처를 회복하게 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가정의 회복이나 사회의 병든 부분에 대한 치유와 사랑의 회복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만약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여성들의 억압된 상황이 없이 원만한 사회의 구조와 상처 없는 상황에서도 여성들의 안수 문제가 부각되었다면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오늘의 여성 안수 문제는 상황에 대한 해석으로 시대적인 아픔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3)",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4:28)"는 말씀에서처럼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마음, 그리고 구조적인 모순으로 대두되는 삶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 회복하고 치유하는 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남자의 여자의 머리됨은 남자의 권위나 위치만을 강조하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며, 남자와 여자 의 관계에서의 사랑의 회복이 있을 때 온전한 관계 속에서 머리됨이 인정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타당한 이유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19:18)."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 이다(마가복음12:33)."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누가복음10:27)."
이와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우리에게 중요하게 제시하는 교훈이며, 원리이며, 그리고 질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교회 공동체의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 안에서 질서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질서만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고, 질서를 세우지 아니하며 자신의 위치만을 주장함도 옳지 않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됨에 대한 일관된 대 주제와 교회와 사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행함을 따라 사는 삶을 회복하여야 한다. 질서는 무너진 곳에서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서구의 해방신학과 목회 실용주의에서 주장하는 더 나은 결과를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말씀의 권위 안에서 그 말씀의 권위와 질서를 세우는 사랑의 삶의 회복운동으로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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